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최신뉴스 GAM
KYD 라이브
KYD 디데이
중국 나우앤퓨처

속보

더보기

[개혁개방 40년] 천지개벽, 개혁개방 40년 대장정과 주요 변곡점들(상)

기사입력 : 2018년03월01일 12:18

최종수정 : 2018년03월02일 11:41

가오상취안 경제체제개혁연구회 회장의 회고
개혁개방 발자취를 상징하는 역사적 '경험'

[편집자] 이 기사는 2월 28일 오전 11시17분 프리미엄 뉴스서비스'ANDA'에 먼저 출고됐습니다. 몽골어로 의형제를 뜻하는 'ANDA'는 국내 기업의 글로벌 성장과 도약, 독자 여러분의 성공적인 자산관리 동반자가 되겠다는 뉴스핌의 약속입니다.

[뉴스핌=강소영 기자] 중국이 올해로 개혁개방 40주년을 맞았다. 중국은 경제 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개혁개방의 눈부신 성과를 조명하는 분위기다. 최근 펑황왕(鳳凰網) 등 중국 유력 매체들은 가오상취안(高尙全) 중국 경제체제개혁연구회 회장의 '내가 경험한 중국 개혁의 10가지 이야기'를 소개하며 개혁개방의 역사를 반추했다. 

해당 글은 지난 2014년 중국 금융박물관에서 진행된 한 포럼에서 가오상취안이 발표한 연설문이다. 개혁의 산증인이자 실천가였던 가오상취안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중국 개혁개방의 변곡점과 발자취를 되짚으며, 개혁의 여정과 당위성을 이야기했다는 점에서 줄곧 중국 사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1인칭 시점에서 작성된 그의 글을 번역해 소개한다.

가오상취안(高尙全) 중국 경제체제개혁연구회 회장

◆ 폭염에 선풍기도 마음대로 살 수 없었던 기업: '자주권'을 얻기까지 험난한 여정 

1956년 12월 6일 나는 런민르바오(인민일보)에 '기업의 자주권을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한다'라는 글을 게재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완전한 자주권이 아닌 '일정한 수준의 자주권'이라는 표현은 매우 보수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하면 이 정도 수위의 표현도 쉽지 않았다.

당시엔 철저한 계획경제 아래서 모든 생산과 기업 경영이 정부의 지침 아래 이뤄지고 있었다. 하지만 중앙 정부가 모든 지역의 기업 경영에 면밀하고 효율적으로 대응하기란 사실상 힘들었다. 곳곳에서 비효율과 자원 낭비가 속출했고, 폐단이 드러나고 있었다.

개혁개방 초기 산시(陝西) 지역의 한 공장. 1979년 9월 '산시일보'는 기업의 자주권 확대의 필요성을 강조한 신화사의 보도를 전재했다. 산시지역은 국유기업의 밀집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지역으로, 기업의 효율성 제고가 시급했다. 

 

1956년 상하이의 여름은 무더웠고, 공장들은 폭염으로 생산에 차질을 빚게 됐다. 에어컨이 없던 시대여서 선풍기 도입이 시급했는데 선풍기 하나도 기업이 마음대로 살 수 없었다. 선풍기를 사기 위해 7개 정부 부서에 보고를 올리고 허락을 받는 사이 그해 여름을 지나가버렸다.

유사한 사례는 비일비재했고, 급기야 나는 런민르바오에 기업의 자주권을 허락하라는 칼럼을 쓰게 됐다. 이 칼럼으로 나는 한참 후인 문화대혁명(1966~1976) 당시 대자보를 통해 공격을 받은 적이 있다. "기업에게 자주적 결정권을 주는 것은 유고슬라비아의 수정주의와 다를 바 없다. 사회주의 체제의 기업은 반드시 정부가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그러나 마오쩌둥 주석은 '10대 관계'라는 글에서 '두 개의 적극성이 하나의 적극성보다 옳다'며 지방의 적극성을 장려한 바 있다. 모든 기업을 중앙 정부가 쥐어잡으면 결국 기업은 죽게 된다. 1950년대 중국 곳곳에서 심각한 문제점이 드러났다.

