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나드 리치 "현대 도예가 나아갈 길은 조선 분청사기가 이미 다 제시"
서양의 것에서는 도무지 볼 수 없는 동양적 미학의 절정 형상화
'박지(剝地)' 기법으로 빚어낸 모란무늬편병에 삶의 관조가...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도자기 그릇하면 유럽 브랜드부터 떠올리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일 터다. 그도 그럴 것이 국내 브랜드는 멸종 직전에 몰려 있고, 대형 백화점이나 럭셔리 편집숍의 생활자기 판매장에는 거의 유럽 브랜드 제품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그러니 국내 제품들은 이들 사이에 초라하게 끼어서 겨우 숨만 붙어 있는 형국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왜 이렇게 됐을까. 생활자기로서 국내 제품들이 외면받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여러가지 사정이 있지만, 현대에서 우리 자기가 시선을 못끄는 가장 큰 이유는 디자인 문제다. 세련되고 현란한 서구의 문물에 길들여지고 한껏 눈이 높아진 우리 소비자들 시선에 우리 제품들은 너무 낡고 둔탁하며, 심지어는 조악한 느낌마저 드는 것이다.
그럼 이런 현실에서 탈출할 방도는 없을까. 가장 현실적인 대안을 분청사기(粉靑沙器)에서 찾을 수 있다. 분청사기란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의 줄인 말로 고려 말에서 임진왜란 30~40년 전까지(1392~1592년 무렵) 만들어진 도자기다. 분청사기의 흙은 고려청자와 같은 일반 점토질이다. 철분이 섞여 거칠어진 겉면을 하얀 분(백토)으로 분장했다고 해서 분청사기로 불린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논설위원 = 허상욱 모란무늬편병 [사진 = 솔루나 갤러리 제공] 2021.11.11 digibobos@newspim.com |
[서울=뉴스핌] 조용준 논설위원 = 허상욱 조어문장군 [사진=솔루나 갤러리 제공] 2021.11.11 digibobos@newspim.com |
형태와 장식 면에서 청자와 백자가 귀족적이라면, 분청은 소박하고 서민적인 해학이 물씬 느껴진다. 문양은 크게 과장되었으나, 규범에 구애받지 않은 즉흥적 표현이 보는 사람에게 천진난만한 자유를 선사한다. 이런 분청에 대해 영국의 세계적인 도예가 버나드 리치(Bernard Howell Leach, 1887-1979)는 "속물적 근성이 없는 자연스러움의 극치"라고 찬양하면서 "현대 도예가 나아갈 길은 조선의 분청사기가 이미 다 제시한 바, 그것을 목표로 해서 나아가야 한다"고 그 가치를 평가했다.
분청은 우리 도예가 나아가야 할 미래이고, 현재의 척박한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가장 큰 분야다.
우리 실생활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머그(mug)의 예를 들어보자. 머그 없는 집은 거의 없지만, 유럽산 제품 아니면 정체 불분명의 조악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그런 것 대신 도예가 황상욱의 분청 머그 하나를 대체해서 놓아보자. 아마, 매우 세련되면서도 그윽한, 그러면서도 현대적 미감이 더해진 편안한 느낌의 분위기로 확 바뀔 것이다.
허상욱의 작품에는 분청이 주는 편안함과 자유로움, 해학의 미감이 잘 녹아 있다. 허상욱이 오로지 분청 작업만을 고집하는 까닭도 아마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앞에서 분청 머그를 예로 들었지만, 황상욱 작품 세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모란 무늬(문양)의 편병(扁甁)이다. 편병은 몸체의 양쪽 면이 편평하고 납작한 모양에서 생긴 말로, 삼국시대부터 조선 시대 후기까지 술이나 물 등을 담아 휴대하는 용도로 꾸준하게 제작되었다.
모란이 가득 들어 있는 허상욱의 모란무늬 편병은 서양의 것에서는 도무지 볼 수 없는 동양적 미학의 절정을 이룩해낸다. 그렇지만 고루하지 않고 세련되게 화사하며, 정감이 있다. 묵으로 그린 단색의 화초가 마치 가장 화려한 색조로 피어나는 느낌이랄까.
[서울=뉴스핌] 조용준 논설위원 = 허상욱의 분청 작품은 서양의 것에서는 찾을 수 없는 동양만의 미학이 잘 살아 있다. 2021.11.11 digibobos@newspim.com |
늦 봄, 뭇 꽃들이 진 자리에 화려하게 피어나는 모란의 크고 화려한 꽃송이는 탐스럽고 찬란한 인생의 아름다움, 풍요와 번영을 상징한다. 살아서는 부귀영화와 환희를, 죽음 후에는 영원한 안녕과 번번영을 기원한다. 그런 꽃이 옅은 갈색 바탕의 편병에 가득 피어나 있다. 살아있을 때에는 감상의 즐거움과 심상의 편안함을, 죽어서는 영혼의 안식을 기원하는 편병이다.
편병에 가득한 모란을 형상화하는 기술은 '박지(剝地)'라는 기법이다. 질(태토)로 그릇을 빚은 후 배토로 분장을 하고 문양을 그린 뒤, 배경 부분을 긁어내어 무늬를 드러낸다. 서양에서는 이탈리아 말로 스그라피토(Sgraffito)라고 한다.
분청 작업에는 박지 말고도 음각, 상감, 인화, 귀얄, 덤벙 등 많은 기법이 있는데, 허상욱은 박지로 문양을 내길 즐겨한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리움미술관에서 보물 1070호 박지 모란문 장군(물, 술, 간장 따위의 액체를 담아서 옮길 때에 쓰는 길죽한 모양의 항아리)을 본 적이 있다. 그 때 얻은 감동과 영감을 잊을 수 없었다. 내 박지 작업은 그 보물에 대한 일종의 오마쥬라 할 수 있다. 문양을 그린 다음에 긁어내는 작업이 참 재미 있고, 기분이 좋다."고 말한다.
