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 화랑 페로탕서울서 'Forme d'esprit'전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샛길' 걷는 예리한 작업
특유의 설치적 회화, 전세계 곳곳에 영구소장
[서울 뉴스핌] 이영란 편집위원 = 국내외 수많은 미술가들이 설치와 영상, 오브제와 개념미술로 방향을 튼지 오래다. 최근엔 인공지능(AI)과 NFT를 활용한 첨단 디지털아트도 요란하다. 그럼에도 클래식한 미술장르인 회화의 유용성을 믿고, 끈질기게 회화작업을 이어가는 작가가 있다. 뉴욕을 무대로 활동 중인 이상남(Sang Nam Lee) 작가다.
[서울 뉴스핌]이영란 기자=이상남(Sang Nam Lee), Forme d'esprit (H29), 2022. Acrylic on panel 182.9x152.4x4cm Photo:CJY studio.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2024.03.04. art29@newspim.com |
이상남은 '회화 무용론 시대'에 오히려 끈질기게 회화를 붙들고 있다. 그는 "회화로 모든 걸 다 할 수 있다"고 믿는다. "회화는 모든 걸 포용할 수 있다"는 이상남은 사람들이 회화작업을 끝까지, 아니 절벽 아래로까지 밀어붙이지 않기 때문에 회화 무용론이 나온다고 말한다.
이상남이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의 다국적 화랑인 페로탕 서울에서 'Forme d'esprit'(마음의 형태)라는 타이틀로 개인전을 열고 있다. 페로탕(Perrotin)갤러리는 파리·뉴욕·홍콩·도쿄 등 세계 7개 도시에 지점을 둔 프랑스계 글로벌 화랑이다. 해외 메가갤러리 중 가장 먼저 서울에 지점을 낸 페로탕은 그간 정창섭·박서보·김종학·이배 등 기라성같은 한국 작가를 국제 무대에 소개해왔다. 그리고 이번에 이상남의 '날선 페인팅'에 주목했다.
[서울 뉴스핌]이영란 기자= 이상남(Sang Nam Lee), Blue Circle No.4, 1993. Acrylic on canvas. 122x92cm Photo:CJY studio,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2024.03.04 . art29@newspim.com |
페로탕 서울 지점이 한국작가 개인전을 여는 것은 지난 2019년 박가희 개인전 이후 이상남이 두번째다. 오는 3월 16일까지 열리는 전시에 이상남은 1990년대부터 2023년까지 40여년 예술적 궤적을 조망하는 대표작 13점을 내놓았다.
이상남은 "페로탕은 제 작업을 6년 여간 지켜보며 분석하다가 작년에 전시 제의를 해왔다"고 했다. 페로탕에서의 이번 개인전으로 이상남의 이름과 작품세계는 국제적으로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서울 뉴스핌]이영란 기자=이상남(Sang Nam Lee), 'Forme d'esprit (J264)', 2014. Acrylic on panel.162x130x4cm Photo:CJY studio.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2024.03.04. art29@newspim.com |
이번 개인전은 한 곳에 고인물처럼 되길 거부하고, 끊임없이 기존작업을 허물고 뒤엎으며 비틀어온 이상남의 작가적 태도를 확인케 한다. 그 스스로 "바뀐다는 건 목숨을 내놓는 것"이라 고백하면서도 오늘도 변화와 뒤집기, 비틀기를 거듭한다. 페로탕에 걸린 작품들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합리와 비합리, 아날로그와 디지털, 회화와 건축, 미술과 디자인 사이의 '샛길'을 걸으며, 그 좁고 고독한 길에서 치열하게 작업하는 이상남의 예술세계를 음미해보게 한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나와 1981년 미국으로 건너간 이상남은 1996년 소호의 엘가 위머 갤러리에서의 첫 개인전과 이듬해 서울 현대화랑에서 귀국전을 가졌다. 수수께끼같은 기호와 이미지가 이어지는 이상남의 그림은 '회화의 재현성'에 익숙했던 당시 관객들에겐 낯설고 이질적이었다. 그럼에도 두 전시는 비평적으로도, 또 상업적으로도 대단한 성과를 거뒀다. 뉴욕 전시는 메이저 신문과 잡지인 '뉴욕타임스','아트 인 아메리카'가 다뤘고, 서울 전시는 출품작이 매진되는 사태를 빚으며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그러니 그 감각적이고 세련된 작업을 조금씩 변주하면서 안온함을 즐길 법도 하건만 이상남은 거꾸로를 택했다. 스스로를 회의하고, 부정하며 또다시 미답지로 떠난 것이다. 마음을 곧추잡고, 스스로를 버리면서 그 과정에서 마주하는 스스로를 새롭게 발견하곤 했다. 익숙한 것에서 빠져나와 '별짓'을 하는 게 예술이라는 신념 때문이었다.
