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장주연 기자] “내가 누군지 잊어버리기 전에, 아니 내가 누군지 잊어버리기 위해”
배우 설경구(49)가 신작 ‘살인자의 기억법’을 들고 극장가를 찾았다. 6일 개봉한 이 영화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은퇴한 연쇄살인범 앞에 새로운 살인범이 등장하고, 그의 잊혔던 살인습관이 되살아나면서 벌어지는 범죄 스릴러다. 극중 설경구는 기억을 잃어가는 연쇄살인범 병수를 연기했다.
“고를 때는 고민이 없었죠. 감독님이 만나서 설명해주고 시나리오를 줬어요. 가면서 바로 해보겠다고 했죠. 오히려 이걸 하자고 해줘서 고마웠어요. 사실 그즈음 제 연기에 대해서 힘들었거든요. 수년간 참 편하게, 공허하게 있는 캐릭터 써먹어 간 거죠. 이대로 계속하면 사라지겠다 싶었던 찰나에 이 책을 받았어요. 이건 쉽게 써먹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부분, 받아야 할 부분이 많았죠. 그래서 고마웠어요.”
알려졌다시피 영화는 김영하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하지만 중반부에 들어서면서 소설과 완전히 다른 색깔을 띤다. 병수 위주로 차이점 몇 개를 꼽자면 이렇다. 단순 쾌감이 목적이던 그에게 아픈 사연을 입혀 살인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동시에 은희(설현)와의 관계에도 변화를 줘 부성애를 부각했다. 어떻게 보면 소설보다 확실히 선명하고 명확해졌다.
“소설을 그대로 따왔다면 궁지에 몰렸을 거예요. 어디 갇힌 느낌이었겠죠. 관객들 입장에서도 오히려 반감이 생겼을 거예요. 보는 재미도 덜했을 거고요. 다행히 영화는 병수에게 조금 풀어줬죠. 모두를 설득할 수는 없겠지만, 살인에 약간의 정당성이 부여됐어요. 은희와의 관계도 자세하게 풀어졌고, 폭넓진 않아도 오달수 씨와의 관계도 생겼죠. 그런 지점에서 소설보다 여지를 많이 줘서 다행이었어요. 소설고 같았다면 아마 끔찍했을 거예요(웃음).”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사실 변화를 줬다고 해도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치매에 걸린 연쇄살인범이라니. 설경구 필모그래피는 물론, 충무로에서도 전무후무한 캐릭터다.
“이상한 강박이 생기더라고요. 무슨 고민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잠을 못자는 거예요. 생각이 생각을 무는 거죠. 계속 내일을 걱정하고. 하루하루 끼니 해결하는 기분이었어요. 감독님께 제일 많이 했던 말도 ‘어떻게 해야 해요?’였죠. 대답을 듣고도 ‘아, 그렇구나’가 아니고 ‘일단 한 번 해볼게요’였어요. 병수가 일상적인 인물은 아닌데 그렇다고 또 일상을 안 사는 사람도 아니잖아요. 운전도 하고 대화도 되는데 근데 또 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는 거죠.”
하지만 설경구는 연기보다 더 힘들었던 게 있었다고 털어놨다. 바로 외적인 모습이다. 극중 병수는 60대(소설에서는 70대, 시나리오에서는 50대 후반이었다). 실제 설경구보다 많은 나이다. 특수 분장은 한계가 있다는 걸 몸소 경험한 설경구는 스스로 늙기를 자처했다.
“진짜 신경 쓰였어요. 언론 시사회 때도 ‘저 모습으로 설득될까? 가짜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계속 걱정했죠. 정말 사소한 부분까지 거슬리더라고요. 정작 남들은 보지 않을 부분, 예를 들면 일정하지 않은 잡티까지 걱정한 거죠. 살 같은 경우는 원래 정직해요. 한 만큼 빠지죠(웃음). 다만 누군가 ‘얼굴 좋아졌다’고 하면 괜히 긴장하고 상처받고 그랬어요. 하하. 머리는 여러 번의 테스트 끝에 뒷머리만 가발을 썼고요. 정말 외형을 위해 많은 준비를 했죠.”
설경구는 이렇게 캐릭터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힘들었지만, 그만큼 재밌었다고 했다. 그러고는 앞서 언급했던 슬럼프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수년간 정체한 채 살았어요. ‘아, 하나 또 끝났네’라는 마음으로 작품할 때도 있었죠. 그러다 보니 점점 고민이 생겼고 위기감이 들었죠. 이러다 훅 가겠더라고요(웃음). 그때 이걸 만난 거죠. 처절함이 생겼어요. 감독님과 이야기하면서는 재밌겠다 싶었죠. 살도 옛날 같으면 그냥 찌고 빼면 끝이었을 거예요. 근데 병수가 어떻게 살아서 이 얼굴이 됐을까 궁금했죠. 그러니 재밌는 거예요. 또 저 혼자가 아닌 스태프들이 다 같이 만들어주는 거니까. 그렇게 이걸 찍고 만난 작품이 ‘불한당’이었는데 덕분에 그것도 즐겁게 할 수 있었죠.”
‘불한당’은 그의 전작이다. 지난 5월 개봉 당시 변성현 감독의 부적절한 발언으로 약간의 잡음이 있었지만, 머지않아 영화 자체가 재평가받으며 화제를 모았다. 이례적으로 ‘불한당원’이라는 열성 팬클럽까지 만들어냈다. 당연히 설경구의 연기 역시 집중 조명됐다. 이 과정에서 그의 팬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꾸꾸, 울꾸, 설탕 등 낯간지러운 애칭도 생겼다. 그야말로 제2의 전성기다.
“‘우상’ 촬영 중에 막내 스태프한테 스틸을 보여줬어요. ‘불한당’했던 친구거든요. 그랬더니 ‘이 영화 제발 개봉하지 말아 주세요, 개봉하면 절대 안돼요’라고 하더라고요. 이 늙은 얼굴은 너무 슬프다면서(웃음). 그렇게 다들 응원을 많이 해주세요. 보러 오시기도 하고. 당연히 책임감이 생기죠.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고요. 하지만 매번 ‘불한당’ 같은 모습으로만 나타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도 실망하지 않는 작품으로 찾아뵙고 싶고, 좋아해 주셨으면 해요.”
[뉴스핌 Newspim] 장주연 기자 (jjy333jjy@newspim.com) <사진=쇼박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