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의 상흔에서 20대 직기로 시작
- 형제경영으로 '글로벌 SK' 기초닦아
[뉴스핌=문형민 기자] SK그룹을 창업한 고(故) 최종건 회장이 타계한지 15일로 35주기를 맞는다.
SK그룹은 오는 14일 서울 광장동 워커힐호텔에서 전직 국무위원과 재계 원로를 비롯, 학계 법조계 언론계 등 각계 인사와 SK 관계사 경영진, 유족 등 7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식을 가질 예정이라고 13일 밝혔다.
추모위원장을 맡은 김용래 전 총무처장관은 미리 공개한 추모사를 통해 "패기와 도전의 기업가 정신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고인의 창조적 열정이야말로 최근 국내외 경제침체 위기를 헤쳐나갈 기업가적 도전 정신의 전범"이라며 "국가의 대계를 걱정하셨던 그 분의 선각자적 지혜와 열정이 그립다"고 말했다.
또 고인의 차남인 최신원 SKC 회장은 가족대표 인사말을 통해 "선친께서 보여주신 일과 사람에 대한 열정을 이어받아 '글로벌 SK'로 비상하기 위해 전 임직원과 함께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와 각오를 밝힐 예정이다.
추모식에는 고인과 가까웠던 남덕우 전 총리, 이승윤 전 부총리, 김상하 삼양그룹 회장, 송병락 서울대 명예교수 등이 참석하고, 최신원 SKC 회장과 막내 아들 최창원 SK케미칼 부회장, 조카인 최태원 SK그룹 회장 등도 함께 자리할 계획이다.
◆ 전쟁의 상흔에서 SK그룹 태동
고 최종건 회장은 1926년 경기도 수원시 평동에서 부친 최학배씨와 모친 이동대씨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성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한 1944년 18살 어린 나이에 일본인이 경영하던 선경직물 수원공장 견습기사로 입사하면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성실한 자세와 리더십을 인정받아 입사 2년이 채 안돼 생산부장까지 초고속 승진을 했으나, 1949년 사표를 낸 뒤 개인 사업가의 꿈을 키우던 중 6·25 전쟁을 맞았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최종건 신화'는 피난길에서 고향 수원으로 돌아와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선경직물 공장을 목도한 1953년 3월 시작됐다.
최 회장은 선경직물을 인수해 전쟁의 상흔으로 고통받던 고향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되찾아 주겠다는 신념으로 혈혈단신 공장 재건작업에 뛰어들었다.
소식을 듣고 하나 둘 합세한 옛 동료 직원들과 함께 폐허 속 직기 부품들을 주워 정비하는 한편, 5km 떨어진 광교천에서 마차로 돌과 자갈을 날라 공장건물을 다시 세웠다. 그리고 4개월 뒤 20대의 직기를 재조립하여 공장을 다시 돌리는데 성공했다.
그 사이 정부 귀속재산이던 선경직물을 인수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 자금을 마련한 최 회장은 1953년 10월 1일 회사를 정식 인수하고 선경직물 창립을 선포했다.
맨주먹의 패기와 정열 하나로 자신이 견습사원으로 몸담던 직물회사의 주인이 되는 순간이자, SK그룹의 태동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 "위기를 기회삼아 직물 수출시대 열다"
최 회장은 창업 후 특유의 불도저 같은 추진력과 결단력으로 단기간에 선경직물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전쟁 후 직물업계의 생산과잉 등으로 녹록치 않던 경영환경을 제품 차별화로 정면 돌파하기로 하고 '품질 제일주의'를 사시로 내걸었다.
최 회장의 품질 제일주의는 1955년 '닭표 안감'과 '봉황새 이불감'이 잇따라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그 진가를 인정받았다.
최 회장은 1950년대 말 대일통상 중단 및 태풍 사라호 피해 등으로 직물업계에 사상 유례없는 불황이 닥쳤음에도 과감한 시설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1958년부터 국내 최초로 합성직물인 나일론, 데도론 등을 생산하는데 성공, 직물업계를 평정해 나갔다.
그러나 1960년대 초 4·19혁명과 5·16 군사쿠데타로 국가경제가 큰 혼란에 빠지면서 선경직물도 자금경색 등 큰 위기에 봉착했다.
