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최신뉴스 GAM
KYD 디데이
중국 종목

속보

더보기

[중국기업] 뉴밀레니엄 중국 IT 신경제의 태동을 이끈 바이두 (上)

기사입력 : 2017년02월24일 17:09

최종수정 : 2017년02월28일 11:08

※ 본문 글자 크기 조정

  • 더 작게
  • 작게
  • 보통
  • 크게
  • 더 크게

※ 번역할 언어 선택

[뉴스핌=황세원 기자] "중국 인터넷의 발전사는 곧 바이두의 성장사다", "중국 인터넷의 모든 길은 바이두로 통한다." ‘중국판 구글’ 로 불리는 중국 최대 검색엔진 바이두가 인터넷 분야에서 이룬 업적을 대변하는 말들이다.

바이두는 지난 2000년에 설립, 올해로 17주년이 됐다. 중국 내 검색엔진 시장점유율이 80%에 육박하는 바이두는 SNS와 전자상거래 O2O 인공지능(AI)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신기술 트렌드와 뉴비즈니스를 주도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1990년대 후반부터 인터넷 IT 신기술기업이 대거 출현했으나 그 중에서도 바이두는 단연 중국 인터넷 발전사의 산증인으로 꼽힌다. 중국 IT 공룡 BAT(바이두, 알리바바, 텐센트)의 맏형이자 중국 인터넷발전 ‘축소판’ 바이두의 경영사를 통해 중국 신기술발전의 현주소와 미래발전방향을 상, 하로 나눠 살펴본다.

◆ 중국 검색엔진시장 장악, 글로벌 IT공룡으로 부상

오늘날 중국은 명실상부 글로벌 최대 인터넷대국으로 부상했지만 불과 20년전만해도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90년대 전세계적으로 인터넷 열풍이 일기 시작한 가운데 중국은 1995년 처음으로 인터넷기술을 도입했다.

이 시기 미국에서 중국 인터넷시장의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감지한 리옌훙(李彥宏) 바이두 창업주는 중국에 적합한 검색엔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1999년 중국으로 돌아와 바이두를 설립했다. 당시 리옌훙 회장은 바이두 검색엔진의 핵심기술 ‘랭크덱스(RankDex)’로 미국에서 특허를 받는 등 이미 기술적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수십만달러 연봉까지 포기하면서 바이두 창립을 결정했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2000년 바이두 설립 당시 중국 네티즌 규모는 100만여명에 불과했고 이마저도 구글, 야후 등 글로벌 기업이 선점한 상황이었다.

이대로 굳혀질 것 같던 업계판도는 이른바 중국의 ‘인터넷장벽’, 만리방화벽의 등장으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만리방화벽(Great Fire Wall)이란 만리장성(Great Wall)과 방화벽(Fire Wall)의 합성어로 중국의 인터넷 검열시스템이다.

중국은 1999년 국가컴퓨터네트워크정보관리센터를 설립하고 자체 검열시스템 개발에 착수했는데 이때 탄생한 게 바로 만리방화벽이다. 2000년대 이후 중국당국은 만리방화벽을 통해 외부트래픽 및 사이트에 대한 차단·검열을 본격화했고, ‘보이지 않는 장벽’에 의해 외부세계와 차단된 중국인은 자국서비스업체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바이두는 가장 큰 수혜를 입으며 파죽지세로 시장영향력을 확대했다.

상용 검색엔진 시장에서의 선점효과도 빛을 발휘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신랑(新浪), 써우후(搜狐) 등 대형 포털사이트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는데 바이두는 이들 기업에 검색엔진서비스를 제공, 설립 반년만에 상용 검색엔진 시장점유율 80%를 장악하며 ‘바이두제국’ 성공신화의 서막을 열었다.

◆ 수익모델 변화, 장기 비즈니스모델 구축

성공에 기뻐하기도 잠시, 2000년대 초 IT버블붕괴는 전세계를 충격에 빠뜨렸고 바이두를 비롯한 중국 IT기업들은 중대한 전환기가 왔음을 직감했다.

특히 바이두는 사업초기 롤모델로 삼았던 미국 검색엔진서비스제공업체 잉크토미(Inktomi)의 몰락을 지켜보며 비즈니스 모델 전환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IT버블붕괴 당시 잉크토미의 주가는 최고 243달러에서 1달러로 곤두박질치며 야후(Yahoo)에 인수합병된 바 있다.

바이두는 기존 상용 검색엔진업체에서 독자적인 검색엔진사이트로 사업형태를 전환하는 한편, 클릭기반 과금방식인 CPC(Cost Per Click)를 채택해 새로운 수익모델을 마련했다.

