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간 빌라왕과 유사한 전세 사고 급증…"법적·제도적 안전망은 여전히 미비"
수사 나섰으나 처벌·변제 미지수..."분양대행사·건축주까지 책임 추궁해야"
수도권 일대에서 빌라·오피스텔 1139채를 임대하다가 전세보증금을 반환하지 않은 채 숨진 '빌라왕' 김모(42) 씨. 그는 사망했지만 그가 남긴 피해는 여전하다. 빌라시장은 김씨의 타깃이 됐다. 신축이냐 구축이냐에 따라 수법이 조금씩 달랐지만 기본적으로 빌라왕을 비롯한 전세시장의 무법자들은 폭탄을 돌리듯 빌라를 거래했다. 시한폭탄과 같은 깡통빌라는 그렇게 지어지고, 사들여지고, 다시 떠넘겨졌다가 누군가의 눈물이 됐다. 뉴스핌은 빌라왕 김씨 사례를 중심으로 온갖 편법과 불법의 온상이 된 빌라시장을 들여다봤다.
[서울=뉴스핌] 신정인 기자 = 빌라왕 사망을 계기로 경찰이 대대적으로 전세사기 수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이미 법적·제도적 허점을 노리고 벌인 전세사기 건수가 많은데다 실제 재판까지 넘어갔을 때 적절한 처벌과 변제가 이뤄질 수 있을지 미지수라는 지적이 나온다.
사기의 고의성을 입증하기 어려운데다 이미 '바지 집주인'들은 피해금액을 상환할 능력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에 변제능력을 갖춘 분양대행사, 건축주까지 수사를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빌라왕', 그리고] 글싣는 순서
1. 건축주→집주인→임차인으로 이어지는 '폭탄 돌리기'
2. [단독] 임차인 몰아낸 후 '뻥튀기' 된 집값
3. 전세사고 급증하는 동안...건축왕·빌라의신 등 활개
4. "이자비 최대 5000만원"…여전히 존재하는 '깡통전세'
5. 사망한 김씨 추적하니 또 다른 '왕'들이 나왔다
6. 잇단 전세사기 사건…원인은
◆ 4년간 빌라왕과 유사한 전세 사고 급증…"법적·제도적 안전망은 여전히 미비"
9일 뉴스핌 취재를 종합하면, 지난 2019년 경기 수원시 영통구 일대에선 전세 임차인 400여명으로부터 전세보증금 250억원가량을 가로챈 사건이 발생했다. 임대인 변모(62) 씨는 가족들과 함께 시행사업을 통해 빌라·오피스텔 건물 28곳을 직접 지은 후 건축주가 직접 전세 임차인과 계약하는 방식으로 임대사업을 했다. 한 건물에서 나온 전세보증금을 바탕으로 또 다른 건물을 짓는 식이다.
변씨는 지난해 10월 사기, 건축법 위반 등의 혐의로 1심에서 징역 9년을 선고받았으나 이에 불복해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서울=뉴스핌] 신정인 기자 = 최근 5년간 전세보증금반환보증 사고건수 및 대위변제금액. 2023.01.09 allpass@newspim.com |
전세사기는 해마다 급증하고 있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 '전세보증금반환보증 실적' 자료를 보면 보증사고는 2018년 372건에서 2019년 1630건, 2020년 2408건, 2021년 2799건으로 매년 급증했다. 특히 지난해 1~11월까지 집계된 사고 건수는 4606건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HUG가 집주인 대신 임차인에게 지급한 변제액 역시 500억대에서 7000억대까지 치솟았다. 대위변제액은 2018년 583억원에서 2019년 2836억원, 2020년 4415억원, 2021년 5040억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11월까지의 대위변제금액은 7690억원에 달한다.
빌라왕 김씨를 수사하는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 외에도 전국 각지에서 수십채에서 많게는 수천채의 주택을 보유한 뒤 전세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은 이들을 수사하고 있다.
인천경찰청은 인천과 경기도 일대 아파트·빌라 2709채를 차명으로 보유해 260억원대 전세금을 가로챈 혐의를 받는 이른바 '건축왕'을, 경기남부경찰청 반부패수사대는 빌라·오피스텔 3493채로 전세사기를 벌인 '빌라의 신' 일당을 비롯해 분양대행업자 2명을 수사하고 있다. 광주지방경찰청 반부패수사대는 빌라 208채를 매입해 전세보증금 480억원을 가로챈 혐의로 50대 정모씨를 구속해 수사 중이다.
전세사기가 급증하는 동안 법적·제도적 안전망은 갖춰지지 않았다. 최광석 법무법인 로티스 변호사는 "전세사기는 매우 오래됐다. 다만 사기 일당을 미리 솎아내지 못해서 독버섯처럼 증식한 것"이라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고소장을 제출하면 경찰에서 형사가 아닌 민사 사건으로 보고 돌려보냈다"고 비판했다.
◆ 처벌·변제 미지수..."분양대행사·건축주까지 책임 추궁해야"
전문가들은 빌라왕 사망을 계기로 경찰이 대대적인 수사에 착수했지만 실제 형사 처벌과 피해자 변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내다봤다. 전세사기 특성상 사기의 고의성 입증이 어렵고 명의만 빌려준 '바지 집주인'의 경우 변제할 능력이 없는 경우가 많아서다.
김예림 법무법인 덕수 변호사는 "임대차 계약을 체결할 때부터 보증금을 안 돌려줄 고의성이 입증돼야 하는데 밝혀지기 어렵다"며 "다만 전세사기의 경우 보통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수사력을 통해 불법 정황을 어떻게 엮는지가 관건"이라고 주장했다.
뒷북 수사로 인해 피해가 커졌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신중권 법무법인 거산 변호사는 "(정부가 대대적으로 전세사기 수사에 나섰지만) 이미 늦었다"며 "'전세사기 1세대'가 시작됐던 3년 전부터 수사가 제대로 이뤄졌다면 지금의 사태까진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신 변호사는 서울 강서구 화곡동 일대에서 빌라 수백채를 무자본 갭투자 방식으로 사들이고 이 과정에서 전세보증금 30억원가량을 가로챈 혐의를 받는 강모씨 사건의 피해자들을 대리한다.
강씨는 지난 2015년 9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건축주 등으로부터 집 한 채당 500만∼1500만원의 리베이트를 받고 화곡동 빌라 283채를 사들인 혐의를 받는다. 서울남부지검 전세사기전담수사팀(부장검사 이응철)은 지난 4일 강씨를 구속기소 했다. 강씨와 공모해 거액의 리베이트를 챙긴 공인중개사와 동업자 등 2명은 불구속 기소됐다.
앞서 신 변호사는 2019년 이들 일당을 고소했고, 서울 강서경찰서는 2020년 8월 이들을 검찰에 기소의견으로 송치했다.
신 변호사는 집주인뿐만 아니라 '깡통전세'를 중개한 분양대행사와 건축주까지 수사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건물 신축 후 원래는 분양받을 사람이 필요한데, 분양받을 사람이 없으니 임차인의 보증금으로 분양대금을 치러서 관계자들은 다 빠져버리는 식"이라며 "애초에 다음 임차인을 구해 전세보증금을 돌려줄 생각이 있는 게 아니라 당장 새로 지은 빌라를 털어버리려는 게 목적"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근본적인 역할을 한 사람을 잡아서 처벌하지 않는 이상 이런 범죄는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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