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벨이 울렸다. 그 남자였다. 둘이서 내 정황에 대해 얘기하는 것 같았다. 몇 백 도로 열을 받고 있다든지, 눈빛이 위험해지고 있다든지, 좀더 두고보자든지 하는 말들이 나를 둘러싼 유리관 밖에서 오가는 것 같았다.
내가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어 들것에 실려나가고 있고 그 과정을 또하나의 내가 망연히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다. 아내는 차분했다. 모든 것을 준비한듯이, 혹은 포기한듯이.
그 남자가 집 근처에서 전화하는 것 같은데, 만나보겠냐고 아내가 물었다.
“오라고 그래!” 흥분해서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금세 정정했다.
“다음에 오라고 그래!”
지금 만나면 실수할 것 같애, 실수. 딸아이 둘이 곤히 자고 있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아이들을 감싼 평온한 고요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했다. 그 아늑한 고요와 나 사이의 아슬한 끈이 끊어졌다 이어졌다 했다.
어지러웠다. 아내와 남자와의 통화가 길어지자 분통이 터졌다. 안방의 이 자리는 내 자리 아닌가. 내 아이들이 새근거리며 단잠을 자고 있고 아내가 그 곁에서 옷을 개거나 과일을 깎던 곳. 어제만 해도 딸들을 하나씩 안고 딸들의 재롱 경쟁을 즐기던 곳 아닌가.
그런데 지금, 나의 자리가 없다. 결혼 십 년간 내 심신이 꼬박 길들여온 공간에, 돌연 낯선 기(氣)가 고여 견딜 수 없다. 나는 안방 문을 밀치고 내달려 대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펑! 단단한 철문 안쪽이 휘어질 정도로 온몸에 충격이 전해 왔다. 이러다가 저 십오 층 베란다 밖으로 튕겨 나갈까봐 겁이 났다. 순간순간 일어나는 발작적인 충동에 의식이 먹히지 않도록 죽을 힘을 다해야 했다.
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아내는 문을 열었다. 밖에, 그가 서 있었다. 실내에 들어서더니, 현관에 말없이, 마냥 서 있다. 그 깊은 침묵에 내 흥분도 제자리를 찾아 이상하게도 어울리지 않게 사교적인 말투가 튀어나왔다.
“안녕하십니까. 이진석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최영호라고 합니다”
“들어오십시오”
“네”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모나미 볼펜이 차갑게 놓여 있었다. 아내는 짐짓 태연하게 맥주를 내놓는다. 침묵. 그와 나 사이. 우리는 어쩌다가 이런 기괴한 경우에 처하게 되었는가. 심연 속에 녹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침묵의 연소시간은 길고 깊었다.
“당신의 아내를 사랑합니다. 현주를 데려가려고 왔습니다”
이미 혼란 자체인데 또다른 혼돈의 쇠망치가 사정없이 나를 내리치고 있었다. 졸지에 내가 아내의 아버지, 장인어른의 격에 처하게 되었다. 막막함 속에, 한 가지 생각이 단도처럼 빠르게 스쳤다.
“당신이 내 아내를 데려가는 방법은 세가지가 있소”
“........”
“첫째 내가 자살하는 방법. 하지만 나는 아내를 위해선 자살할 수 있어도 당신을 위해서는 자살하지 않소”
“........”
“둘째 내가 아내와 이혼하는 방법. 하지만 나는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혼하지 않소”
“.........”
“셋째 당신이 나를 죽이고 아내를 데려가는 방법. 그러니 나를 죽이고 아내를 데려가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