최 회장은 다시 한번 일대 승부수를 던졌다. 위기 탈출의 돌파구를 정부의 '수출 드라이브'에 동참, 국내 직물업계 최초로 해외수출에 나섰다.
선경직물은 1962년 4월 홍콩에 닭표 인조견 10만마(1만3000달러)를 첫 수출, 우리나라를 '직물 수출국' 반열에 올려놓았다. 1962년 첫 해에만 4만6000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렸다.
정부는 1963년 8월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최초의 직물 수출을 이뤄낸 공로 등으로 최 회장에게 금탑산업훈장을 수여했다. 이후 선경직물은 1970년대 최대 수출품목으로 떠오른 섬유산업을 주도하며 한국 경제가 본격적인 수출시대를 여는데 견인차 구실을 했다.
◆ "공격 경영으로 일등 기업을 만들다"
최 회장의 도전 정신과 추진력은 아세테이트 원사공장과 폴리에스테르 원사공장 건설을 성사시키는 과정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1960년대 초 원사파동으로 회사 경영에 큰 어려움을 겪은 최 회장은 안정적인 원사 확보를 위해 원사공장을 직접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막대한 재원과 기술 확보 문제 등으로 회사 내부에서조차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다. 최 회장은 특유의 추진력으로 일본 상업차관 및 기술 도입, 정부로부터의 외자 대부 등을 차례로 성사시켰다.
1968년 12월과 1969년 2월 아세테이트 공장과 폴리에스터 공장이 차례로 완공됐고, 이로 인해 선경은 국내 총 원사 생산규모의 26%를 담당하게 됐다.
특히, 선경은 국내 최초로 폴리에스터 원사와 아세테이트 인견사를 동시에 생산하여 국내 원사 메이커의 1인자로 도약하게 됐다.
당시 선경직물이 석유정제를 통해 생산하는 원사 사업에 진출한 것은 향후 SK그룹이 석유사업에 진출하는 토대가 됐다. 또한, SK그룹이 석유사업과 정보통신 사업을 양축으로 매출 80조, 재계 3위의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시발점 구실을 했다.
◆ "형제 경영으로 글로벌 SK의 초석을 다지다"
SK그룹이 오늘날 글로벌 기업으로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해온 원동력 가운데 하나로 대주주 경영인들의 화합과 책임경영 체제를 꼽는 전문가들이 많다. 그 뿌리는 최종건 창업회장과 동생 최종현 회장이 처음 꽃피운 '형제 경영' 체제에서 찾을 수 있다.
최종건 회장은 1962년 10월 미국 시카고대학 유학 중 부친의 갑작스런 타계로 귀국한 동생 최종현을 부사장에 임명해 경영에 참여시켰다.
당시 선경직물은 정국혼란과 금융위기의 여파로 창업 이래 가장 심각한 경영난을 겪고 있었다. 최 회장은 창업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온 선경직물에 질적인 변화가 필요한 시기라고 판단했다.
최종현의 경영 참여로 최종건 회장의 패기에 최종현 회장의 지성이 더해지면서 SK그룹의 질적인 도약이 시작됐다.
이후 최종현 회장은 우선 정부의 인견사 공매불을 매입해 확보한 원사를 직물로 생산 판매함으로써 자금사정을 호전시켰고, 선경직물의 생산체제를 내수 중심에서 수출 위주로 전환시켰다.
또한, 1966년 1월 선경직물을 원사 메이커로 도약시킨다는 내용 등을 담은 '선경 5개년 사업계획'을 토대로 형과 함께 원사공장 설립을 성공시켜 SK그룹 100년의 기반을 다졌다.
최종현 회장은 형 타계 후 신문에 기고한 '형제'라는 칼럼에서 "형님이 살아 계실 때 이상으로 잘해서 주위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 형님의 유훈이라고 믿고 있다"며 형에 대한 존경과 사업 의지를 피력한 바 있다.
최종현 회장은 원사사업 진출로 초석을 놓은 석유사업 진출을 성공시켜 수직계열화를 완성한 것은 물론, 정보통신 사업 진출 등을 통해 '글로벌 SK'의 기반을 굳건히 하는 것으로 형의 기대에 부응했다.