주로 모란 꽃을 그리는 이유는 "작은 꽃들은 옹색한 느낌이 들어 큰 꽃을 찾다보니 모란이 제일 적당했다"고 했다. 물론 모란이 지니는 상징성도 큰 이유가 됐다.
허상욱의 박지 작품 가운데는 어문(물고기 무늬) 장군도 있다. 옛부터 분청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문양은 물고기와 연꽃이다. 쏘가리 종류라고 생각되는 물고기는 혼자 있거나, 연꽃과 같이 노닌다. 허상욱의 장군에는 물고기와 새, 연꽃이 함께 등장한다.
허상욱은 특히 쌍어문(雙漁文)에 관심이 많은데, "아무래도 선조인 허황후의 영향을 받은 탓"이라고 한다. 가야 수로왕의 왕비로 인도에서 온 허왕후를 이야기하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쌍어문이다. 가락국의 국장(國章)이자 신앙의 상징으로 사용된 쌍어문은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물고기가 인간을 보호하는 영특한 존재로 여겨 사용하던 문장이다. 이후 인도에 전파되고, 힌두교의 여러 신상(神像)중에 하나가 되어 널리 사용됐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논설위원 = 허상욱 쌍어문 스툴 [사진=솔루나 갤러리 제공] 2021.11.11 digibobos@newspim.com |
지금도 가야의 옛땅이었던 경남의 여러 불교 사원에는 쌍어문이 남아있다. 김해의 은하사, 계원암, 합천의 영암사에 쌍어문이 그림이나 조각으로 있다. 쌍어신앙은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어 선비들이 사용하던 묵(墨)에도 그려지고, 여인네들의 노리개에도 달리게 되었다. 이천년 전 한 여인의 국제결혼이 이렇게 지금까지 우리 문화속에 살아 숨쉬고, 이윽고는 허상욱의 장군에도 등장하게 됐다.
소박한 분청 사발에 어느새 퐁당 들어와 앉은 물고기 한 마리. 화장토에서 올라온 질박한 백색과 질이 내는 묘한 청회색의 호수를 유유히 떠다니는 물고기 꼬리의 움직임을 다라가다보면 나 역시 덩달아 그 물에서 둥둥 헤엄치는 듯하다. 물고기는 마음을 묘하게 울린다.
허상욱은 대학은 도예과를 나왔지만, 군대를 다녀와 복학생 시절 방송국에서 미니어처 만드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일이 재미 있어서 그 길로 죽 갈 수도 있었는데, 3학년 때 호암미술관에서 분청사기를 보고 그만 푹 빠져버리고 말았다. "청자나 백자보다는 분청이 제일 만만해보였다." 물론 이런 그의 생각은 곧 엄청난 잘못임을 깨달았지만, 분청의 자유분방함이 만만하게 보이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논설위원 = 작품 앞의 허상욱 작가 2021.11.11 digibobos@newspim.com |
대학을 졸업한 다음은 분청사기를 만드는 도예작업이 그의 삶의 모든 것이 됐다. 1997년에 경기도 양평에 작업실과 집을 짓고(결혼도 그 때 했다) 현재까지 25년 넘게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부인이 대학 CC였기 때문에 그의 도자 일에 대한 불평은 전혀 없다고 한다.
그의 수상을 보면 1993년 산업미술가협회공모전 입선과 한국출판미술대전 동상을 시작으로, 1994년 전국대학미전 은상, 1996년 소사벌 미술대전 최우수상, 2003년과 2005년 세계도자기비엔날레 국제공모전 입선과 특선, 2006년 아름다운 우리 도자기 공모전 특선 등이 죽 이어졌다. 상복도 많은 편이다.
지난 10월 15일부터 11월 7일까지 연 서울 효자동 솔루나(Soluna) 갤러리의 '하상욱 분청 스펙트럼: 환희, 의미와 확장'전까지 모두 15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국제전시회도 런던 사치갤러리 등 너무 많아서 셀 수 없다. 현재 런던의 빅토리아&앨버트박물관, 폴란드 바르샤바의 국립민속박물관 등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논설위원 = 종로구 효자동 솔루나 갤러리에서 지난 7일까지 열린 허상욱 개인전 '분청의 환희, 의미와 확장' [사진=솔루나 갤러리 제공] 2021.11.11 digibobos@newspim.com |
그는 현재 재료의 다양성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다. 미래지향적인 재료 찾기다. 그는 새로운 재료를 찾는 것이 "고고학자가 발굴하듯 과거의 무엇을 탐구하는 느낌"이라고 표현한다. 화장토의 새로운 가능성 찾기나 은 도금 실험도 이런 차원의 노력이다. 분청에 은을 입히는 작업은 3~4년 전부터 해오고 있는 작업이다. 재벌구이한 몸체에 은을 바르고 800도 정도에서 3벌구이를 한다.
"최근 꽃병에 대한 주문이 늘어났다. 아무래도 코로나로 인해 바깥에 나가지 못하고 집에서 있는 시간이 많아지다보니 이런 새로운 수요가 생긴 것 같다. 이처럼 대중의 소구력은 늘 변한다. 21세기의 분청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물음을 늘 달고 산다. 새로운 시도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두려워하지 않는 방법부터 익혀야 한다."
화려한 유럽 브랜드의 꽃병도 좋지만, 허상욱의 분청 편병이나 장군에 꽃을 꽂아보면 어떨까. 틀림없이 꽃을 돋보이게 만들 것이다. 플로리스트들에게 허상욱의 분청을 눈여겨보라고 권하고 싶다. 분청은 오래된 미래다.
digibobos@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