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마지막 사법 시험 제 3차 면접 진행
47년 조선변호사시험, 63년부터 사법시험
2007년 로스쿨 도입, 사시 점진 폐지 결정
[뉴스핌=황유미 기자] 법조인 배출의 유일한 관문이었던 사법시험이 2일 제59회 사법시험 3차 면접 2일차 일정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법무부에 따르면 지난 1일과 2일 이틀간 마지막 사법시험 3차 면접 일정이 진행됐다. 1일에 진행된 면접은 2차 합격자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일반 면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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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치러진 제14회 고등고시 사법과. [국가기록원] |
2일은 개별 통보를 받은 대상자들에 대한 심층면접이 오전과 오후로 나눠 진행됐다. 이날을 끝으로 모든 사법시험의 일정이 마무리됐다. 마지막 사법시험의 최종 합격자는 오는 10일 발표될 예정이다.
사법시험의 역사는 70년 전 194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변호사 시험'이 시초다. 1950년 '사법관시보의 임명수습 및 고시규정'에 따라 '고등고시 사법과'로 이름을 바꿔 진행됐다.
사법시험이라는 현재의 이름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63년 대통령령으로 '사법시험령'이 공포되면서부터다. 그해 제1회 사법시험 합격자는 41명이었다. 사법시험은 처음에는 합격자 정원이 없는 상태에서 절대 평가 방식으로 선발됐다.
절대 평가 방식때문에 초창기 합격인원은 적었다. 10명 미만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바늘구멍'이라는 비판이 일었고 1970년부터는 합격정원제가 도입돼 매년 60~80명을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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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회 사법시험 2차시험이 열린 지난 6월 21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백양관에 마련된 시험장으로 고시생들이 들어가고 있다. /김학선 기자 yooksa@ |
전두환 정권시절인 1981년부터는 사법시험 합격정원이 300명으로 늘어났다. 2000년대 초반부터는 사시 합격자 1000명 시대가 도래하기도 했다.
올해까지 59번의 사법시험이 치러지는 동안 70만8000여명이 응시, 그 가운데 2만711명이 법조인의 꿈을 이뤘다.
사법시험은 출신이나 학력, 성별 등에 상관 없이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응시가 가능하고 오로지 점수로만 평가된다는 점에서 '성공의 사다리' 역할을 했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표현이 가장 어울렸던 시험 중의 하나로 꼽힌다.
'인재 등용문' 사법시험 '고학생(苦學生)' 신화의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노 전 대통령은 부산상고 출신으로 생활 형편이 어려워 건설현장 공사장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면서 1975년 제17회 사시에 합격해 법조인이 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조재연 대법관 역시 가난을 딛고 성공신화를 만든 인물 중 하나다. 서울 덕수상고를 나와 은행을 다니다 법조인이 됐다. 조 대법관은 낮에는 일을 하고 야간대학을 다니며 시험 준비를 하다 1980년 22회 시험에 수석 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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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2일 오전 서울 성균관대학교 600주년 기념관 조병두국제홀에서 열린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개원식 및 입학식에서 서정돈 총장이 축사를 하고 있다. [뉴시스] |
그러나 우수 인력이 '고시낭인'으로 전락하는 사회적 자원 편중 현상과 더불어 사법연수원의 기수문화가 전관예우 등 법조비리의 근원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이에 노무현 정부는 2007년 로스쿨 도입과 더불어 사법시험 점진적 폐지를 결정했다. 2009년 전국 25개 로스쿨(3년제)가 문을 열었다. 2015년 법무부는 사법시험 폐지를 2017년에서 2021년까지 유예한다는 입장을 밝혔으나 로스쿨 등의 반발로 취소됐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사법시험 폐지를 두고 진통은 계속되고 있다.
사법시험 준비생 모임은 지난달 7일 사법시험을 폐지하도록 규정한 변호사시험법 부칙 제2조와 제4조에 대한 헌법소원을 청구한데 이어 30일에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해당 법률의 효력을 정지시킬 것을 요구하는 효력정지 가처분을 신청하기도 했다.
[뉴스핌 Newspim] 황유미 기자 (hume@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