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예측못한 거함의 침몰...개혁·개방 서루르다 위기 가중
전격 발탁 옐친에 고르바초프 축출...소비에트연방 붕괴운명
미국, 글로벌제국 소련 해체에 피 한방울 안흘리고 '세계경찰'
2. 누구도 예측못한 거함의 침몰
(2-2) 한계보인 고르바초프 개혁
[김흥식 뉴스핌 객원논설위원]
고르바초프가 넘겨받은 소련은 혼돈과 좌절과 불만으로 가득찬 난파직전의 나라였다. 인민들은 소련이라는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들어선 이래(그리고 해체될 때까지도) ‘풍요의 시대’를 단 한 번도 누려보지 못했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상황 속에서 일체의 변화를 거부한 채 도그마에 매달린 결과는 공산체제와 인민생활에 돌이킬 수 없는 난국을 초래했다. 변화만이 살길이라는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정책은 필요하고도 당연해 보였다.
러시아 격동기를 주도한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실제모습을 쏙 닮은 입상이 모스크바 시내에 설치돼 시민들과 관광객의 기념사진 촬영용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사진=뉴스핌DB] |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소련...경제침체로 혼돈·좌절·불만 가득한 난파선
시대를 너무 앞선 개혁은 실패하기 마련인가. 급진적으로 서두른 결과(보수파 입장에선 위험해 보였고, 급진개혁파는 미온적이라고 불만이었다) 정치, 경제, 사회의 모순을 완화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위기를 가중시키는 후유증을 가져왔다. 페레스트로이카 6년의 결과는 악화일로의 경제침체였다. 1990년 산업생산이 소련 출범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공화국간, 지역간, 기업간의 협업체계가 무너지면서 원료와 자재 등의 유통·공급 시스템이 급속도로 붕괴되어갔다. 92년의 경우 인플레가 2500%로 기록적인 증가를 보였고 94년에는 224%로 줄었지만 서민 생활난은 해소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장래에 대한 확신을 잃고 자신과 가족, 국가의 운명에 대해 공포와 불안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금방 좋아질 것처럼 법석을 떨더니 6년이나 지났는데도 나아진 게 없다는 불만이 터지면서 페레스트로이카 주도세력에게 화살이 쏟아졌다. 거침없이 달리던 고르바초프의 개혁 열차는 보수파와 인민들의 저항을 받으며 시간이 갈수록 덜컹 거리기 시작했다. 보수우파 입장에서 보면 고르바초프라는 고유명사는 증오와 모멸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개혁.개방 정책에 대한 보수파의 반발이 거세지자 고르바초프는 자신의 개혁지지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우랄 지방의 지도자에 불과하던 정치신인 옐친을 중앙무대로 발탁했다. 곧 이어 최고 요직의 하나인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와 정치국원으로 파격 승진시켰다.
◆옐친, 고르바초프 축출 후 “이 땅의 공산주의 모델은 실패했다”
한동안 정치적 동지 관계를 유지했던 두 사람은 그러나 소비에트체제 유지와 개혁방향에 대한 견해 차이로 점차 틈이 벌어지면서 양립할 수 없는 적대적 관계로 발전했다. 1991년 8월 보수파가 일으킨 쿠데타 사건을 계기로 고르바초프는 사면초가로 몰리고 자신이 발탁한 옐친에 의해 축출되면서 느슨한 형태로나마 유지하려고 그토록 안간힘을 썼던 소비에트 연방은 마침내 붕괴의 운명을 맞게 됐다. 정의롭고 진보한 사회를 지향하는 새로운 이상을 내세우며 출범한 소련의 꿈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소련 해체와 관련, 주도적인 역할을 한 옐친은 “그동안의 역사적 경험으로 비춰볼 때 이 땅에서 생겨난 공산주의 모델은 실패했다고 단언할 수 있다”며 해체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반면 스탈린에 버금가는 강력한 지도자로 부상한 푸틴은 “소련체제를 그리워하지 않는 자는 가슴이 없는 자다. 그러나 소련체제를 지향하는 자는 머리가 없는 자다“라며 특유의 소신을 밝혔다. 소련체제로 돌아가지는 않겠지만 소련과 같은 강대국이 되어 잃어버린 슬라브 민족의 자존심을 되찾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다.
