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글 장주연 기자·사진 이형석 기자] “나는 박열을 알고 있다. 박열을 사랑하고 있다. 그가 갖고 있는 모든 과실과 모든 결점을 넘어 나는 그를 사랑한다. 나는 지금 그가 나에게 저지른 모든 과오를 무조건 받아들인다. (중략) 그리고 박열에게 말해 두고자 한다. 설령 재판관의 선고가 우리 두 사람을 나눠놓는다 해도 나는 결코 당신을 혼자 죽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박열의 일생에서 가네코 후미코를 뗄 수 없듯, 영화 ‘박열’을 이야기하며 그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섬세하고 풍부한 표현력으로 관객의 뇌리에 가네코 후미코를 각인시킨 사람. 배우 최희서(30)다. 최희서는 지난 28일 개봉한 ‘박열’에서 박열의 동지이자 연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 제국의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를 열연했다.
“가장 먼저 자서전을 읽었어요. 하지만 자서전을 보면서 일부만 출판됐다고 생각했죠. 아무래도 검열이 심했던 시대라 박열과 만난 후 무정부주의자로 활동한 내용이 나와 있지 않았거든요. 다행히 다른 실존인물보다 자료가 많은 편이었죠. 그래서 읽다 보니 더 알고 싶은 게 많아졌고요. 그래서 재판 기록도 다 살펴봤어요. 다만 그럼에도 불구, 사적인 내용이나 마음은 알 수 없었죠. 답답하기도 했고 이 방향이 맞나 싶기도 했어요. 그럴 땐 감독님과 소통하면서 후미코를 연구하고 만들어갔죠.”
이준익 감독은 그런 최희서에게 다양한 캐릭터를 추천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길버트 그레이프’(1993)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어니 그레이프라든가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1989)에서 제니퍼 제이슨 리가 연기한 트랄라 등이다.
“트랄라는 몸을 파는 여자예요. 하지만 순진하면서도 개구지고 사랑스러운 면이 있죠. 추천해준 캐릭터들이 모두 그랬어요. 예측불허의 감정, 아이 같은 표현방식이 있었죠. 그래서 기뻤고요. 사실 자서전만 보면 후미코는 우울하고 어두운 캐릭터 같잖아요. 하지만 감독님이 원한 건 그게 아니었죠. 쉽게 상처받을 것 같고 가녀리지만 그걸 커버하는 패기, 강인함이 있어요. 저 역시 그런 모습을 원했고요. 슬프지만 웃을 수 있는, 강인한 듯하지만 박열 이야기에 눈물을 흘리는….”
최희서는 후미코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경북 문경에 위치한 후미코의 묘소에도 수차례 다녀왔다. 동료 박정민의 조언이 도움이 됐다. 영화 ‘동주’(2016)에서 송몽규를 열연한 그는 촬영 당시 북간도에 있는 송몽규 묘지를 다녀왔다. 그 기억은 촬영 내내 박정민에게 힘이 됐다.
“캐스팅되자마자 부모님과 문경에 갔어요. 하루빨리 육체적,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고 싶었죠. 확실히 느낌이 다르더라고요. 애잔했고, 직접 소통하는 듯한 기분이었죠. 크랭크인 전에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또 갔고요. 정말 큰 힘을 얻었어요. 촬영하면서 힘들거나 내가 없어진 기분일 때 그때를 떠올리면 정신이 들었죠. 내가 힘들다고 함부로 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버팀목이 된 거죠.”
이렇게 온 마음을 쏟아서였을 거다. 그가 마지막 신에서 배우 최희서가 아닌, 후미코 자체가 될 수 있었던 건. 사실 최희서는 마지막 법정 신을 일부러 준비하지 않았다. 매 신 철저하게 준비하고 공부하는 그답지 않은 행동. 그러나 처음부터 이 장면만은 계산하고 싶지 않았다.
“그 글은 의식의 흐름대로 쓴 듯했어요. 논리적이긴 했지만, 계산하고 쓴 게 아니라 그대로 뱉은 느낌이었죠. 그래서 저 또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지난 6주간 후미코로 살아오면서 느꼈던 걸 그대로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고요. 물론 모험이었고 용기가 필요했어요. 하지만 내가 느낀 감정, 진심을 느꼈으면 싶었죠.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연기한 부분이에요. 컷 소리에 이제훈 씨가 눈물을 쏟은 걸 보면서 ‘다행이다, 마음이 잘 전달됐구나’ 했죠(웃음).”
개봉 전부터 지금까지, 홍보 활동을 하면서 그가 제일 자주 들은 말은 역시나 ‘일본어를 어떻게 그렇게 잘하느냐’이다. 이미 알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유년시절을 일본에서 보낸 최희서는 수준급 일본어 실력을 자랑한다. ‘동주’에 이어 이번에도 최희서는 영화 속 한국어 대사를 일본어로 직접 번역했다.
“고증에 있는 것, 심문 과정은 그대로 썼어요. 다만 단 한 부분만 조금 더 붙였죠. 천황과 황태자는 악마적 권력이라는 짧은 대사에 후미코의 평등사상을 더 넣었죠. 제가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일 같아요(웃음). 후미코가 박열을 쫓아서 함께 아나키스트로 사는 이유가 보이지 않았는데 그 대사로 하여금 권력에 저항하는 후미코의 자세가 정확히 묘사되죠. 물론 힘든 과정이었어요. 정말 머리카락이 다 빠지는 듯했거든요. 하하.”
최희서는 “제가 좀 피곤한 스타일”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런 그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번졌다. 최선을 다한 자만이, 후회하지 않는 자만이 지을 수 있는.
“앞으로도 이러겠죠. 애정을 갖고 선택한 작품이니 할 일이 있다면 기꺼이 해야죠. 그래야 스스로 아쉬움도 없고요. 또 고생하면서 배우는 것도 많아요. 특히 이번엔 이런 ‘의미 있는’ 작품을 찍어야겠다는 생각도 많이 했죠. 사실 예전에는 어떤 배우의 길을 걷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저 좋은 시나리오와 캐릭터를 좋은 스태프와 감독님과 함께하고 싶다는 게 다였죠. 하지만 이번에 알았어요. 비록 머리를 싸매고 잠을 못자도(웃음) 이건 정말 보람 있는 일이라는 걸요.”
[뉴스핌 Newspim] 글 장주연 기자 (jjy333jjy@newspim.com)·사진 이형석 기자 (leehs@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