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양진영 기자 = '왕의 남자'부터 '사도' '동주'의 이준익 감독이 또 한 편의 흑백 사극으로 찾아왔다. 역사의 주요인물 정약용이 아니라, 널리 알려지지 않은 지식인 정약전을 통해 현대에 더욱 의미있는 인물을 조명했다.
이준익 감독은 지난 19일 온라인 화상 인터뷰를 통해 신작 '자산어보'의 개봉을 앞둔 소감과 촬영 과정 등을 직접 밝혔다. 이 감독은 "직접 만나 말로 주고받고 해야 하는데"라면서 아쉬운 마음을 드러냈다. 그는 숱한 사극과 시대극으로 관객과 만난 후, 새로이 선보이는 영화가 왜 '자산어보'인지, 왜 정약전이었는지 천천히 설명했다.
"예전엔 역사를 보는 방식이 망원경으로 들여다봤다면 이제 현미경으로 보게 되는 거죠. 사건, 제도, 왕 이름을 외우는 교육을 지나서 지금은 개인주의 시대예요. 국가주의나 집단주의를 벗어난 시대가 이미 도래했어요. 영화에서도 이제는 그런 시도를 해야겠다고 혼자 생각을 한거죠.(웃음) 올바른 선택인지 모르겠는데 거시적인 관점보다 미시적인 관점이 현대에 더 적절하게 느껴져요. 거대한 사건이나 영웅의 이야기보다 뭔가 큰 일을 하지는 않았는데 의미있는 한 사람의 사소한 인생을 가까이서 현미경으로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정약전이에요."
[서울=뉴스핌] 양진영 기자 = 영화 '자산어보'의 이준익 감독 [사진=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2021.03.22 jyyang@newspim.com |
정약전은 조선 후기 뛰어난 실학자였던 정약용의 형이다. 영화에서는 정약전, 정약용, 정약종 삼형제가 등장한다. 정약용이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등으로 성리학을 실사구시에 입각해 실학으로 풀어냈다면 정약전은 그보다 한참 더 실용학문에 치우친 다양한 분야를 들여다봤다. 그 중 하나가 쉽게 말해 물고기 도감인 '자산어보'다.
"정약용만 해도 2시간 짜리 영화로 담을 수가 없어요. 그 분의 책 권수나 업적을 따지면 16부작은 찍어야 할 거예요. 정약전의 기록은 딱 2시간 짜리 이야기로 남아있었죠. 그래서 현미경으로 들여다볼 수 있었죠. 그동안 사극에서 일상성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작품이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서로 죽고 죽이고 왕위싸움, 전쟁, 역사적 사건을 다룬 게 대부분이었죠. 현대물은 일상성을 다룬 영화들이 보편화됐는데, 시대물이나 사극이 일상성을 띤 채로 끌고가는 작품은 드문 것 같아요. '자산어보'는 다른 사극과 그런 차이와 의미가 있죠."
극중 정약전(설경구)와 함께 등장하는 창대(변요한)는 약전의 저서인 '자산어보'의 서문과 본편에 실제로 등장했던 실존 인물이다. 이준익 감독은 여기에 픽션을 덧대 조금 더 풍성한 인물을 빚어냈다. 말하자면 임금을 섬기고 아래로 백성을 이롭게 하려는 정약용과 그보다 더 급진적인 사상에 심취한 정약전의 사이에서 진정한 학문의 길을 고민하는 젊은이가 바로 창대다.
[서울=뉴스핌] 양진영 기자 = 영화 '자산어보'의 이준익 감독 [사진=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2021.03.22 jyyang@newspim.com |
"'왕의 남자' 당시에 공길이도 남아있는 기록 몇줄을 갖고 허구로 만들었죠. 창대는 그보다는 허구성이 덜해요. '자산어보' 본문에 창대를 인용하고 있는 구절을 영화에 넣었죠. 구체적으로 공간들이 나와있어서 실존 인물을 가공해 적당히 허구를 가미했어요. 사실 캐릭터보다 창대의 여정이 왜 이렇게 흘러가는가가 더 중요하죠. 약전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서 상대 개념이 필요했어요. 약전의 인물을 절대 기준으로 서술하면 그저 한 위인의 일대기가 되고 지나치게 미화하는 우를 범할 위험이 있죠. 예전같으면 약용과 약전을 대치시켜야 했겠지만, '자산어보'에선 그 중간에 창대의 여정을 통해 그걸 보여주려 했어요."
