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형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
환율 변수, 위기?
문제는 이러한 환율 조정이 특정한 방향성을 강하게 드러내면서 순조롭게 진행되기는 힘들어 보인다는 점이다. 앞에서도 지적했다시피, 각국 간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면서 환율전쟁과 같은 방식으로 위기 양상이 빚어질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다. 어쩌면 글로벌 금융위기의 ‘제 4막’이 환율위기라는 형태로 구현될 가능성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는 2008년 여름부터 대공황의 위협을 방불케 할 세계 경제위기로 진전되었다. 2009년 들어 위기의 긴박성이 완화되고, 기술적 반등이건 정책 효과건 간에 경기회복세가 가시화 되면서 위기는 소강 국면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이내 두바이월드의 파산위기를 계기로 이른바 소버린 리스크(sovereign risk: 국가채무위기)가 쟁점화 되면서 세계는 재정위기의 망령에 허덕여야 했다.
다행이랄까, 재정위기가 유로존의 시스템 취약성과 맞물려 유로 위기에 국한되는 양상을 보이면서 나머지 국가들은 재정위기의 직접적인 전염효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새로운 방식으로 위기의 가능성이 부각되고 있다. 세계 경기회복세가 주춤해지고, 위기의 배후에 자리 잡은 불균형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점차 국제 환율이 요동치고 있는 것이다.
환율은 거시변수다. 우리가 익히 경험해 보았지만, 하루에 환율이 10%나 변동하면서 국내 자산이나 부의 대외가치가 같은 폭으로 등락을 거듭하기도 한다. 이처럼 환율의 극심한 불안정성은 정상적인 대내외 경제활동이나 금융거래를 대폭 훼손하게 된다. 세계 경제의 위기 탈출이 이제 또 다시 심각한 복병에 직면한 것이다.
not 환율 밸류에이션, but 환율의 정치경제학
위기 이후 환율 조정의 필요성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집중적인 포화가 예상되는 통화는 달러화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진원지이자 글로벌 불균형의 온상이 바로 미국이기 때문이다. 그 짝은 중국이다. 달러화의 순조로운 조정을 저해해 온 것이 사실상의 고정환율제를 운영하고 있는 중국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날 환율 조정은 달러화 약세와 위안화 강세로 집약될 수 있다.
그러나 환율 조정은 단지 달러화 약세나 위안화 강세, 혹은 유로화와 엔화 강세 저지 등과 같은 밸류에이션 조정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환율 조정 혹은 글로벌 재조정의 배후에 자리 잡은 국제 정치경제학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사실 글로벌 불균형은 앞에서 지적했다시피, 각국 거시정책의 부조화는 물론 달러 기축통화체제로 인한 불균형의 자동적 조정 메커니즘의 결여에서 비롯된 문제다.
따라서 환율 조정은 단순한 환율 공조 차원을 넘어서 각국의 거시정책 조정, 그리고 달러화 기축통화체제의 재정비 등 국제통화․경제 질서 재건 등과 같은 글로벌 차원의 광범위한 의제들을 내포한다. 사실 G7을 대신해 세계 경제의 새로운 거버넌스(governance: 지배구조)로 각광 받고 있는 G20이 풀어야 할 문제들이 바로 이런 것이다. 오는 11월 서울에서 열릴 G20 정상회의에 촉각이 집중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최근 환율전쟁이 공론화 되면서 G20에서 환율 문제가 논의될 것인지 여부를 두고 말이 많다. 물론 단순한 밸류에이션 문제라면 굳이 이 자리에서 논의될 필요는 크지 않을 것이다. 1985년 달러화 약세를 이끌어 낸 플라자 합의가 재현되기에는 참여자도 너무 많고, 이해관계도 너무 얽혀 있다. 또 쇠퇴하고 있는 미국 헤게모니를 대신할 글로벌 거버넌스도 아직 모호하다. 하지만 기축통화 재편이나 글로벌 거버넌스의 재구축 등을 포함한 환율의 국제 정치경제학이 문제라면 달리 어디서 이 문제를 풀 수 있을까?
미국의 소버린 리스크와 달러화 급락 위험
실제로 내년 G20 의장국이 될 프랑스는 중국과 협력하여 국제환율체제 개편 문제를 주요 의제로 삼을 계획으로 알려진다. 아마도 환율의 정치경제학은 내년에도 글로벌 경제의 주요 화두로 작용할 전망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각자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면서 상당한 난항이 불가피해 보인다. G20의 거버넌스는 지속적으로 시험받을 수밖에 없다.
좌우간 2011년은 국제 경제․통화질서 재편 과정에서 하나의 이정표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최근 환율전쟁 우려를 포함해 국제 외환시장의 변동성 심화는 그 전주곡으로 판단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소버린 리스크가 미국으로 전염될지 여부다.
