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김민정 기자] 고은 문학은 여전히 청년이다. 역사의 새벽을 깨우고 달리는 기차처럼 멈춤이 없고 앞으로만 달린다. 그래서 그는 미래의 시인이다. 과거는 그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시인이 과거를 들추고 과거를 회상한다. 그러나 그조차 순환하는 우주의 시간처럼 과거는 미래로, 미래는 과거로 맞닿아 생명력을 발한다.
이번에 펴내는 1970년대의 일기 ‘바람의 사상’과 대담집 ‘두 세기의 달빛’은 바로 과거이되 과거일 수 없는 고은 문학의 미학과 정신의 원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저작들이다.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해방과 전쟁, 산업화와 유신시대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살아간 시인의 삶은 그 자체 문학이자 역사다.
일기 ‘바람의 사상’은 이른바 순수문학을 지향했던 시인이 어떻게 역사의 풍랑에 휩싸이면서 현실에 대해 발언하는 문학가가 되어 가는지 정밀한 다큐멘터리처럼 기록하고 있다. 냉정한 사관(史官)의 서술인가 하면, 번뜩이는 시인의 아포리즘은 엄혹한 시대 한가운데서 시인이 행동하고 생각하고 느낀 것을 오히려 선연하게 증언한다.
김형수와의 대담집 ‘두 세기의 달빛’은 고은의 정신사적 격변이 어떻게 우리의 근현대사를 관통해왔는지를 선언하고 고백한다. 고은 사상의 원류와 성장, 그 도도한 흐름의 현 단계를 알아가게 된다. 전쟁이라는 폐허를 겪으면서 깊은 정신적 방황과 아픔을 통과한 젊은이가 어떻게 문학과 종교에서 그 구원의 빛을 발견하려고 사투했는지, 그러면서 일제 식민지 시대와 해방 전후사에 대해 성찰하는지 그의 고양된 시적 육성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바람의 사상’, 시인의 심장으로 유신을 증언하다
‘바람의 사상’은 유신시대의 한복판에서 치열하게 기록한 일기다. 이미 몇 해 전 ‘문학사상’ 등에 그 일부가 연재되면서 반향을 일으킨 바 있는데, 이번에 ‘불나비의 기록’으로 연재된 일기를 포함해 지금까지 여러 지면에 발표된 70년대 일기를 한 권으로 정리했다.
정확히 1973년 4월부터 77년 4월까지 4년간의 기록이며, 출가 중이던 1959년에 쓴 21일간의 단식일기를 권말에 수록했다.
‘바람의 사상’에는 뒷날 ‘만인보’를 쓸 수밖에 없을 만큼 숱한 인물군상과 시대상황이 세밀하고 흥미롭게 기록돼 있다. 한국 현대의 정신사, 문화사, 정치사에 기라성 같은 발자국을 남긴 사람들과의 만남과 대화의 풍경들이 드라마처럼 펼쳐지는 것을 보면, 시대의 시인 고은의 인간관계의 폭과 깊이에 주목하게 된다. 김병익, 김윤식, 박맹호, 김현, 백낙청, 이문구, 이병주, 박태순, 임헌영, 최인훈 등을 비롯해서 신문학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박목월, 서정주, 김동리 등에 걸쳐 이어지는 문단 인맥은 고은의 삶과 그 실천 자체가 이 나라 현대문학사, 정신사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또한 리영희, 한승헌, 임재경, 남재희 등에 이르면 그가 당대의 지식인 집단과 얼마나 깊고 다채로운 교우관계를 두루두루 맺으면서, 시를 쓰고 현실에 발언하며 살았는지가 실감나게 된다.
‘바람의 사상’에 수록된 그의 일기는 1973년에 시작해서 1977년으로 맺고 있다. 이는 박정희 유신체제가 폭력화되어가는 과정과 그대로 겹친다. 시인의 개인사는 정치사회사이기도 하다. 일기의 처음을 펼쳐들면 우리는 술 좋아하고 원고 쓰는 일에 쫓기고 그나마 받은 원고료를 또다시 술에 퍼붓다시피 하면서, 그의 표현대로라면 ‘폐허’처럼 살았던 고은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어느새 억압과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 자유를 위해 실천하고 투쟁하는 지식인으로 변모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1972년 10월에 유신헌법이 선포되고 그 이듬해 1973년이 되면 박정희 정권이라는 전대미문의 독재체제의 폭력이 진행된다. 문인들을 비롯한 무수한 지식인들과 학생들이 박해의 대상이 된다. 1975년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의 사형집행에 이르면 시대는 질식할 지경이 된다. 시인의 일기는 이러한 역사의 굽이굽이를 놓치지 않고 생생히 기록한다.