- 형제경영으로 '글로벌 SK' 기초닦아
[뉴스핌=문형민 기자] SK그룹을 창업한 고(故) 최종건 회장이 타계한지 15일로 35주기를 맞는다.
SK그룹은 오는 14일 서울 광장동 워커힐호텔에서 전직 국무위원과 재계 원로를 비롯, 학계 법조계 언론계 등 각계 인사와 SK 관계사 경영진, 유족 등 7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식을 가질 예정이라고 13일 밝혔다.
추모위원장을 맡은 김용래 전 총무처장관은 미리 공개한 추모사를 통해 "패기와 도전의 기업가 정신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고인의 창조적 열정이야말로 최근 국내외 경제침체 위기를 헤쳐나갈 기업가적 도전 정신의 전범"이라며 "국가의 대계를 걱정하셨던 그 분의 선각자적 지혜와 열정이 그립다"고 말했다.
또 고인의 차남인 최신원 SKC 회장은 가족대표 인사말을 통해 "선친께서 보여주신 일과 사람에 대한 열정을 이어받아 '글로벌 SK'로 비상하기 위해 전 임직원과 함께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와 각오를 밝힐 예정이다.
추모식에는 고인과 가까웠던 남덕우 전 총리, 이승윤 전 부총리, 김상하 삼양그룹 회장, 송병락 서울대 명예교수 등이 참석하고, 최신원 SKC 회장과 막내 아들 최창원 SK케미칼 부회장, 조카인 최태원 SK그룹 회장 등도 함께 자리할 계획이다.
◆ 전쟁의 상흔에서 SK그룹 태동
고 최종건 회장은 1926년 경기도 수원시 평동에서 부친 최학배씨와 모친 이동대씨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성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한 1944년 18살 어린 나이에 일본인이 경영하던 선경직물 수원공장 견습기사로 입사하면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성실한 자세와 리더십을 인정받아 입사 2년이 채 안돼 생산부장까지 초고속 승진을 했으나, 1949년 사표를 낸 뒤 개인 사업가의 꿈을 키우던 중 6·25 전쟁을 맞았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최종건 신화'는 피난길에서 고향 수원으로 돌아와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선경직물 공장을 목도한 1953년 3월 시작됐다.
최 회장은 선경직물을 인수해 전쟁의 상흔으로 고통받던 고향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되찾아 주겠다는 신념으로 혈혈단신 공장 재건작업에 뛰어들었다.
소식을 듣고 하나 둘 합세한 옛 동료 직원들과 함께 폐허 속 직기 부품들을 주워 정비하는 한편, 5km 떨어진 광교천에서 마차로 돌과 자갈을 날라 공장건물을 다시 세웠다. 그리고 4개월 뒤 20대의 직기를 재조립하여 공장을 다시 돌리는데 성공했다.
그 사이 정부 귀속재산이던 선경직물을 인수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 자금을 마련한 최 회장은 1953년 10월 1일 회사를 정식 인수하고 선경직물 창립을 선포했다.
맨주먹의 패기와 정열 하나로 자신이 견습사원으로 몸담던 직물회사의 주인이 되는 순간이자, SK그룹의 태동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 "위기를 기회삼아 직물 수출시대 열다"
최 회장은 창업 후 특유의 불도저 같은 추진력과 결단력으로 단기간에 선경직물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전쟁 후 직물업계의 생산과잉 등으로 녹록치 않던 경영환경을 제품 차별화로 정면 돌파하기로 하고 '품질 제일주의'를 사시로 내걸었다.
최 회장의 품질 제일주의는 1955년 '닭표 안감'과 '봉황새 이불감'이 잇따라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그 진가를 인정받았다.
최 회장은 1950년대 말 대일통상 중단 및 태풍 사라호 피해 등으로 직물업계에 사상 유례없는 불황이 닥쳤음에도 과감한 시설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1958년부터 국내 최초로 합성직물인 나일론, 데도론 등을 생산하는데 성공, 직물업계를 평정해 나갔다.
그러나 1960년대 초 4·19혁명과 5·16 군사쿠데타로 국가경제가 큰 혼란에 빠지면서 선경직물도 자금경색 등 큰 위기에 봉착했다.