실제로 이 감독이 영화에 가득 담아낸 것은 정약전의 생활 그 자체, 어부로 나고 자란 창대의 삶, 묵묵히 살아가는 섬 사람들의 일상이었다. 그의 시각과 맞물려 정약전의 시대를 앞서간 세계관과 사상이 영화를 표현하는 방식에도 담긴 셈이다. 극 초반 "정약용보다 더 한 놈"이라고 평가받는 정약전의 실용주의적 탐구방식은 과거보다 현재에 더욱 가치있게 다가오는 지점이 분명히 있다.
"성리학이 인문학이라면 자산어보는 자연과학이죠. 상것들이 하는 것을 신분과 계급을 뛰어넘어 선택하고 결과를 남긴 거예요. 딱히 제 정치적 성향을 드러낸 건 아니지만 목민심서와 자산어보의 차이가 대사로 드러나요. 양분된 세계관을 약용과 약전으로 배치시겼어요. 집단의 가치, 공동체의 의식같은 국가주의를 담은 게 목민심서라면 21세기 대한민국의 개인주의를 담은 건 자산어보에 가깝죠. 물론 '자산어보'가 개인주의적으로 쓰인 책은 아니지만 이용후생, 실사구시의 태도로 모두의 이익을 위해 쓴 실용서예요. 집단적 의식에 대한 강박이 없이 개인의 관찰을 통해 달성한 이야기죠. 관찰과 집필의 주체는 정약전인데, 이걸 가능하게 한 창대의 역할과 수행이 있었어요. 창대는 우리가 찾아야 할 우리의 목소리죠."
[서울=뉴스핌] 양진영 기자 = 영화 '자산어보'의 이준익 감독 [사진=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2021.03.22 jyyang@newspim.com |
이 감독은 정약용과 정약전의 길 사이, 창대를 통해 현재의 우리를 바라보게 한다. 창대는 양반 아버지를 뒀지만 신분이 미천해 출세가 요원하다. 그럼에도 책에서 배운 것들을 펼치고 싶은 욕망이 있다. 다산의 제자와 창대가 시 배틀을 절에서 벌이는 것부터 그가 약전에게 돌아오기까지의 여정들은 모두에게 현재에도 여전한 시대의 부조리를 가만히 보여준다. 영화의 마지막, 흑백 화면이 컬러로 바뀌며 흑산이 자산으로 변해가는 신은 이 영화의 메시지를 현재성으로 확장하려는 감독의 의도가 묻어난다.
"여러분이 학교에서 배운 것과 세상이 일치하던가요? 저는 그렇지 않더군요. 기득권 세력과 야합을 하든가 아전의 목을 조르며 창대처럼 인생을 망가뜨려야 하죠. 결국 돌아와서 약전의 서문과 편지에서 진심을 읽는 창대의 눈물은 슬픔보다 기쁨일 거라고 봐요. 창대가 그렇게도 미워했던 흑산이 자산으로 바뀌고 그 여정을 통해 시대와 불화를 이겨내고 자아를 찾게 되죠. 약전과 창대의 다른 점을 옳고 그름으로 나누지 말고 친구처럼 인정하고 존중해나가는 것밖에 없는 것 같아요. 현재성으로 확장한 것도 마찬가지죠. 역사는 현재를 투영하거나 반영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을 거라면 사극을 왜 찍나요. 마치 옛날 얘기같지만 지금과 얼마나 맞닿아있는지를 찾아내는 게 시나리오 작업이죠."
마지막으로 '자산어보'가 흑백 영화로 작업된 이유를 물었다. 앞서 '동주'를 흑백 영화로 선보였던 이 감독은 "컬러는 역사의 인물들이 우리 곁으로 온 느낌이라면 흑백은 우리를 그 시대로 데려가는 느낌"이라며 그 효과를 얘기했다. 이 감독은 그의 작품들이 늘 그랬듯 '자산어보' 역시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영화이기를 묵묵히 바랐다.
"흑백은 판타지고 컬러는 리얼리티예요. 문명의 순서로 판단하면 흑백은 과거이고 컬러는 현재죠. 장단점이 분명해요.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할 때 그게 선명하게 부각되는 효과가 있지만 하고자 하는 얘기가 분명하지 않으면 '무슨 얘길 하는 건가' 하죠. 속을 금방 들켜요. 흑백은 거짓말을 못해요. 흑과 백만 있어서 여백도 많고 그것과 관계성을 생각하면서 채울 것과 비울 것을 같이 고민해야 했죠. '자산어보'의 자리가 어디일지 예측은 못하겠어요. 제 영화도 망한 작품도 많고. '라디오스타'나 '왕의 남자' '동주'가 그런 것처럼 흥하든 망하든 항상 그 자리에 있는 영화이길 바라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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