CPC란 클릭 수 기반으로 광고비를 청구하는 방식으로 키워드와 관련있는 광고를 노출시켜 사이트 방문을 유도한다. 정액제가 아닌 종량제 방식인만큼 단순 광고노출을 위해 높은 비용을 감수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합리적이다. 더불어 바이두는 입찰가격에 따라 광고주가 선호하는 광고 노출 위치를 확보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 같은 입찰방식은 안정적인 광고수익을 창출했다.

2001년 9월 마침내 바이두는 독자적 검색포털사이트인 ‘바이두닷컴’을 정식 출시했다. 포털사이트로 거듭난 바이두는 ’번개프로젝트(閃電計劃)’를 도입하고 최대 경쟁사 구글에 정면대결을 선포하는 한편, 중국네티즌의 성향을 고려한 다양한 서비스를 선보이며 이용자 충성도를 끌어올렸다.

실제 2002년 이후 바이두가 선보인 서비스는 IE써우쒀반뤼(IE搜索伴侶), 바이두MP3, 바이두다푸웡게임(百度大富翁遊戲), 바이두왕멍(百度網盟), 바이두톄바(百度貼吧) 등으로 손에 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IE써우쒀반뤼는 주소창에 중문키워드를 입력하면 관련사이트를 바로 검색할 수 있도록 하는 기능으로 당시만해도 영문입력이 익숙치 않던 중국네티즌 사이에서 큰 호평을 얻었다.

2003년 출시된 바이두톄바(百度貼吧) 또한 카테고리별 온라인 교류공간을 제공하며 인기를 끌었다. 바이두톄바는 사회·일상·교육·연예인·게임·스포츠·기업 등 다양한 카테고리를 분류하고 관련서비스를 제공하며 단기간 내 중국 최대 온라인 커뮤니티로 부상했다.

2005년 8월 5일, 바이두는 꿈에 그리던 나스닥에 상장했다. 첫 거래일 바이두 주가는 354%가 급등했고, 당해 글로벌자본이 주목하는 기업에 선정되며 각종 매체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바이두 설립 5년만에 맞는 최고의 황금기였다.

<下편으로 이어짐>

[뉴스핌 Newspim] 황세원 기자 (mshwangsw@newspim.com)

[뉴스핌 베스트 기사]