이상남의 이같은 생각은 아일랜드계 영국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 작업에 대해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가 언급한 '어긋나게 하기, 비틀기, 겹치기'와 일맥상통한다. 서구 근대이성의 오랜 지적 전통인 '경험론'과 '관념론'을 비판해온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개념에 그 역시 동의하기 때문이다.
[서울 뉴스핌]이영란 기자=강남구 도산대로의 페로탕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이상남의 개인전 '마음의 형태' 전시전경. Photo: CJY Studio.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2024.03.04 art29@newspim.com |
이상남은 대학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도미하기 전인 1972년과 1974년 '앙데팡당전'에 참여하면서 당시로선 매우 혁신적이었던 사진매체를 활용한 '창문'시리즈를 선보여 각광받았다. 1970년대 중반 대구를 기반으로 일어난 실험미술운동인 '대구현대미술제'에도 초대되었고, 1979년에는 상파울루비엔날레에 참여하면서 국제적 행보를 넓혀나갔다.
이어 1981년 뉴욕 브루클린미술관에서 열린 'Korean Drawings Now'라는 그룹전에 참여하면서 이상남은 뉴욕으로 본거지를 옮기게 된다. 20대였던 새내기 작가로선 엄청난 도전이었다. 이후 뉴욕에서 이상남은 한국서 선풍적으로 몰아치던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이 뉴욕선 인기가 시들해지고 있음을 목도했다. 대신 독일표현주의, 신표현주의 회화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는 다양한 개념과 미술가, 미술기관이 '멜팅 팟'처럼 뒤섞이고 범람하는 뉴욕 미술계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자신의 미술언어의 방식을 암중모색했다.
이상남의 초기 뉴욕시기는 그의 작업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뉴욕에서는 대안공간이 융성하기 시작하고 페미니즘미술, 제3세계 미술, 식민주의, 탈식민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평이론이 미술계를 휩쓸었다. 이 때 이상남은 '기하 추상회화'를 통해 마침내 답을 찾았다. 그가 뉴욕초기 그렸던 이미지의 형태는 낯설고 이질적인 기호들로 가득차 있다. 점, 선, 면의 기하학적 형태로 짜여져 있지만 정확한 형체를 파악하기 어려워 의문부호를 던지게 한다.
[서울 뉴스핌]이영란 기자=스튜디오의 이상남 작가. Photo Yongjoon Choi.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2024.03.04. art29@newspim.com |
뉴욕 시절 이상남은 박이소가 운영한 마이너 인저리의 기획전과 박경이 창립한 스토어프런트의 전시에 참여했다. 이를 통해 그의 작품은 회화의 세계와 프레임 밖의 세계를 분리했던 모더니즘 시각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이상남에게 회화는 우리의 삶의 공간과 건축공간, 사회적 이슈가 서로 교차하고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얽힌 세계관을 구축하기에 이른다.
이 시기 이상남은 회화가 건축적 공간 안에서 현상학적으로 새롭게 자리잡길 바라며, 특유의 '설치적 회화'를 정립해 나갔다. 즉 회화가 미술관이나 화랑 벽에 내걸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건축과 디자인 또는 주변공간과 관계 맺으며 확장하는 것을 다각도로 실험했다. 자신의 회화에 등장하는 문자나 기호들이 우리의 일상과 다층적으로 얽히면서, 존재 자체에 대한 철학적 사유로 이어지길 소망했던 것이다.
[서울 뉴스핌]이영란 기자=강남구 도산대로의 페로탕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이상남의 개인전 '마음의 형태' 전시전경. 3월16일까지. Photo: CJY Studio.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2024.03.04 art29@newspim.com |
이상남의 작품은 흔히들 '기하학적 추상화'로 분류한다. 그러나 그는 그런 분류에 머물길 거부한다. 자신의 작업은 '추상을 추상화하는 것'이라는 그는 작품 속 이미지의 형태도, 내용도 고착된 관계를 끝없이 부정하면서 생기는 '의미의 균열과 파열'이라고 했다. 이상남이 빚어낸 이 균열은 때로는 긴장과 위트를 유발해 흥미를 더한다.
물론 이미지 사이 사이로 보이는 형상, 이를테면 교각이라든가 바퀴 같은 도시 속 도상과 인간문명이 남긴 부호들이 파노라마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하학적 형태로 만들어진 음표들의 행진과 색채와 형태로 에너지 흐름을 드러내는 주제들은 경쾌한 리듬감을 선사한다. 하지만 어느순간 그 기호와 색채는 재현의 문법에서 슬쩍 비켜가며 이탈한다.