“총과 붓, 붓과 총의 충돌로 붓이 죽어가는 시대가 오는가?”라고 탄식하는 시인 고은은 당대의 현실에 대해 “나 같은 순수시인을 참여시인으로 만들 것인가. 이 군인의 시대, 이 육군의 시대야, 이 총검의 시대야, 이 탱크의 시대야, 이 색안경의 시대야”라고 직격탄을 날린다. 시인은 자신의 침묵이 천박하다고 자성하면서 현실에 대한 발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현실에 대해 준열하게 발언하는 시인으로 변해간다.
남산 중앙정보부의 협박과 정치권 실력자들의 회유 그리고 김대중과 박정희에 대한 시인의 생각들이 이 4년간의 일기에 촘촘하게 담겨 있다.
“1975년 올해는 내 문학 생활이 어려울 것이 틀림없다. 원고 받을 곳도 없을 것이다. 잡지사나 출판사도 압력을 받을 것이다. 서점도 압력을 받을 것이다. 그 어디서나 나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올해 나는 고문, 구속, 연금, 감시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노예의 연대기는 없다.”
오늘의 뿌리가 되고 있는 1970년대의 역사를 알고자 한다면, 당대의 시대적 풍경과 인간 그리고 정치사회적 사건의 연관관계를 파악하고자 한다면 이 책을 집어들 일이다. 1천 쪽이 넘는 분량이지만 단숨에 빠져들어 읽어나가게 되며, 기이하게도 일기가 아니라 애초부터 사건의 발단을 설정해놓고 전개해나가는 소설처럼 읽힌다. 시인 자신을 1950년대의 자식이라고 부르고, 또 ‘1950년대’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는 것을 떠올리면, 그의 일기가 역사에 대한 묘사가 충실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두 세기의 달빛’, 시인 고은의 문학적 원형을 부각시킨 ‘정신의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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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집 ‘두 세기의 달빛’은 고은 시인의 문학적 원형을 최초로 가장 선명하게 부각시킨 ‘정신의 자서전’이다. 대담은 시인이자 소설가인 김형수가 도왔다. 고은의 삶과 문학, 그가 마주한 역사와 문명을 육성으로 심도 있게 들려준다. 모국어를 잃은 한 식민지 소년이 해방을 맞고, 전쟁의 폐허 한 귀퉁이에서 마침내 시의 첫걸음을 숨차게 내딛게 되기까지, ‘고은 시의 원적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대적으로는 1930~1950년대 초까지의 삶을 담고 있다. 향후 진행될 대담의 분량을 감안하면 그의 문학 5분의 1에 해당한다.
벽촌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시인에게 고향은 농경시대의 유산을 간직한 친화의 공동체, 육친의 세계였다. 그러한 고향은 현대사의 질곡을 겪으면서 “폐허”로 변해갔다. 자신이 기대고 살아갈 고향, 또는 본향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절박감은 새로운 희망을 잉태하는 치열한 정신적 모험을 추동한다. 그에게 젊은 날의 현실 혐오, 고향 상실은 동일 궤적에 있었다. 그러나 고은은 이 과정을 통해 실종된 고향이 도리어 미래를 보여주는 지침인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우리의 기억에서 지워지거나 사라진 것들을 다시 길어 올리는 작업이다. 그리하여 이 책은 고은의 기억 속에 담겨져 있는 시대상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김형수 시인은 이 대담을 통해 고은 초기 작품세계에 대한 기존의 통념인 ‘관념적 허무주의’가 아니라 ‘초월적 실존주의’로서 고은을 재발견하게 됐다고 말한다. 고은 시인 자신도 “1950년대를 살아남은 회색의 청춘, 결핍의 청춘에게 허무란 실존적인 명예”였다고 회고한다. 이에 대해 대담자 김형수는 “뼈아프고 그토록 부조리한 세계의 실존을 견디는 형식이 폐허에 대한 지향이고 허무에 대한 집착이며 영점으로의 귀환이었던 것을, 또한 그 무거운 과거에 대한 전면적 항거와 반전의 혁명이 바로 ‘부활’이었다”라고 평한다.
시인이 시만을 쓰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대해서도 발언하고 사상의 중심을 세우기도 하며 미래를 전망하면서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다채로운 언어로 말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고은에게 이르면 우리는 그런 일이 충분히 가능한 존재를 만나게 된다.
‘바람의 사상’과 ‘두 세기의 달빛’에서 듣게 되는 고은의 육성은 그래서 우리에게 더욱 놀랍다. 시대가 앓고 있는 무거운 통증을 치유하기 위해서라도, 지금 고은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은 우리 시대의 한계를 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이다. 유신체제가 포악스러운 힘을 발휘하고 있던 1975년 3월 10일 그의 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시대는 넘을 수 없는 암벽이다. 넘을 수 없는 것을 넘어야 하는 것이 그 시대의 사명이다.”
바람의 사상 | 고은 지음 | 46판 | 1068쪽 | 2만7000원
두 세기의 달빛 | 고은∙김형수 대담 | 46판| 672쪽 | 2만3000원
[뉴스핌 Newspim] 김민정 기자 (mj72284@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