당시 내 칼럼은 중앙 인민라디오 방송을 통해서도 전파됐다. 마침 당시 나는 상하이 시장에 당선된 왕다오한(王道涵)과 함께 선양(沈陽) 시찰을 진행하던 중이었는데, 방송을 통해 내 글을 알게 된 왕 동지는 은근한 찬성의 의사를 밝혔다.

◆ 광둥사람들이 다시 생선을 먹게 된 까닭: 상품경제 도입

1984년 중국에서는 상품경제 개념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해 7월 중국 공산당은 베이다이허(北戴河) 회의를 통해 '중공중앙의 경제체제 개혁에 관한 결정'의 요강을 마련하고, 10월 12차 3중전회에서 통과시켰다. 이때 중국 공산당 의제에 '계획적인 상품경제'라는 용어로 '상품경제'의 단어가 처음 등장하게 됐다.

 

전통적으로 중국 광둥 지역 사람들은 생선을 즐겨먹었다. 그러나 계획경제 시대 하에서 광둥 사람들이 생선을 먹기 힘들었는데, 그 이유는 생선값이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계획경제 아래서 상품의 가격을 정부가 정하다 보니, 양식업자들이 힘들게 생선을 키워도 이윤을 내기 힘들었다. 결국 양식업 종사자들이 열심히 생선을 키워낼 동기가 없어졌고, 시장에서 생선 공급량이 줄면서 가격이 비싸진 것이다.

훗날 중국 정부가 상품 가격 자유화를 도입하면서 양식업도 다시 활기를 되찾았고, 생선 공급량이 늘면서 가격도 안정화됐다.

광둥 사람들과 생선의 사례는 상품경제의 중요성을 여실하게 보여줬다. 상품경제를 도입한 지방은 경제가 발전했고, 그 지역 사람들은 다른 지역 주민들보다 돈을 많이 벌었다.

1984년 정부가 '중국중앙의 경제체제개혁에 관한 결정(이하 경제개혁 결정)' 초안을 마련할 당시, 나는 '상품경제'의 단어를 '경제개혁 결정' 초안에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상품경제'가 자본주의 색채가 난다는 이유로 많은 동지들이 반대를 했다.

당시 내 직책은 국가경제체제개혁위원회 연구팀 팀장 겸 중국경제체제연구소 소장에 불과했고, 내 주장은 관철되기 힘들었다.

결국 1984년 9월 현재의 시위안호텔(西苑飯店)인 시위안여관에서 당대의 유명 학자들과 함께 토론회를 열었다. 나와 학자들은 열띤 토론 끝에 상품경제가 중국 경제개혁 이론의 핵심 돌파구라는 결론에 도달했고, 이러한 내용을 중앙 정부에 보고했다.

다행히 중앙 정책결정층의 영도 동지들은 상품경제의 중요성을 인정했고, 1984년 10월 20일 '상품경제'의 중요성을 담은 '경제개혁 결정' 문건이 발표됐다. 문건은 '상품경제의 발전은 사회경제 발전이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단계이며, 중국 경제현대화 실현을 위한 필요조건이다'라고 명시했다.

◆ '유고슬라비아를 배우자'  해외 개혁개방 경험 과감히 수용

당시 중국에선 사회주의 국가로 개혁에 먼저 나섰던 헝가리와 구 유고슬라비아 시찰이 유행이었다. 중앙 정부를 포함해 각 지방 정부, 기업과 학술 기관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헝가리와 유고슬라비아를 찾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찾았는지 당시 헝가리 사람들은 "우리 나라 소도 중국 사람들을 알아볼 정도"라는 우스갯 소리를 할 정도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찰단들의 연구 내용은 대동소이했다. 대부분 비슷한 내용의 시찰 결과 보고를 내놓았고, 시찰 보고는 다시 책상 속 서랍 속에 묵혀지기 일쑤였다.