이렇듯 이상남의 회화 속 기호는 난해하고 비의적이며 신비롭다. 그는 이미지를 화면에 고정하지 않는다. 관객이 무슨 형상인지 알아챌 것같으면 어느새 형태를 뭉개고 교란시킨다. 정연심 홍익대학교 교수는 "이상남이 선택한 형태들은 기호가 되어 여기와 저기를 끊임없이 부유하며 자리잡기를 거부하는 '유목민적 존재들'이다. 그의 작품 속 이미지들을 기호라고 여긴다면 그 기호들은 한 곳에서 자리잡고 이야기를 만들며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게 아니라, 정착하지 못하는 노마드적인 존재로서 여기와 저기를 연결하고 얽히게 만들어 나간다"고 평했다.
이상남은 스스로를 이동하며 존재하는, '표류적 존재'로 인식한다. 그의 회화가 온-오프라인을 연결하며 '얽힘의 공간'으로 보이는 것도, 그의 작품이 아날로그와 디지털, 인공지능과 자기생성 이미지와 연결해도 더없이 자연스러운 것도 그의 회화가 품고 있는 '표류하는 이미지'라는 본질 때문이다.
지난 40여년간 이상남이 매일매일 그린 드로잉 다이어리는 부유하는 기호들로 가득하다. 또 그 드로잉 속 부호들의 근간이 된 이미지들은 드로잉의 10배가 넘는다. 엄청난 레퍼런스가 컴퓨터 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수많은 이미지를 곱씹어 작업하되, 형태가 고정돼 이미지가 가독성을 지닐 때 이를 뭉그러뜨린다. 애써 구현한 이미지를 다시 부정하는 회화적 단계를 거듭하는 것이다.
이렇듯 이상남이 고정관념과 전통을 부정하며, 비틀고 겹치고 어긋나기를 반복하는 것은 그 과정이 작가 스스로 무척 흥미롭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같은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쳐 작품의 의미는 더욱 풍부해지고, 다양한 사고들이 뒤섞이며 배타성에서 벗어나게 된다. 결국 이상남의 작품은 그가 살거나 지나온 도시, 장소의 풍경, 살아온 삶의 궤적과 긴 여정(일명 '롱 저니')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추상풍경'이자 '마음의 풍경화'라 할 수 있다.
이상남의 작업은 제작과정 자체도 남다르다. 지구상 그 어떤 작가도 이렇게 힘들고, 엄격한 과정을 고집하진 않을 것이다. 초기에 그는 손으로 프로토타입 형태를 만들고 이를 평면 안으로 옮겼다. 그러나 점차 컴퓨터를 이용해 프로토타입을 만듦으로써 더 많은 이미지를 추출하기에 이른다.
[서울 뉴스핌]이영란 기자= 채호기 시인이 쓴 책 '그리되, 그리지 않은 것 같은,'의 표지. 채호기가 오랫동안 감응해온 화가 이상남의 작품세계가 1,2부로 나눠 수록돼 있다. 260쪽. 난다 펴냄 .2024.03.04 art29@newspim.com |
'상감세공'에 비견되는 작업과정은 패널에 아크릴물감을 칠하고 옻을 입히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곤 사포로 표면을 문지르고, 다시 붓으로 색을 입히는 과정을 수십, 수백 번 반복한다. 작가가 손작업의 흔적을 지우고, 그리는 과정을 무수히 반복하는 것은 '인공적인 매끈한 색덩어리', 즉 어머어마한 '색두께'를 만들기 위해서다. 백여 차례의 사포질과 칠하기 끝에 만들어진 색덩어리는 주위의 빛을 빨아들이면서 그 빛을 다시 강렬하게 발산한다. 그 예리함과 강렬한 아우라에 관람자는 눈이 베일 지경이다. 작품을 마주한 관람자가 현혹되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이상남의 작품은 시간과 공간, 전경과 후경이 만나고 충돌하며 하나가 된다. 불가사해한 카오스의 시대에, 이상남 회화는 '아이러니의 연속'을 보여준다. 그 아이러니를 즐기고, 해석하는 것은 관람자의 몫이다. 이상남 자신도 "내 그림은 관람객의 감상을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고 밝히고 있다.
이상남은 서울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현재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다. 상파울루비엔날레, 부산비엔날레, 세비아비엔날레에 참여했으며, 뉴욕·워싱턴DC·암스테르담·벤쿠버·도쿄·서울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가졌다. 폴란드 포즈난 신공항 로비의 초대형 벽화, 경기도미술관, KB타워, 주일 한국대사관 등에 대형 설치회화가 영구소장돼 있다.
한편 이번 페로탕 서울에서의 이상남 개인전에 맞춰 채호기 시인이 쓴 책 '그리되, 그리지 않은 것 같은,'이 난다(대표 김민정)에서 출간됐다. 시인 채호기가 감응해온 화가 이상남의 작품세계가 1부 '감응의 회화, 정교함과 뭉개짐'(이상남 작품에 대한 단상), 2부 '대담:말이 되지 않는 걸 말이 되게 하라'로 나눠 수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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