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파에 북한의 침묵 길어져
한국 내 北 우호세력 당혹감
나비의 날개짓이 태풍 될 수도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한국과 쿠바가 지난달 14일 뉴욕 유엔대표부에서 외교공한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은 지 한 달이 가까이 흘렀다.
철저한 보안 속에 추진됐고 국무회의 의결조차 직전에야 전자결재 시스템이 아닌 인쇄물로 돌렸을 정도였으니 말 그대로 '전격'이라 할 수 있다.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한・쿠바 수교는 국제 외교가에 깜짝뉴스였고, 193번째 수교국 명단에 쿠바를 올림으로써 한국은 사회주의권 외교의 마지막 퍼즐을 맞추게 됐다.
이 소식에 가장 아연실색했을 사람은 평양의 김정은일 것이다.
할아버지 김일성과 아버지 김정일이 대를 이어 피델 카스트로와 인연을 이어가며 '사회주의 형제국'을 자처했지만 결국 때가 오고야 말았다.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지난 2018년 국가평의회 의장이던 미겔 디아스카넬 쿠바 대통령의 방북 때 직접 순안공항에 부부동반으로 나가 영접행사를 했을 정도로 대(對) 쿠바 관계에 공을 들였던터라 낙담은 더 클 게 분명하다.
노동신문은 당시 디아스카넬의 평양 방문과 정상회담을 계기로 북한과 쿠바 관계가 영원할 것이라는 글까지 올리면서 분위기를 띄웠지만 서울을 향해 달려가는 걸 막지 못했다.
한-쿠바 수교의 충격파가 얼마나 엄청났을지는 평양 당국이 한 달 가까이 일언반구 하지 않고, 노동신문 등 관영 선전매체들이 '쿠바'라는 단어를 아예 올리지 않고 있는데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김정은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충격적이고 암울한 상황을 맞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오매불망 평양 걱정에 노심초사하며 감싸기에 급급해온 친북・종북 성향의 그룹이나 세력권에 속한 인사들이다.
김정은의 핵과 미사일 도발과 이로 인한 대북 제재로 가뜩이나 국제사회에서 입지가 좁아진 북한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도 불구하고 푸틴의 편에 서면서 사실상 외교적 파탄 상황을 맞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정은이 쿠바로부터 뒤통수를 맞는 국면으로까지 치달으면서 이제 김정은 체제는 점점 벼랑 끝으로 몰리는 형국이다.
사실 한・쿠바 수교라는 단일 사안만으로 북한 체제가 받는 충격파는 제한적일 수 있다는 견해도 일각에서 제기된다.
한국이 중국・소련과 수교하고 동구권과 외교관계를 넓혀가는 상황을 현실로 목도하며 학습 효과를 맛본데다 지난 2015년 미국과 쿠바의 외교관계 수립이란 엄청난 사태도 겪은 때문이다.
하지만 김정은이 연초부터 남북관계를 '국가 대 국가'로 가져가겠다면서 '대적'(對敵) 운운하는 망언을 연일 쏟아내던 차에 불거진 한-쿠바 수교는 파장이 만만치 않을 수 있다.
무엇보다 북한의 대남전략과 통일전선전술에 조응하던 모습을 보이던 단체의 모체라 할 조선노동당 산하의 대남기구나 조직이 모두 철폐됐다.
김정은이 '삼천리금수강산'이나 '8000만 겨레' 같은 말을 쓰지 말라고 하고, 아예 '통일'이란 단어조차 입에 올리지 못하게 한 상황 속에서 한국 내 친북・종북 세력은 하루아침에 길을 잃은 셈이 됐다.
북한이 생뚱맞게 '남조선'을 지우고 정식국호인 대한민국을 쓰겠다고 나서 김정은 연설에도, 군부의 대남비난에도, 노동신문 글에도 '대한민국'이 연호되고 있으니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쯤되면 세상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단박에 눈치를 챌 수 있을텐데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한 듯하다.
어쩌면 적어도 30년 이상 평양을 향한 일방적인 구애를 해왔을 터이니 쉽게 자신이 용도폐기 됐다는 걸 인정하기 싫을 수도 있다.
대법원의 이적단체 판결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버텨오던 그들은 김정은의 대남단체 해체 지시에 어리둥절해 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자진해서 간판을 내렸다.
하지만 여전히 이런저런 이름의 단체를 만들어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 합동 군사연습 반대 등의 활동을 벌이겠다며 존재감을 과시하려 들고 있다.
피 끓는 청년시절 군사독재나 권위주의 정부에 실망한 나머지 '주체'나 '자주' 등의 이름을 내건 북한의 달콤한 유혹에 빠지는 실수를 잠시 저지를 수 있다.
하지만 불혹의 나이를 넘어 50~60대까지 그 섬망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자신들이 청춘시절 그토록 분노했던 독재와 권위주의, 인권 탑압과 고문・학살의 끝판왕이 지금 평양에서 펼쳐지고 있으니 말이다.
혹여 한미와 서방측의 모략이라거나 근거 없는 주장이라 항변한다면, 김일성과 김정일・김정은이 이은 평양 정권의 4대 세습 징후를 눈여겨보길 권한다.
10살 나이의 어린 딸에게 후계자 지위를 주려는 듯 이런저런 애드벌룬을 띄우고, 고위 장성과 노동당 노간부들이 그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해괴한 상황을 말이다.
이 모든 게 은밀하게 회자되는 게 아니라 관영 TV를 통해 영상으로 버젓이 드러나고 있으니 더 이상의 사족이 필요 없어 보인다.
젊은 시절 최고의 영민함과 지적 능력으로 노동신문과 평양방송의 행간 의미를 파악해내는 능력을 키웠을 그들은 어쩌면 김정은의 허장성세와 연출된 웃음 뒤에 가려진 모습을 간파하고 있을지 모른다.
다만 뒤늦은 커밍아웃에 나설 용기가 없거나 '배운게 도둑질'인 형국이니 다른 방도를 찾지 못할 수 있다.
한・쿠바 수교라는 나비의 날개짓이 가져올 메가톤급 태풍은 점점 소용돌이를 키우고 있는데도 말이다.
yjlee@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