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 살고 사랑에 살고(43)
1926년 8월 4일 오전 4시경, 시모노세키를 떠나 부산으로 향하던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德壽丸) 선상. 배가 쓰시마 섬 옆을 지날 무렵 갑판에 있던 두 남녀가 서로 껴안은 채 갑자기 바다에 몸을 던졌다.
즉시 배를 멈추고 부근을 수색했으나 종적을 찾지 못했다. 승객명부에 남자는 김수산(30세), 여자는 윤수선(30세)이라고 씌어 있었지만 본명이 아닌 가명이었다. 나중에 남자의 본명은 김우진(金祐鎭), 여자는 윤심덕(尹心悳)으로 밝혀졌다.
당시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로 알려져 유명세를 탔던 윤심덕과, 전라도 거부의 아들로 신극 운동에 앞장섰던 김우진이 현해탄에서 동반 자살했다는 소식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들의 유품은 윤심덕이 남긴 현금 140원과 장신구, 김우진이 남긴 현금 20원과 금시계가 전부였다.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객실담당 승선원에게 남긴 메시지에는 돈 5전과 함께 자신들의 유품을 각자의 집으로 보내달라는 부탁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의 죽음에 대해 양쪽 가족 모두 그들이 자살을 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한때는 그들이 물에 빠지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죽음을 가장한 다음 이탈리아로 가서 악기점을 하면서 숨어산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의 여러 가지 정황상 둘의 동반자살은 확실시되었다. 1897년생 동갑내기였던 두 사람의 동반자살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번민하던 두 남녀의 극단적 결말로 정리되었다.
윤심덕과 김우진의 동반자살에는 구구한 억측과 소문, 언론의 가십성 이야기 만들기가 뒤따랐다. 그만큼 윤심덕과 김우진이 당대 유명인들이었고 동반자살이라는 죽음이 너무 자극적이었다. 김우진이 처자를 둔 유부남이었고 윤심덕은 미혼이었다는 점에서 더욱더 입방아의 소재가 되었던 것이다. 특히 김우진보다 더 유명세를 타고 있던 윤심덕에 관심이 집중되었고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갔다. 이는 당시 윤심덕이 유부남과의 사랑에 울다가 자살한 이름 없는 여인이 아니라, 신여성이자 꽤 이름이 알려진 서양음악 성악가였다는 사실이 이런 현상을 더 부추겼다.
신여성은 20세기 초반 지식인 여성들을 일컬을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192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우리나라의 신여성은 나혜석을 필두로 한 김일엽, 김명순 등의 여성 작가들과 음악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윤심덕이 대표적이다. 그중에서 윤심덕은 남다른 생애와 더불어 의문의 죽음으로 인해 당대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되어 왔다.
‘사의 찬미’ 레코드 표지 <사진=이철환> |
윤심덕(尹心悳, 1897~1926)은 평양에서 4남매 가운데 둘째 딸로 태어났고,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진남포로 이주하여 자랐다. 아버지 윤호병과 어머니 김씨는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도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 신교육을 받도록 했다. 윤심덕은 숭의여학교를, 언니와 여동생은 이화학당을, 남동생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윤심덕의 형제들은 모두 음악에 재능이 있었다. 여동생 윤성덕은 잘나가는 피아니스트였고 남동생 윤기성은 바리톤 성악가였다.
윤심덕은 처음에는 의사나 교사가 되려고 했다. 그래서 평양의 숭의여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진학했고 졸업 후 잠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이후 음악 공부에 뜻을 두고 조선총독부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다. 거기서 동경음악학교를 졸업했는데, 윤심덕은 동경음악학교 최초의 조선인 학생이었다.
동경 유학시절, 윤심덕은 활달한 성격이라 남자유학생들과 잘 어울렸다. 키가 크고 목이 긴 서구형 외모에 자신감이 넘치는 성격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녀는 한국 남자유학생들과 어울리며 그들 모두의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홍난파, 채동선 등이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으며 박정식이란 유학생은 윤심덕에게 구애했다가 거절당하고 상사병에 걸려 정신이상에까지 이르렀다. 그녀의 주변을 의식하지 않는 활달하고 대범한 행동은 오해에서 비롯된 스캔들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윤심덕은 1921년 재일본 유학생들이 결성한 순회극단 동우회 활동에 참여하면서 김우진을 처음 만나게 된다. 김우진은 당시 극작가이며 와세다 대학 영문과 학생이었는데 윤심덕과 정반대로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을 지닌 청년이었다. 그런데 당시 김우진은 이미 부인과 자녀가 있는 유부남이었다.