옐친 대통령이 92년 11월의 방한에 앞서 한국 특파원단과 특별기자회견을 갖고 기념촬영했다. 앞줄 옐친 대통령 오른쪽으로 두번째가 필자. [사진= 뉴스핌DB] |
◆미국도 놀란 글로벌 제국 소련의 급격한 몰락...총 한 방 안쏘고 승리
분명히 사실은, 1980년대만 해도 소련의 붕괴는 서방의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는 점이다. 소련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다는 미 CIA 조차 예측에 실패해 미 의회의 추궁을 받기도 했다. 소련 사정이 극도의 위기상황이라는 점은 알고 있었지만 붕괴 가능성은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소련과 같은 거대한 글로벌 제국이 그토록 전무후무한 속도로 소멸된 예가 없다는 점에서 연구대상이 아닐 수 없다. 미국 입장에서 보면 총 한 방 안 쏘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승리한 셈이다. 세계사에 유례없는, 그리고 예상치 못한 승리로 평가되고 있다. 이로써 미국은 도전받지 않는 유일 초강대국이 되고 옛날의 로마제국처럼 세계경찰로서의 역할을 자처하게 된다.
개혁. 개방과 획기적인 민주화 조치로 시대를 풍미했던 고르바초프가 온갖 수모를 받으며 속절없는 몰락의 길을 걷는 과정을 보면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준다. 큰 틀의 역사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는 역사가 자신에게 맡긴 소명을 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적어도 서유럽과 미국 등 자유민주 진영은 격렬했던 냉전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끝나게 해준 그에게 많은 빚을 졌다고 할 수 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실패-등소평의 개혁성공...정치냐 경제냐 방점서 갈림길
흔히 고르바초프 개혁실패와 등소평 개혁성공을 비교하면서 고르바초프의 잘못을 지적하곤 한다. 필자 생각은 약간 다르다. 긴 안목으로 보면 두 나라의 발전 과정에서 양상이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고 본다. 등소평은 공산체제는 그대로 놔둔채 경제개혁에만 치중해 나름대로 상당한 성과를 보인 게 사실이다. 중국은 지금까지도 그렇지만 공산당 유일 지배체제 유지를 위해 정치적 민주화에는 여전히 강경정책을 늦추지 않고 있다. 근래에는 통제가 더 강화되는 분위기다. 하지만 중국에서 국제화, 세계화가 확대될수록 중국인의 민주화의식과 민족문제가 고조될 수 있고 따라서 국제적 관심도 커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예측불허의 폭발잠재력이 큰 내부 모순들을 언제까지 억누를 수는 없다는 점에서 중국의 고민은 더욱 깊어질 가능성이 크다.
고르바초프의 경우 경제 쪽 보다는 정치와 체제개혁에 방점을 두고 민주화, 자유화를 우선시했다. 그로인해 공산 보수파와 급진 개혁파 사이에서 샌드위치 처지가 된 상황에서 경제문제에 힘을 쏟을 겨를이 없었다. 그럼에도 러시아인들은 고르바초프 덕분에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화, 자유화의 달달한 맛을 경험함으로써 민주주의 의식수준이 상당히 높아졌다. 러시아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과거의 공산체제로 돌아가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는 이유다. 아마도 이 점이 중국의 현실과는 상당히 다르다고 생각한다.
전통민속마을을 방문한 한국인을 환영하는 전통복장의 러시아 여인들.(오른쪽에서 두번째가 필자) [사진=뉴스핌DB] |
▲김흥식 뉴스핌 객원논설위원
한국외대 러시아어과를 졸업하고 1977년 동양통신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디뎠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로 해직되는 아픔을 겪고 쌍용그룹에 몸담고 있다가 1988년 연합뉴스 기자로 복귀했다. 1991년 한국의 첫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파견돼 맹활약했다. 이후 연합뉴스 북한부장, 남북관계 부장, 문화부장, 논설위원실 간사, 경영기획실장을 거쳐 편집담당 상무이사를 지냈다. 퇴임후 연합뉴스 부설 동북아센터 상임이사, 중소기업진흥공단 비상임이사, 도로교통공단 비상임이사, 방송통신심의위원회 특별위원 등을 지낸뒤 현재 뉴스핌 객원논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khs@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