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국 자금조달 시급, 지원 압박수위 높아질듯
[뉴욕=뉴스핌 황숙혜 특파원] EU정상회의에서 영국을 제외한 26 국가가 9일(현지시간) 재정건전성을 강화하는 신재정협약을 체결하는 데 사실상 합의한 가운데 시장의 눈은 다시 유럽중앙은행(ECB)에 쏠리고 있다.
이번 신재정협약 합의가 부채위기의 궁극적인 돌파구 마련과 유로존 붕괴 리스크 해소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 시장 전문가의 의견이다. 경제적, 정치적 난제가 아직 산재하다는 것.
특히 눈앞에 닥친 부채 만기 상환을 위해 주변국 정부와 은행권의 자금 조달이 시급하며, ECB를 향한 지원 압박 수위가 한층 높아질 전망이다.
◆ ECB 입장 전환할까
ECB는 상한선 없는 국채 매입을 실시하고 있지만 시장은 보다 전폭적인 역할을 거듭 요구하고 있다.
사실 ECB는 은행권 지원에 과감하게 나서는 반면 국가 부채 문제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는 움직임이다. 마리오 드라기 총재는 중앙은행이 국가를 구제할 수는 없다고 거듭 강조한 데 이어 전날 국채 매입을 확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드라기 총재는 중앙은행의 근본적인 역할이 인플레이션 방지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미 연방준비제도(Fed)가 시행했던 형태의 양적완화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독일도 이에 대해 강력하게 반기를 들고 있다. 유로를 찍어내는 형태의 양적완화를 단행해 ECB의 본질이 훼손될 경우 보다 무질서한 상항이 펼쳐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독일이 이를 묵인한다 하더라도 문제가 없지 않다. 국채 매입으로 인해 ECB의 대차대조표가 크게 불어났기 때문이다. ECB의 레버리지가 이미 과도한 상태라는 것이 시장 전문가의 지적이다.
JP모간의 데이비그 맥키 유럽 이코노미스트는 “내년 초까지 유로존 주변국 정부와 은행이 자금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인 동시에 최대 과제”라고 말했다.
그는 “ECB는 은행에 대해서는 시장의 기대치를 웃도는 지원책을 내놓았지만 투자자들은 국가 부채에 대한 역할 확대를 거듭 요구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 유로존 운명 결국 ECB 손에
유로존 정부가 내년 만기 상환해야 하는 장단기 부채 규모는 1조1000억유로에 이른다. 내년 상반기 만기 도래하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독일의 부채만 5190억유로로 집계됐다. 씨티그룹에 따르면 내년 상반기 만기가 돌아오는 은행권 부채도 6650억유로에 달한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지만 이번 EU 정상회담에서 5000억유로 규모의 구제기금 한도액 상향 조정에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향후 수개월 동안 차환 발행해야 하는 채무액이 상당한 만큼 위기가 점차 고조되고 ECB는 보다 강력한 지원 압박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씨티그룹의 유겐 미셸 이코노미스트는 “내년 유로존이 깊은 경기 침체와 함께 자금 경색을 겪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 관리자협회(ID)의 그레이엄 리치 이코노미스트는 “결국 ECB가 전폭적인 소방수로 나서거나 유로존이 해체되는 등의 두 가지 시나리오 중 한 가지가 펼쳐질 것”이라고 말했다.
ECB가 국채를 대량 매입해 주변국 정부에 대출 은행 역할을 하지 않으면 유로존은 해체를 피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 신재정협약, 축포 터뜨리기 일러
EU 정상들이 마라톤 회의 끝에 23개국의 신재정통합안 합의를 이뤄냈지만 큰 기대를 걸기는 어렵다는 의견이 고개를 들었다.
이번 위기가 유로존의 해체로 귀결될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지적이다.
에볼루션증권의 엘리자베스 아세드 애널리스트는 “단기적으로 유로존에 모든 회원국이 잔류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보이지만 신재정협약의 요건에 결점이 있는 경우 중장기적으로 해체 리스크가 여전히 내재된 셈”이라고 말했다.
단순히 재정 기강을 강화하고 긴축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을 부양하는 데 중점을 둬야 한다는 얘기다.
스탠더드 라이프 인베스트먼트의 앤드류 밀리건 글로벌 전략 헤드는 “일개 국가가 유로존을 탈퇴하는 데 비용이 GDP의 15~25%에 이를 전망”이라며 “하지만 이 때문에 유로존 해체나 일부 회원국 이탈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유럽 정상들이 주변국의 자발적인 탈퇴를 유도하는 데 고시할 것이라는 얘기다.
하이 프리퀀시 이코노믹스의 칼 바인버그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지금까지 위기 돌파를 위해 유로존이 내놓은 비현실적이고 무모한 대책은 실행으로 옮기지 못하거나 자금조달이 제대로 되지 않는 등 여전히 무모한 상태로 남은 상황”이라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