그동안 미국은 막대한 재정적자와 사상 최대의 중앙은행 대차대조표 등의 부담에도 불구하고, 달러의 국제기축통화 지위로 인해 소버린 리스크에 강한 면역력을 보여 왔다. 오히려 미국의 국채시장은 안전선호 심리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엄청난 수혜를 누려 왔다. 게다가 소버린 리스크가 은행권 불안으로 전염될 때에도 미국 금융권은 각종 트레이딩 수익에 힘입어 상대적으로 양호한 실적을 기반으로 아량곳 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3/4분기 실적 시즌을 맞이해 이러한 미국 금융권의 의연한 태도가 지속될 수 있을지 의구심이 크다. 이미 지난 2/4분기 실적 시즌에서 골드만삭스의 참패가 한 가지 신호다. 그리고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미국 내에서 정쟁도 첨예화 될 전망이다. 집권 민주당 내에서 보호주의 여론이 점차 확산되는 한편으로, 공화당은 중간선거를 기회로 삼아 차기 대선 승리를 위해 오바마 휘하의 미국 경제와 국제 질서 재건 움직임에 맹공을 퍼붓고 있다.
과연 이런 홍역을 치룬 미국이 계속해서 소버린 리스크에 대한 면역력을 자신할 수 있을까? 아마도 미국은 신뢰도 위기로 인한 달러화 급락의 위험을 방어하는데 허덕일 공산이 크다. 그리고 그 부작용은 미국의 국채 버블 붕괴로 반영될지 모를 일이다.
새로운 파워, 중국의 ‘글로벌 안전판’ 역할 주목
달러화 급락 위험으로 집약되는 환율위기, 혹은 글로벌 재조정과 국제질서 재편의 일환으로서 환율조정은 쉽게 해소될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또 그 과정은 위기 이후 정치적 레버리지의 확대와 맞물려 환율전쟁이나 무역분쟁 등과 같은 보호주의로의 경사 위험을 안고 있다. 나아가 신흥국에서는 보호주의의 ‘자본판’이라고 할 자본통제의 위험도 크다. 물론 이것이 최근 회자되는 거시건전성 규제의 ‘신흥국판’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그 차이는 분명치 않다.
결국 세계경제의 행로와 관련해 다양한 국제 정치경제학적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새로운 안전판이 부상하고 있는 데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중국이 핵심이다. 중국은 지난 6월 전격적인 위안화 절상을 통해 “세계의 공장”을 넘어서 “세계의 시장”으로서 글로벌 소비구조 개편에 적극적인 의지를 보인 바 있다. 버블 붕괴 이후 경제 회복이 여의치 않은 미국을 대신해 “세계의 최종 소비자”로서 자리매김 하고 있는 것이다. 그 과정이 즉각적이기보다는 중장기적인 시간이 걸릴 문제이고, 중간 중간 난항이 산적해 있음은 분명하지만, 중요한 것은 변화의 모멘텀이다. 게다가 최근 우리나라의 對中 수출 호조에서 입증되듯이, 이미 중국을 최종시장으로 삼은 아시아 역내의 분업구조 개편은 세계경제의 미래와 관련해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또 하나는 역시 최근 국내 채권시장에서 관심을 끌고 있는, ‘차이나 머니’의 위력이다. 유로 위기가 한창일 때 중국이 외환보유액 중 유로화 자산을 매각할 것이라는 루머가 나돌면서 유로화가 폭락한 바 있다. 하지만 이내 중국은 이런 루머를 부인하고, 나아가 스페인 국채 입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유로 위기를 완화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는 모습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그리스 국채 매수도 적극적으로 늘릴 계획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유럽이 필요로 하는 유동성의 공급원으로서 중국이 부각되는 대목이다.
사실 그동안 미국이 누려 온 글로벌 헤게모니의 한 가지 핵심적인 기능은 “세계의 최종 대부자”, 즉 위기 시에 필요한 유동성을 공급하는 역할이다. 금융위기 중에 미국이 다시 주목을 끈 것도 바로 연준의 통화스왑이었다. 하지만 이미 막대한 대차대조표로 인한 부담이 큰 미국이 계속해서 세계의 최종 대부자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 공백을 중국이 메워주고 있는 셈이다. 지금 한국을 비롯해 일본 등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는 차이나 머니의 위력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이처럼 미국의 신뢰도 위기와 글로벌 안전판으로서 중국의 부상으로 압축될 수 있는 2011년의 세계경제 환경은 환율 조정을 매개로 다시 많은 도전과 불확실성을 제기하고 있다. 그리고 아마도 글로벌 금융위기는 환율위기라는 방식으로 새롭게 진화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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