국가체제개혁위원회 부주임이었던 나는 이러한 방식의 중복 시찰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국무원의 허가를 얻어 18명의 엘리트 청년을 이끌고 헝가리와 유고슬라비아로 떠났다. 당시 시찰단에 포함된 청년 엘리트들은 훗날 국무원 부총리에 오른 마카이(馬凱) 등 중국 지도부 인사가 됐다.

우리는 헝가리와 유고슬라비아에서 신구 체제교체 과정의 마찰과 모순, 발전 방향과 문제 해결 등을 연구했다. 이를 토대로 정부 지도층, 당 지도부, 학계 및 기업인 등과 100여 차례의 토론을 진행했고, 당시 남긴 좌담회 기록물은 30여만 자의 분량에 달했다.

1986년 6월 26일 나는 국무원에 '헝가리·유고슬라비아 시찰 보고서'와 '험난한 개혁에 대한 탐색'이라는 결과 보고서를 제출했다. 보고서는 개혁의 기본 이념과 개혁 과정에서 유의해야 할 여러 문제를 제시했고, 헝가리와 유고슬라비아의 경험을 통해 해결 방법을 고찰했다.

국무원과 국가 영도층은 중국의 개혁개방 과정에 적지 않은 경험적 교훈의 역할을 할 시찰 결과를 매우 중시하고 성과를 인정했다.

◆ 달걀조림과 미사일을 만드는 사람 수입 차이 나야: 노동에 따른 분배 노동시장 확립

 

1993년 11월 중국 개혁개방과 체제개혁 역사에 있어 중요한 성과가 탄생했다. 14대 3중전회에서 '중공중앙의 사회주의 시장 경제체제 문제에 관한 결정(이하 결정)'이 통과된 것이다.

'결정'에는 처음으로 '자본시장'과 '노동력 시장'이라는 용어가 언급됐다. 당시 중국의 사회주의 분위기 속에서 이 두 용어의 출현은 대단히 혁명적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나는 '결정'의 초안 작성에 참여했었다.

해방 이후 중국에서는 '자본'이라는 단어조차 입에 담을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본시장을 언급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애써 자본이라는 단어를 피하고자 '자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던 때였다.

그러나 1985년 나는 중국 사회과학원 산업경제연구소 소장이었던 장이웨이(蔣一葦)와 함께 '사회주의 경제 체제하에서 어떻게 자본 문제를 정확히 인식할 수 있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우리는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도 자본문제는 피할 수 없는 의제이고, 국가의 자금이 어떻게 국가의 자본으로 전환되는지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선, 국가와 시장의 관계를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1993년 11월 통과된 '결정'의 초고에는 '노동취업시장'이라는 문제가 제기됐다. 노동력 시장에 각종 장애가 많다는 것을 제기하기 위해서다. 나는 '노동취업시장'이 아닌 '노동력 시장'이라는 용어가 옳다고 주장했다.그러나 사람들은 노동력 시장이라는 표현을 쓰길 반대했다.

그들은 "사회주의는 바로 계획경제 체제다. 노동취업시장이라는 표현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나는 "노동 시장의 인정이 불가피하다. 중국은 전국적으로 통일되고 개방된 시장 체제를 수립하려고 한다. 노동력과 자본은 이를 위한 가장 핵심적인 요소다. 이 핵심 요소가 시장에 진입하지 못하면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는 설립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결정'의 초안에는 노동 시장과 자본의 관계를 인정하는 '노동력 시장'이라는 용어가 실리지 못하고 '노동취업시장'이라는 용어가 이를 대체했다.

1993년 11월 3일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결정'의 수정안에 대한 토론회가 열렸고, 당시 조장이던 원자바오(溫家寶) 전 총리가 발표를 담당했다. 나는 시장체계과 분과 조장으로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중앙상무위원회 회의에선 정치국 위원 누구도 개인의 의견을 발표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모두의 침묵 속에서 나는 내가 나서지 않으면 개혁의 핵심 이념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난 용기를 내 발언을 자처했고, '노동시장'의 중요성을 요목조목 나열했다.

