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내게는 단지 그런저런 친구 중 하나라고 했는데. 은폐. 기막힌 은폐였다. 아내의 성격이 밝고 투명해 하는 말들을 액면 그대로 믿어왔는데. 어지러웠다. 둘 사이가 심각한 것 같다고, 여자는 분노와 흥분을 억누르며 말했다.
남편이 매일 밤 늦게 들어오고, 방문을 걸어잠근채 혼자 술을 마시거나, 안 듣던 흘러간 팝송을 밤새 틀어놓고 있다고 했다. 심야통화를 길게 하는 것 같다고도 했다. 그러고 보니 최근 아내의 행동이 평소와는 많이 달랐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안개에 가려있던 섬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푸드득 날아오르는 날짐승, 불길한 까마귀, 수상한 음지식물들이 속속들이 눈에 들어오는 듯했다. 아내의 핸드폰 번호를 누르는 내 손가락이 몹시 떨리고 있었다.
“나야, 어디야?”
“차 마시고 있어”
“누구야, 누구랑 있어? 너 나 속였지?”
핸드폰이 끊겼다. 다시 걸었다. 받자마자 끊는 소리가 났다. 다시 걸었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메모를 남겨주세요”
나는 참을 수 없는 상태에서 나오는 굉음을 지르고 있었다. 칠판에 급하게 적는 백묵이 부러지는 순간의 탁음으로, 아내 가슴에 메모 아닌 낙서를 갈기고 있었다.
아파트 실내가 진공상태로 변해 있었다. 내 머릿속도 진공으로 변했고, 둔한 돌 몇 개가 굴러다니는 듯했다. 나는 몇 분 전의 내가 아니다. 나를 둘러싼 시공과 나자신이 완전히 변해버렸다. 순식간에 극으로 밀려났다. 너무 심하게 밀려,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 슬픔이란 감정이 솟아나기 전, 고통이나 분노가 들이닥치기 전의 어설픈 공터에 던져져 있었다.
아내는 밤늦게 들어왔다. 피곤해도 늘 웃는 얼굴인데 오늘은 웃지 않는다. 저 솔직함이 두려웠다. 안개를 거둔 불온한 섬 내부에 얼마나 뜨거운(내겐 차가운) 열정이 숨어있을까. 아까 통화가 간신히 되었을 때, 아내는 딜레마에 빠져있다고 했다. 아, 그놈의 딜레마. 언제부터. 얼마만큼의?
피로에 쌓인 아내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나는 감을 잡았다. 아내는 그런 말을 쓰는 여자가 아니다. 웬만한 어려움은 가볍게 웃으며 풀어나갔고 영어 단어 섞이지 않는 물 흐르는 듯한 화술로 주위를 화사하게 물들이는 여자였다. 그런 여자의 입에서 처음 나온 말. 평소 가슴에 저장되지 않은 말이 불쑥 튀어나올 때는 긴장의 도를 달리 해야 한다. 그쯤은 알고 있다. 약하게 흘러나왔을지라도 호소나 단말마같은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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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에 모나미 볼펜이 놓여 있었다. 집어서 내 검지 위에 올려놓았다. 볼펜이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다.
“이런 거야? 이런 딜레마? 그와 나?”
아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날 잡아줘”
꺼질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는 슬며시 안겨왔다. 나는 뿌리쳤다.
“싫어! 난 나를 버리고 떠난 사람들은 안 잡아!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어!”
단호하게 자르는 말투가 나자신에게도 소름끼쳤다. 내가 말한 것이 아니라, 말하는 순간 누군가 끼어들어 냅다 소리를 지른 것 같았다. 나는 내심과는 다르게 겉돌고 있었다. 솔직히 아내를 품에 안고 차분하게 사연을 들어보고 싶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거나, 오해가 있을지 모른다. 더구나 아내는 몹시 지쳐 보였다. 왠지 가엾다는 생각마저 일고 있었다. 하지만 내 말은 이미 가팔랐고 강렬했다. 날 버리고 떠난 사람들. 그 지독한 아픔들이 사라진줄 알았는데, 깊은 곳에 고여있다가 이 틈을 타 흘러나온 것같았다. 후련하다는 느낌과 동시에 험악한 습기가 가슴 밑바닥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