![](http://img.newspim.com/content/image/2014/07/08/20140708000103_0.jpg)
1부 가버린 시절,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다
- 어렵고 가난했던 날들의 풍경 2
60년대의 위생 상태는 불결하였다. 오래된 목조건물에는 빈대들이 도사리고 있다가 사람들에게 달려들어 피를 빨아먹었고, 사람들이 청결을 유지하지 않으면 몸과 머리털에 이가 득시글거렸다. 가끔씩 학교에서 이 박멸제인 DDT를 공급해 주었다. 또 분기별로 한 번씩 회충약도 지급하였다. 쥐잡기운동도 한창이었다. 쥐를 잡기 위해 고양이를 길렀고 쥐가 자주 오갈만한 곳에는 쥐 잡이 틀을 설치하거나 쥐약을 놓아두었다. 그리고 쥐를 몇 마리나 잡았는지 확인받기 위해 쥐꼬리를 잘라다가 학교에 제출하였다.
목욕탕 풍경. 휴일이면 목욕탕은 언제나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목욕탕에 가면 선생님도 만나게 되고 평소 근엄하게만 느껴지던 이웃집 어르신도 서로 등을 밀어주는 사이로 변하게 된다. 제때 물을 갈지 않아 욕탕에 때가 둥둥 떠다니는 모습 때문에 기분이 찜찜한 적이 많지만 그러면서도 다음 주 여전히 그 목욕탕을 다시 찾지 않을 수 없었다. 덕분에 때밀이 영업도 덩달아 호황을 누렸다. 신종 유망 직업으로까지 부상했다. 때밀이 영업을 하려면 권리금으로 웃돈을 얹어 주어야 한다는 소문도 들렸다.
60년대 중반부터는 라디오 보급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잡음이 찍찍대었다. 그 방송이라도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한밤의 음악편지’를 들으며 낭만에 젖어들거나 꿈을 키워 나갔다. 얼마 후 전축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축의 성능이 별로인데다 레코드판도 해적판 LP앨범이어서 음악을 듣는 중간에 판이 통통 튀거나 찍찍거리며 잡음이 많았다. 그래도 전축은 젊은이들에게 보물과 같은 존재였으며 전축을 지닌 친구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별다른 여흥과 오락의 대상이 없었기에 가장 인기 있는 소일거리는 영화 관람이었다. 특히 설날, 추석 등 명절이나 연휴 때면 극장 앞은 영화를 보러온 인파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암표장수까지 등장해 극성을 부리기도 했다. 이후 흑백TV가 등장하였다. 그때까지 TV를 가진 집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다방에서는 TV를 설치해 두고서 손님들을 끌어 모았다. TV의 등장으로 서커스단이 사라지게 되었고, 영화관의 영업이 심한 타격을 받게 되었다.
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전차가 운행되었다. 그러다 버스의 보급이 점차 확대 되면서 부터 전차가 사라졌다. 버스는 콩나물시루 그 자체였다. 아침에 학교에 등교할 때, 버스 안에서 이리 밀리고 저리 차이면서 정신없이 시달리다보면 수업을 받을 기분이 영 아니었다. 때로는 교복단추가 떨어져 나갔다. 책가방 속의 도시락에서 국물이 쏟아져 책과 교복에 배어 쿰쿰한 냄새가 날 때도 있었다.
70년대 초반부터 청바지가 젊은이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점차 기성세대들에게도 확산되어 갔다. 그러는 사이 청바지는 어느새 남녀노소를 불문하는 대중의 옷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여성들의 옷차림은 월남치마를 거쳐 판탈롱바지 그리고 미니스커트로 변모해 갔다.
장발차림이 유행하였는데, 시대상황에 대한 저항의 성격도 있었다. 당시만 해도 이발소와 미장원 간에는 엄격한 구별이 있었다. 남자는 머리를 깎을 때 반드시 이발소를 이용했다. 장발풍조로 이발소 영업이 잘 되지를 않자 퇴폐이발소가 등장하여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지금의 중년들은 이 어려운 시기를 잘 견디어 냈다. 후손들에게는 절대 이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 아래 몸 바쳐 일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해내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룩해 낸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이 지나간 어렵고도 아픈 세월들을 좋은 추억으로 가슴에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다.
*저자 이철환 프로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현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초빙위원
-현 단국대 경제학과 겸임교수(재직)
*저서- 과천청사 불빛은 꺼지지 않는다, 한국경제의 선택, 14일간의 경제여행, 14일간의 (글로벌)금융여행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