"차예단(茶葉蛋 찻잎과 간장에 조린 달걀)을 만드는 사람이나 미사일을 만드는 사람이나 수입에 차이가 없는 이유는 노동시장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가격을 결정할 시장이 없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의 능력이 다르고, 경제에 대한 공헌도가 다르다. 이에 대한 수입은 응당 차이가 나야한다. 이를 위해선 노동시장 체제가 수립되야 한다"고 당시 나는 역설했다.

정부가 노동력을 전적으로 안배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시장 체제에 따라 노동 자원을 자연스럽게 분배해야 실업 문제도 제대로 해결할 수 있다. 중국은 통일·개방·경쟁·질서있는 시장 체제 수립을 추진하고 있다. 여기에 노동 시장이 빠진다면 시장 체제는 결코 설립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었다.

나의 발언을 경청한 총서기가 물었다. "동지가 언급한 노동 시장 개념을 사회가 용납할 수 있겠소?".난 중앙이 인정한다면 사회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답했다. 회의가 끝난 후 원자바오 당시 조장이 나를 찾았고, 나는 그에게 노동 시장에 관한 자료를 넘겼다. 원 조장은 이를 다시 총서기에게 전달했다. 결국 총서기는 노동 시장 개념을 인정했고, 14대 3중전회의 '결정'문에 노동시장의 용어가 포함됐다.

◆ 사회주의와 시장경제 체제의 결합 : 중국식 시장경제 탄생

14차 3중전회에서 중국은 '사회주의 시장 경제 체제 수립'의 목표를 제시했다. 문제는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보통 두 가지 해석이 존재한다.

사회주의 시장경제는 사회주의 체제 하의 시장경제로 반드시 '일반' 시장경제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

또 다른 해석은 이와 다르다. 사회주의 시장경제는 일반(보통)의 시장경제 규칙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나는 전자의 해석을 지지한다. 즉,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 역시 시장경제 질서를 준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1993년 11월 나는 '런민르바오'에 '중국경제의 혁신-계획경제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로'라는 글을 게재했다.

그 글에서는 나는 사회주의와 시장경제의 관계를 이렇게 정리했다.

시장경제란 시장이 사회 자원을 분배하는 경제 운영의 형식이자 방식이다. 사회주의 시장경제란 사회주의 체제 하의 시장경제다. 여기서 시장경제는 '일반'의 개념이고 사회주의는 '특수'한 조건이다.

일반적인 규칙은 인류가 오랜 시간의 경험과 탐색을 통해 도출해낸 공통의 가치와 이념이자 인류 문명의 결과다. 때문에 우리는 일반의 규칙을 중시하고 따라야 한다. 중국이 다른 나라와 조금 다른 것은 사회주의 체제를 따른다는 것인데, 이는 특수한 조건에 해당한다. 우리는 일반의 규칙을 제대로 이해하고 따르면서'사회주의'라는 특수의 조건을 융합해야 한다. 사회주의가 특수하다고 해서 일반의 규칙을 배척할 수는 없다.

22년이 지난 지금도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시장경제의 일반 규칙과 사회주의의 특수성은 대립해선 안되며 서로 결합돼야 한다.

일반의 규칙은 우리 일상과 도처에 존재한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다는 것은 일반적인 개념이다. 다만, 외국인은 서양 음식을 먹으며 중국 사람은 중식을 먹는 다는 것이 다르고 이것은 '특수'의 개념이다. 배가 고프면 당연히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어떤 음식을 먹을 것인지는 선택이며 특수의 문제다.