상반된 성격과 처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 사랑의 감정을 갖게 되고 깊은 관계로 발전한다. 그러던 중 고국으로 돌아온 그들은 각자의 자리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윤심덕은 성악가로, 김우진은 아내와 자식이 기다리는 자신의 가정으로. 그런 가운데서도 그들은 서로를 애타게 그리워했지만 둘의 사랑을 이루기에는 현실은 녹록하지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이 세상에서는 자신들의 사랑이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다음세상을 기약하면서 극단적인 행동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윤심덕은 1922년 동경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조교생활 1년을 마친 뒤, 1923년 6월 귀국했다. 귀국하자마자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독창회를 가짐으로써 그녀는 우리나라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로 데뷔하였다. 이때부터 서울에서 열리는 모든 음악회 프로그램에는 항상 윤심덕을 넣을 만큼 일약 스타가 되었다. 서양음악이 수입된 지 얼마 되지 않은데다가 제대로 성악을 공부한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에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그녀의 풍부한 성량과 당당한 용모 또한 대중을 휘어잡았다.
그러나 당시에는 서양고전음악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강사생활과 함께 경성방송국에 출연하여 세미클래식으로 방향을 선회하는 시도도 해보았다. 한때 극단 토월회(土月會) 주연배우로 무대에 서기도 했으나, 그녀의 큰 키는 작은 무대에 어울리지 않았고 연기력도 부족해 실패하였다. 대형 오페라가수를 꿈꾸었던 그녀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결국 대중가요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꿈꾸었던 문화예술이 풍성한 나라를 만들기에는 이 땅의 현실이 너무 낙후되어 있었고, 완고한 유교적인 인습 또한 그녀를 너무 힘들게 만들었다.
연극배우로서의 길마저 실패로 끝나게 되자 윤심덕은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때마침 1926년 7월 윤심덕은 일본 오사카의 닛토(日東) 레코드회사에서 음반취입을 의뢰받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레코드 취입을 다 마친 8월 1일, 윤심덕은 음반사 사장에게 특별히 한 곡을 더 녹음하고 싶다고 청했다. 그 곡은 루마니아 작곡가 요시프 이바노비치의 〈다뉴브 강의 잔물결〉에 윤심덕이 한국어 가사를 붙여 부른 것으로 반주는 동생 윤성덕이 맡았다. 노래 제목은 《사의 찬미(死의 讚美)》였다.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苦海)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후렴)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설움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
(후렴)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설움
허영에 빠져 날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네가 아느냐
세상의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에 모두 다 없도다
(후렴)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설움
잘 살고 못 되고 찰나의 것이니
흉흉한 암초는 가까워 오도다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
돈도 명예도 내 님도 다 싫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그녀의 연인 김우진도 고향에서의 삶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사사건건 막으며 인정해주지 않는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그래서 김우진은 가출을 감행했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에서 살고 있었다.
일본 오사카에서 레코드 취입을 마친 윤심덕은 김우진에게 자신이 있는 오사카로 오라고 전보를 띄웠다. 오지 않으면 자살하겠다는 협박성 글이었다. 동경에서 전보를 받은 김우진은 부랴부랴 윤심덕을 찾아갔다. 며칠 후인 1926년 8월 1일 윤심덕과 김우진은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그것이 그들이 세상에 모습을 보인 마지막이었다. 그들은 배에 얼마간의 돈과 유품을 남긴 채 세상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윤심덕과 김우진의 충격적인 동반자살 이후 윤심덕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레코드는 불티나게 팔렸다. 당시로서는 경이적인 숫자 10만 장을 기록했다. 사람들은 《사의 찬미》가 윤심덕의 마지막 유언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남긴 《사의 찬미》는 오늘까지 널리 불리고 있다.
윤심덕은 우리나라의 여성 선각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1920년대 신여성들은 당시 대부분의 여성들이 누리지 못한 고등교육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러기에 그녀들에게 비치는 스포트라이트는 그 빛이 너무 강렬했다. 너무 지나친 관심과 이를 뒷받침 해주지 못하는 사회적 미성숙은 윤심덕과 같은 신여성들의 숨통을 죄었다.
신여성들은 나름의 해방구를 찾았다. 바로 봉건적 구습에 대한 저항과 여성해방론에 심취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당시 조국이 처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보다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는 데는 큰 관심이 없이 자신의 능력과 학식을 개인의 안일과 자기 과시에만 활용하려 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윤심덕 또한 다르지 않았다. 뛰어난 재능과 학식을 가지고 있었으나 선택받은 선각자로서의 자긍심이나 책임감 없이 개인 문제에만 천착하여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철환 객원 편집위원 mofelee@hanmail.net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전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문화와 경제의 행복한 만남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