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황수정 기자] "나에게는 또 하나의 딸이 있다"고 외치지만 참 허망하다. 첫째 딸에게 배신당하고 둘째 딸을 찾아가지만 문전박대를 당한다. 한 명의 딸이 더 있지만, 과거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멀리 내쳐진 상태. 거짓에 현혹된 어리석은 이는 그렇게 자신을 잃어간다.
연극 '리어왕'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로, 리어왕의 인간적인 면모와 어리석음이 불러온 비극을 담는다. 그동안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국내에서도 다양한 창작공연과 각색이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이번 공연은 오리지널 텍스트를 그대로 살린 정통 서사극으로, 제작사 도토리컴퍼니 이종섭 대표가 "기획 단계도 어려웠고, 준비 단계도 어려웠다"고 말할 정도로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야만 했다.
'리어왕'은 온갖 감언이설로 사랑을 표현한 첫째 '거너릴'과 둘째 '리건'에게는 국토를 절반씩 나눠주고, "(자신의 사랑을 표현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답한 막내 '코델리아'는 추방한다. 이후 두 딸의 냉대에 늙은 리어왕은 황야를 헤매고 미쳐간다. 뒤늦게 사실을 안 코델리아가 군을 이끌고 찾아오지만 전쟁에 지며 죽게 된다. 남편이 아닌 에드먼드를 두고 치정싸움을 벌이던 거너릴은 리건을 죽이고 자살한다. 막내딸의 죽음에 오열하던 리어왕 역시 죽음을 맞이하며 비극으로 끝난다.
진실한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던, 거짓과 화려한 언변에 현혹되어 버렸던, 간신의 말에 충신을 쫓아내버린 리어왕의 어리석음, 가족보다 권력과 사랑을 원했던 거너릴과 리건의 탐욕, 신분 상승을 위해 형과 아비를 배신한 에드먼드 등 수백년이 지난 고전의 인물들이지만 현대 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군상들이다. 뉴스에 나오는 현대판 고려장, 치정으로 인한 살인, 상속을 둘러싼 법정싸움들과 별반 다를게 없다. 때문에 오리지널 버전임에도 몰입도가 강하다.
물론 고전의 언어는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익숙해진다. 오리지널 텍스트를 최대한 살렸기 때문에 아름다운 대사도 맛볼 수 있다. 또 리어왕을 따라다니는 어릿광대 '바보'와 살아남기 위해 '불쌍한 톰'을 연기하는 '에드거'의 코믹함과 촌철살인이 매우 진중하게 이어지는 극을 환기시키면서도 관객에게 생각할거리를 던져준다.
극의 하이라이트인 폭풍우 장면은 앞선 다른 공연들과 달리 아무 것도 없어서 오히려 대사에 몰입하게 만든다. 음향효과만으로 폭풍우를 나타내기에 소리치고 울부짖는 리어왕에게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으며, 때문에 그 감정이 더욱 진하고 무겁게 다가온다. 무대 자체가 1, 2층을 구분하는 정도로 매우 심플하기 때문에 오히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배우들의 연기는 극의 메시지를 더욱 잘 느끼게 해준다. 특히 리어왕을 맡은 배우 안석환의 경우, 근엄한 왕부터 고난을 겪다 미쳐버리기까지 다채로운 연기를 펼치는데 매우 인상적이다. 손병호의 리어왕이 좀 더 강하고 카리스마가 있다면, 안석환의 리어왕은 훨씬 인간적인 면모가 강조된다. 이미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 왕을 두 번이나(리처드 3세, 맥베스) 연기했기에 안정적이다. 그는 두 주먹을 쥐고 발을 동동 구르며 귀여움까지 가미해 시선을 사로잡기도 한다.
리어왕만큼이나 인상적인 캐릭터는 손경원이 연기하는 글러스터 백작이다. 그는 어리석음으로 인해 아들과 두 눈을 잃는데, 자신의 과오를 받아들이고 그 죗값을 달게 받아들이는 우직함이 2막의 주인공처럼 느껴질 정도다. 악독한 두 딸 거너릴 역의 강경헌은 말할 것도 없고, 처음 연극 무대에 오른 리건 역의 이태임은 예상보다 훨씬 안정적으로 연기를 펼친다. 다만 큰 극장에 비해 약한 발성은 조금 아쉽다.
35명의 배우와 50여 명의 스태프가 3년간 준비한 만큼 시작부터 끝까지 열정이 가득하다. 다만 인터미션을 포함해 170분이라는 긴 시간은 관객에게 장점이 될 수도, 단점이 될 수도 있겠다. 연극 '리어왕'은 오는 26일까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에서 공연된다.
[뉴스핌 Newspim] 황수정 기자(hsj1211@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