[뉴스핌 Newspim] 강소영 기자 (jsy@newspim.com)

[뉴스핌 베스트 기사]

사진
'갑질 의혹' 강선우 살린 까닭 [서울=뉴스핌] 이재창 정치전문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20일 이진숙 교육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지명을 철회하고 강선우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는 살리기로 했다. 장관 후보자들에 대한 도덕성 논란이 심각한 상황에서 낙마자 없이 넘어갈 수는 없다는 판단에 따라 상징적인 낙마자로 이 후보자를 선택한 것이다. 야당이 강력히 요구한 두 명 중 한 명을 낙마시킴으로써 야당의 체면을 세워주는 모양새를 취하는 동시에 독주한다는 부정적 이미지를 피하려 한 것이다. 이 대통령 입장에서는 이 후보자 낙마가 측근인 강 후보자에 비해 부담이 상대적으로 덜했다. 강 후보자가 낙마할 경우 현역 의원 낙마 1호라는 불명예를 안게 돼 의원직을 수행하기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다. 이 후보자 낙마로 강 후보자를 구제한 것이다. [서울=뉴스핌] 이길동 기자 =강선우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26일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마련된 마련된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로 출근하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2025.06.26 gdlee@newspim.com 이 대통령과 여권 핵심은 지난주 이미 한 명 낙마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우상호 정무수석이 "일부 후보자의 경우 청문회 이후에도 논란이 계속돼 여론이 악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낙마를 사실상 기정사실화한 것이다. 특히 주말 여야 원내대표를 만나 의견을 구한 것은 최소한 한 명의 낙마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야당 대표까지 만나고 모든 후보자를 밀어붙일 경우 독주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이 주장한 낙마자 제로는 이 대통령의 결단을 부각하기 위한 전술이었다. '낙마자는 없다'는 여당의 강경론에도 이 대통령이 지명 철회를 요구하는 야당과 민심을 수용하는 모양을 취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자진 사퇴가 아니라 지명 철회라는 강수는 야당의 요구를 수용하는 모양을 취한 것이다. [서울=뉴스핌] 정일구 기자 = 이진숙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후보자가 1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교육위원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2025.07.16 mironj19@newspim.com 관심은 낙마자가 한 명이냐, 아니면 두 명이냐였다. 두 후보자 모두 낙마 1순위였다. 한 명을 살리기 어려울 정도로 막상막하였다. 논문 표절과 자녀 불법 조기 유학 의혹이 불거진 데다 전문성도 결여돼 있다는 지적을 받은 이 후보자의 낙마는 사실상 결정된 상태였다. 여기에 강 후보자까지 포함시킬지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파상 공세를 취하는 야당이 문제가 아니었다. 두 후보자에 대해 진보색이 강한 시민 단체마저 낙마를 요구했다. 여론을 중시하는 이 대통령 입장에서는 곤혹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자칫 지지 세력이 등을 돌릴 수 있어서다. 이런 상황에서 이 후보자 낙마와 강 후보자 구제는 여당 기류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대통령실 주변에서 "이 후보자는 외부에서 추천했다"는 얘기가 흘러나온 것은 낙마자가 나올 경우 1순위는 이 후보자가 될 수 있음을 강하게 시사한 것이다. 낙마하더라도 부담이 덜할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당 분위기는 더 노골적이었다. 