최 회장은 다시 한번 일대 승부수를 던졌다. 위기 탈출의 돌파구를 정부의 '수출 드라이브'에 동참, 국내 직물업계 최초로 해외수출에 나섰다.
선경직물은 1962년 4월 홍콩에 닭표 인조견 10만마(1만3000달러)를 첫 수출, 우리나라를 '직물 수출국' 반열에 올려놓았다. 1962년 첫 해에만 4만6000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렸다.
정부는 1963년 8월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최초의 직물 수출을 이뤄낸 공로 등으로 최 회장에게 금탑산업훈장을 수여했다. 이후 선경직물은 1970년대 최대 수출품목으로 떠오른 섬유산업을 주도하며 한국 경제가 본격적인 수출시대를 여는데 견인차 구실을 했다.
◆ "공격 경영으로 일등 기업을 만들다"
최 회장의 도전 정신과 추진력은 아세테이트 원사공장과 폴리에스테르 원사공장 건설을 성사시키는 과정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1960년대 초 원사파동으로 회사 경영에 큰 어려움을 겪은 최 회장은 안정적인 원사 확보를 위해 원사공장을 직접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막대한 재원과 기술 확보 문제 등으로 회사 내부에서조차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다. 최 회장은 특유의 추진력으로 일본 상업차관 및 기술 도입, 정부로부터의 외자 대부 등을 차례로 성사시켰다.
1968년 12월과 1969년 2월 아세테이트 공장과 폴리에스터 공장이 차례로 완공됐고, 이로 인해 선경은 국내 총 원사 생산규모의 26%를 담당하게 됐다.
특히, 선경은 국내 최초로 폴리에스터 원사와 아세테이트 인견사를 동시에 생산하여 국내 원사 메이커의 1인자로 도약하게 됐다.
당시 선경직물이 석유정제를 통해 생산하는 원사 사업에 진출한 것은 향후 SK그룹이 석유사업에 진출하는 토대가 됐다. 또한, SK그룹이 석유사업과 정보통신 사업을 양축으로 매출 80조, 재계 3위의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시발점 구실을 했다.
◆ "형제 경영으로 글로벌 SK의 초석을 다지다"
SK그룹이 오늘날 글로벌 기업으로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해온 원동력 가운데 하나로 대주주 경영인들의 화합과 책임경영 체제를 꼽는 전문가들이 많다. 그 뿌리는 최종건 창업회장과 동생 최종현 회장이 처음 꽃피운 '형제 경영' 체제에서 찾을 수 있다.
최종건 회장은 1962년 10월 미국 시카고대학 유학 중 부친의 갑작스런 타계로 귀국한 동생 최종현을 부사장에 임명해 경영에 참여시켰다.
당시 선경직물은 정국혼란과 금융위기의 여파로 창업 이래 가장 심각한 경영난을 겪고 있었다. 최 회장은 창업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온 선경직물에 질적인 변화가 필요한 시기라고 판단했다.
최종현의 경영 참여로 최종건 회장의 패기에 최종현 회장의 지성이 더해지면서 SK그룹의 질적인 도약이 시작됐다.
이후 최종현 회장은 우선 정부의 인견사 공매불을 매입해 확보한 원사를 직물로 생산 판매함으로써 자금사정을 호전시켰고, 선경직물의 생산체제를 내수 중심에서 수출 위주로 전환시켰다.
또한, 1966년 1월 선경직물을 원사 메이커로 도약시킨다는 내용 등을 담은 '선경 5개년 사업계획'을 토대로 형과 함께 원사공장 설립을 성공시켜 SK그룹 100년의 기반을 다졌다.
최종현 회장은 형 타계 후 신문에 기고한 '형제'라는 칼럼에서 "형님이 살아 계실 때 이상으로 잘해서 주위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 형님의 유훈이라고 믿고 있다"며 형에 대한 존경과 사업 의지를 피력한 바 있다.
최종현 회장은 원사사업 진출로 초석을 놓은 석유사업 진출을 성공시켜 수직계열화를 완성한 것은 물론, 정보통신 사업 진출 등을 통해 '글로벌 SK'의 기반을 굳건히 하는 것으로 형의 기대에 부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