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아는 척 마라. 팔십 년 살아도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다."
충청도 완곡 어법의 재미와 묘미를 200% 담아낸 소설들
'힙'한 사투리의 매력, '김종광'이라는 대체 불가능한 장르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작고한 이문구가 충청도 사투리를 탁월하게 구사한 원조 작가였다면 그 맥을 잇는 작가가 김종광이다. 입에 착착 감기는 충청도 사투리와 뻔하지 않은 입담으로 한국 소설의 한 축을 지탱해온 김종광 작가가 새로운 소설집을 출간했다. 코로나19 무렵부터 발표한 아홉 편의 소설이 수록된 '안녕의 발견'은 충청도 안녕시에서 좌충우돌하면서 어깨 기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김종광의 신작 소설집 '안녕의 발견' 표지. [사진 = 마디북 제공] 2024.05.13 oks34@newspim.com |
50대 청년회장이 10년 넘게 막내 노릇을 하고, 60대 이장이 물려줄 사람을 찾지 못해 의도치 않게 독재 권력을 누리는 안녕시의 한 마을. 욕쟁이 할머니들끼리 기 싸움을 벌이고, 주정뱅이 망나니와 양아치 때문에 동네가 쑥대밭 되고, 여의도 못지않게 치열한 정쟁이 펼쳐지는 그런 곳에서 작가는 '진짜 시골'의 모습을 담아낸다. 충청도 안녕시는 어지간한 도시보다도 더 박진감 넘치는 '힙'한 공간으로서 김종광 소설의 세계관으로 자리한다.
"여보게들, 황진이가 백 번 쓰다 버린 개짐 같은 년이 왔네. 암소집에 웬 똥물에 튀긴 꽈배기 같은 년이 들어앉았어."
김종광 소설 속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강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만렙 욕쟁이 할머니부터 주정뱅이 망나니에 보이스피싱 범죄단까지, 더이상 연예인이 웃고 떠들며 힐링하고 먹방하는 시골은 없다. '자연인' 운운하는 공기 좋고, 물 좋고, 조용한 자연 속 공간에서 매일 같이 아침을 맞는 시골을 연상하면 오산이다. 김종광은 그런 도시인의 환상을 산산이 깨부순다. 벌써 7권의 소설집과 10권이 넘는 장편소설을 펴내면서 농촌소설가로 자리잡았다.
김종광 소설의 세계관이 구현되는 곳은 충청도에 위치한 작은 동네 '안녕시'이다. 한때 광산업의 열풍을 타고 수많은 외지인이 몰렸던 안녕시는, 현재 정부에서 지원하는 농사직불금과 화력발전소 일자리에 의존해 겨우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렇게 젊은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나고, 그 빈자리를 늙어서도 늙을 수 없는 노인과 외국인들로 채운 안녕시는 늘 시끄럽다. 시끄러워도 보통 시끄러운 게 아니다.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소설가 김종광. [사진 = 마디북 제공] 2024.05.13 oks34@newspim.com |
육탄전을 서슴지 않는 욕쟁이 할머니는 기본이다. 다문화가정의 자녀들이 학교에서 다수가 된 지는 오래고, 그 조그만 동네에서도 머시기 당과 보시기 당으로 나뉘어 서로 못 잡아먹는 건 예삿일이다. 거기에 도시에서 배운 젊은것들이 들어와 뿌리 깊은 유교 관습을 뒤흔든다.그 와중에 작가는 말한다. 늙었지만 도시보다 다이나믹하고, 느리지만 그만큼 오래 물고 늘어지는 게 진짜 시골이라고.
충청도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다. 상대가 말의 의중을 알아채면 다행이고, 못 알아들으면 그런대로 무시하면 된다. 그래서 김종광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하나 같이 겉과 속이 다르다. 이문구 작가의 소설 '암소'의 후일담 격인 '암소가 술 마신 집'에는 주인집에서 머슴살이를 하고 세경을 떼였던 박선출과 그의 부인 신실 이야기가 나온다. 훗날 신실은 남편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와 옛 주인집을 매입하게 되는데, 귀향하자마자부터 욕쟁이 동네 할머니와 각을 세우며 온갖 비속어를 내뱉는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동네 대소사를 모두 챙기며 결국 안녕시민의 일부가 되는데, 이는 '말'이라는 껍데기보다 그 안에 담긴 '진심'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시골 권력 지도와 행정 집행의 진수를 보여주는 '알아야 면장을 하지'는 첨예한 갈등 앞에서도 결코 격식을 잃지 않는 안녕시 어른들의 면모를 보여준다. 듣기 싫은 상대방의 의견엔 점잖게 "멧돼지 고라니 운우지정 나누는 소리"라며 무시하고, 그 치열하던 정쟁도 밥때가 되면 칼같이 그만두는 대화합의 면모를 보인다. '토론 배우는 시간', '뭐라도 배우는 시간' 역시 충청도 사투리의 '힙'함을 잘 드러내는 소설이다. 피 터지게 싸우는 와중에도 해학과 유머를 포기할 수 없는 원조 충청도인들의 본능이 여기저기 묻어 나는 소설집, '안녕의 발견'이다.
긴 시간 동안 꾸준한 집필로 김종광은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질은 더욱 강화되었고, 사투리는 더욱 맛깔스럽게 진화했다. 시쳇말로 '힙'하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가진 우리네 감수성이 젊은 사람들 사이에 가장 핫한 MZ템으로 변화했듯, 아이러니하게도 현실 그대로의 시골을 긴 시간 끈질기게 직시한 김종광의 소설에서 우리는 새로운 '힙'함을 느끼게 된다. 마디북. 값 17000원. oks34@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