강 후보자에 대해서는 입단속이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 후보자에 대해서는 특별한 지침이 없었다고 한다. 이를 반영하듯 강 후보자에 대해서는 지난주 중반까지 여론이 싸늘했지만 그 이후 당 주변에서는 더 이상 얘기가 나오지 않았다. 이 후보자에 대해서는 달랐다. 김상욱 의원에 이어 강득구 의원이 공개적으로 이 후보자를 비판하며 거취를 거론했다. 강 의원은 "연구 윤리 위반, 반민주적 행정 이력, 전문성 부족 등은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중대 결격 사유"라고 말했다. 이 후보자 낙마로 분위기를 몰아가는 듯했다.   이 후보자는 논문 표절 문제가 컸지만 이재명 정부가 전면에 내세운 유능함도 보여주지 못한 게 결정적이었다. 여권이 갑질 논란이 심했던 강 후보자를 감싼 논리가 유능함이었다. 청문회 과정에서 유보 통합 등 교육 정책과 관련된 기본적인 사항조차 숙지하지 못해 전문성에 심각한 의구심이 제기됐다. 여당 의원들조차 "어떻게 그런 것도 대답을 하지 못하느냐"는 비판이 나올 정도였다. 우상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이날 오후 용산 대통령실에서 브리핑을 통해 인사청문회를 거쳤지만 임명이 안 된 11명의 장관 후보자 중 지명 철회는 이 후보자 한 명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 강 후보자는 임명 절차를 밟을 것임을 시사했다. 강 후보자의 인사청문경과보고서가 채택되지 않은 상태에서 임명을 강행하려면 절차상 국회에 보고서 재송부를 요청해야 하는 만큼 이 대통령은 이른 시일 내에 관련 조치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이 대통령이 강 후보자를 임명한다고 해도 부담은 남는다. 강 후보자의 사퇴를 요구한 상당수 민주당 보좌진들과 정서적으로 등을 지게 될 수밖에 없다. 강 후보자 사퇴를 요구한 시민단체의 입장도 부담이다. 야당은 여론을 돌리기 위한 파상 공세에 나서고 있다. 강 후보자도 갑질 장관이라는 낙인이 찍힌 상태에서 업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향후 여론 추이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leejc@newspim.com 2025-07-21 06:45
사진
안세영,왕즈이 꺾고 日오픈 우승 [서울=뉴스핌] 장환수 스포츠전문기자= '배드민턴 여제' 안세영(삼성생명)이 시즌 6승을 달성했다. 세계랭킹 1위 안세영은 20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세계배드민턴연맹(BWF) 월드투어 슈퍼 750 일본오픈 여자 단식 결승에서 왕즈이(2위·중국)를 42분 만에 2-0(21-12 21-10)으로 완파했다. [서울=뉴스핌] 장환수 스포츠전문기자= 안세영(왼쪽)이 20일 일본오픈 여자 단식 결승에서 우승한 뒤 중국의 왕즈이와 시상대에 올랐다. [사진=BWF 동영상 캡처] 2025.07.20 zangpabo@newspim.com 안세영은 이번 대회 5경기에서 한 게임도 내주지 않는 무결점 플레이를 펼쳤다. 이로써 안세영은 말레이시아오픈, 인도오픈, 오를레앙 마스터스, 전영오픈, 인도네시아오픈에 이어 일본오픈까지 올해에만 6번째 우승컵을 안았다. 지난해 파리 올림픽 금메달을 딴 뒤 부상으로 불참한 일본오픈에선 2023년 이후 2년만에 정상을 탈환했다. 안세영은 왕즈이와 상대 전적에서도 13승 4패로 격차를 벌렸다. 특히 올해는 말레이시아오픈, 전영오픈, 인도네시아오픈에 이어 일본오픈에서 왕즈이를 잇달아 꺾었다. [서울=뉴스핌] 장환수 스포츠전문기자= 안세영이 20일 왕즈이와 일본오픈 여자 단식 결승에서 마지막 게임 포인트를 올리고 있다. [사진=BWF 동영상 캡처] 2025.07.20 zangpabo@newspim.com 1게임 10-10으로 맞선 게 유일한 접전이었다. 안세영은 이후 8득점을 내리 따내며 승기를 잡았다. 2게임에서도 두 번 연속 5득점 하며 손쉽게 왕즈이를 꺾었다. 안세영은 22일부터 27일까지 열리는 중국오픈에서 시즌 7관왕에 도전한다. 남자복식 서승재-김원호 조(3위·이상 삼성생명)도 세계랭킹 1위인 말레이시아의 옹유신-테오예이 조를 2-0(21-16 21-17)으로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했다. 서승재와 김원호는 올해 말레이시아오픈, 독일오픈, 전영오픈, 인도네시아오픈에 이어 5번째 우승을 합작했다. zangpabo@newspim.com 2025-07-20 17:37
안다쇼핑
Top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