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고종민 정경환 기자] # 지난해부터 야심차게 재형(재산형성) 펀드를 준비해 오던 모 자산운용사는 지난해 말 대선 정국에서 갑작스레 재형저축 부활론이 튀어나오면서 의욕이 한 풀 꺾이고 말았다. 은행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 6일 재형저축이 출시된 이후 사흘 만에 은행으로 500억원 이상이 몰리고 있지만, 재형 펀드는 채 20억원이 안 되고 있다.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4%대 확정금리를 3년 간 받고 이후 4년 간은 훨씬 낮은 실세금리를 받는 것으론 재형이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며 "물가상승률을 이길 수 있는 상품은 결국 위험을 감내하는 투자형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신규 시장이 열린다 해도 은행 또는 보험사 대비 증권·자산운용사 등 금융투자업계는 크게 불리한 환경에서 경쟁을 벌여야 한다. 비슷한 경우로 8년째를 맞는 퇴직연금 시장에서도 증권사는 은행의 독주를 그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처지다. 은행이 역마진을 감수하며 고금리로 시장을 싹쓸이하니 증권사로서는 대책이 없다.
# "주식형펀드 하나 가입하는데 한 시간이 걸리는 데 누가 선뜻 가입하겠어요?" 한 증권사 마케팅 관계자가 뿔났다. 펀드 가입을 위해 작성해야 하는 서류가 많아지고 까다로워진 것은 상당부분 은행 탓이라는 게 이 관계자의 주장이다. 은행이 펀드 판매를 크게 늘리며 '펀드 열풍'이 불었고 2000년대 중반 대호황을 경험했지만 불완전 판매가 많아 이후 규제가 강화됐다는 얘기다.
금융감독원이 은행들을 대상으로 주가연계신탁(ELT) 판매 실태를 미스터리 쇼핑한 결과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드러났다. 판매하는 은행원들이 상품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권유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로 인해 규제가 강화되면 증권사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 증권사 규제, 은행과 같이 적용하니 과도
증권사 상품은 은행 예적금과 달리 원금 손실 가능성이 있는 '위험' 자산이다. 이 위험을 감수해야 수익성이 높아진다. 위험을 얼마나 떠안을 수 있는가에 따라 수익률의 크기도 달라지는 '투자'라는 얘기다.
이런 차이는 업종의 수익 모델로도 이어진다. 은행은 예금 금리와 대출 금리 차이(예대마진)를 기본적인 수익원으로 한다. 금리 변동이 있어도 예대마진만 유지되면 수익성에 큰 문제가 없다. 대출 자산에서 부실이 발생할 때가 문제다.
반면 증권사는 예금, 대출 기능이 없으므로 위험을 감수하고 직접 '투자'해 이익을 내거나 투자를 중개하고 수수료를 받는다. 따라서 신규 사업이나 건전성 규제 또는 판매창구에서의 규제 등에 있어서 은행과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 특성을 무시한 채 은행과 증권사에 같은 규제의 잣대를 적용하는 게 문제라는 금융투자업계의 주장이다.
증권유관기관 고위 관계자는 "증권 상품을 은행들이 마구 팔아 수익을 많이 올리고 나면 설거지는 증권사들이 해야 한다"며 "파생상품이나 복잡한 운용기법이 들어가는 상품은 은행에서 판매하는 데 제한을 두거나, 증권사와 협업할 때만 가능하도록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영업용순자본비율(NCR)로 대표되는 건전성 규제도 증권업 특성을 무시한 규제로 지적된다. NCR은 증권사의 재무건전성을 보여주는 지표로, 은행의 건전성 지표인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과 유사한 데이터다.
자본시장법은 NCR 100% 이상을 유지할 의무만 명시하고 있는데, 금융당국은 NCR이 150% 미만으로 떨어지면 적기 시정조치 대상으로 분류해 버린다. 이는 BIS 비율로 환산하면 12% 수준으로, BIS 비율 8%만 유지해도 되는 은행과 비교해 볼 때 차별이 아닐 수 없다.
나아가 증권사가 업무영역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더 큰 차별을 감수해야 한다. 주식워런트증권(ELW) 상장이나 유동성 공급자(LP), 국고채 전문 딜러 업무는 NCR 250%를 충족해야 한다. 국민연금 등 기관투자가가 거래 증권사를 선정할 때는 NCR 400% 이상에 최고점을 부여함에 따라 주요 증권사의 NCR은 500%를 훌쩍 넘기고 있다.
이를 두고 업계에선 한 목소리로 각 사업별 NCR 기준을 낮춰야 한다고 말한다.
박종수 금융투자협회장이 취임 1주년 기자 간담회에서 "NCR 규제 완화에 주력할 것"이라고 밝힌 만큼 규제 완화는 증권업계가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필수 조치다.
박 회장은 "NCR 비율이 150%면 충분하다고 하는데 국민연금은 400%를 요구한다"며 "150%도 높지만 국민연금이 말도 안되게 높은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상황"이라고 비판했다.
◆ 증권과 은행, 산업 자체가 다르다
금융투자업계 고위관계자는 "재형저축 같은 경우만 봐도 증권 쪽엔 안 맞는 상품인데, 전 금융기관에 다 똑같이 해줬으니 문제 없다고 하니 난감하다"며 "산업 특성 상 고객 자체가 나눠지므로, 똑같은 잣대로 봐선 안 되고 각 산업별 특성을 정확히 알고 그에 맞는 정책을 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즉, 개별 특성을 무시한 획일적 평등이 아닌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대하는 합리적 평등이 요구된다는 주장이다. 이에 '투자업'이라는 증권업계의 특성을 고려한 정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대형 증권사 고위관계자는 "증권사 자체 경쟁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라며 "(은행과는 달리) 증권은 기본적으로 투자 상품이므로 투자 상품에 혜택을 준다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대형 증권사 고위관계자는 "확정금리로 가면 은행을 이길 방법이 없다"며 "리스크를 부담하더라도 고수익을 노릴 수 있는 다양한 금리 상품을 개발, 판매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 주길 바란다"고 전했다.
[뉴스핌 Newspim] 고종민 정경환 기자 (hoan@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