사진
[변상문의 화랑담배] 일제 항복 "다가올 일 걱정됐다" 변상문의 '화랑담배'는 6·25전쟁 이야기이다. 6·25전쟁 때 희생된 모든 분에게 감사드리고, 그 위대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제목을 '화랑담배'로 정했다. 1945년 8월 10일은 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 개시 날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그날 오후 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서안성(西安城) 성장 축소주(祝紹周) 집에서 수박을 먹으며 담화하고 있을 때 홀연 전화벨이 울렸다. 축소주가 놀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중경에서 무슨 소식이 있는 듯하다"라며 전화가 설치된 곳으로 급히 들어갔다. 그리고는 나와서 하는 말이 "왜적이 항복한답니다"라는 것이었다. 1945년 9월 2일 시게미쓰 마모루 일본 외무상이 미국 항모 미주리호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모습. [사진= 위키디피아]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서안훈련소와 부양훈련소에서 훈련받은 우리 청년들을 조직적 계획적으로 각종 비밀무기와 전기(電器)를 휴대시켜, 산동반도에서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침입하게 하여 국내 요소에서 각종 공작을 개시하여 인심을 선동하게 하고, 전신으로 통지하여 무리를 비행기로 운반하여 사용할 것을 미국 육군성과 긴밀히 합작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계획을 한번 실시해 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되었다. 우리가 이번 전쟁에서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에 국제간에 발언권이 박약할 것이다"라고 당시 기분을 말했다. 국내 진공 작전에 투입되기 직전 이 소식을 접한 광복군 분위기도 침울했다. 작전을 총지휘하고 있던 이범석 장군은 미 OSS 부새 사젠트 소령에게 사실 여부를 묻고 또 물으며 굳은 표정을 지었다. 미군들은 샴페인을 터뜨리며 서로 껴안고 법석을 떨었다. 그야말로 광적인 장면이었다. 하지만 광복군들은 서로 손을 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누가 선창했는 지는 알 수 없으나,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일본의 항복 경위는 아래와 같다. 1945년 5월 궤멸 상태에 빠진 독일이 항복한 뒤로는 일본만이 절망적인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 어간에 미국, 영국, 중국 수뇌들이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을 한 후, 카이로 선언을 채택했다. 주요 내용은 ①일본이 탈취한 영토를 원래대로 회복하고, 일본을 그 영토 밖으로 추방한다. ②한국은 적절한 절차(in due course)를 거처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로 건설한다. 등이다. 1945년 2월 미국, 영국, 소련의 정상들이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회합하여 각각 일본과 독일에 대한 전략과 전후 처리안을 결정하였다. 1945년 7월 미국, 영국, 중국 수뇌들이 포츠담에서 일본 측에게 무조건 항복을 권고하며 공동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소련도 뒤에 이 공동 선언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묵살하고 계속 초토전술을 떠들었다. 이에 미군은 1945년 8월 6일에 인류사상 최초의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에, 8월 9일 나가사키에 투하했다. 나가사키 투하 하루 전날인 8월 8일에는 소련이 일본에 선전을 포고하고 만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일본은 히로히토 일왕 어전회의에서 포츠담 선언 수락을 결정하고, 1945년 8월 10일 스위스 정부를 통하여 연합국 측에 그 내용을 통지한 것이다. / 변상문 국방국악문화진흥회 이사장 2025-09-15 08:00
사진
'포스트 이시바' 누구?...고이즈미·다카이치 선두 [서울=뉴스핌] 오영상 기자 =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자민당 총재직 사임을 공식화하면서, 일본 정국의 관심은 차기 자민당 총재 선거로 쏠리고 있다. 집권당 총재가 곧 총리직을 맡는 일본 정치 구조상 이번 총재 선거는 사실상 다음 총리를 뽑는 절차다. 자민당은 조만간 새로운 총재 선거 일정을 확정할 예정이다. 이번 선거에서는 지난 2024년 9월 총재 선거에서 이시바 총리와 경합했던 주요 인사들이 다시 출마할 가능성이 높다. 고이즈미 신지로 농림수산상, 다카이치 사나에 전 경제안보담당상,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 모테기 도시미쓰 전 간사장, 고바야시 다카유키 전 경제안보담당상 등이 후보군으로 거론된다. 정국 운영이 소수 여당이라는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차기 총재가 야당과 어떻게 연대할지, 어떤 연립 구도를 짤지가 최대 쟁점으로 꼽힌다. '포스트 이시바' 후보로 꼽히고 있는 고이즈미 신지로 일본 농림수산상 [사진=로이터 뉴스핌] ◆ 고이즈미·다카이치 선두권 현재 여론조사에서는 고이즈미 농림수산상과 다카이치 전 경제안보상이 선두권을 형성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 지난달 29~31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차기 총리에 적합한 인물로 다카이치가 23%, 고이즈미가 22%를 기록했다. 나란히 1, 2위다. 자민당 지지층으로 한정하면 고이즈미가 32%로, 다카이치(17%)를 크게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카이치는 2024년 총재 선거에서 1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으나 결선에서 이시바에게 역전패했다. 고이즈미 역시 의원 표에서 선두에 올랐지만 당원 표에서 밀리며 결선에 오르지 못했다. 두 사람 모두 당내 기반과 대중적 인지도를 겸비해 차기 선거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주자들이다. 고이즈미 농림수산상은 1981년생(44세)으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차남이다. 2009년 중의원 첫 당선 이후 줄곧 '포스트 아베', '차세대 리더'로 주목받았다. 환경상, 농림수산상을 거쳤으며 개혁 성향과 젊은 이미지로 지지층을 넓혔다. 2024년 총선에서 당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으나 참패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이후 농림수산상으로 복귀해 쌀 유통 개혁 등 농정 개혁에 매진했다. 대중적 인지도와 '고이즈미 브랜드'라는 정치 자산이 최대 강점으로 꼽힌다. 다카이치 전 경제안보상은 1961년생(64세)으로 보수 강경파로 분류되는 여성 정치인이다. 2021년 총재 선거에 첫 도전해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전폭적 지원을 받으며 3위를 기록했다. 2024년 총재 선거 1차 투표에서 최다 득표(의원 72표, 당원 109표)를 얻었으나 결선에서 이시바 총리에게 역전 당했다. 유일한 여성 후보로서 '보수의 아이콘' 이미지를 갖고 있으며, 아베 전 총리와 가까웠던 의원 그룹이 주된 지지 기반이다. 이시바 정권에서 당직 제안을 거절하며 독자 노선을 유지해 왔다. '포스트 이시바' 후보로 꼽히는 다카이치 사나에 전 일본 경제안보담당상 [사진=로이터 뉴스핌] ◆ 하야시·모테기 등 잠룡도 주목 고이즈미와 다카이치 두 선두 주자 외에 잠룡들의 행보도 주목된다.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은 옛 기시다파 일부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이시바 정권의 2인자로서 존재감을 키워왔다. 모테기 도시미쓰 전 간사장은 당내 경험과 풍부한 인맥을 강점으로 삼고, 아소 다로 전 부총리와 교류를 통해 지지 기반을 다지고 있다. 고바야시 다카유키 전 경제안보담당상은 5선 의원으로, 동기 의원들과 옛 니카이파의 지원을 받으며 출마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 총재 선거 이후에도 정국 '안갯속' 자민당 총재 선거는 국회의원 표와 당원·당우 표를 합산하는 방식이 원칙이지만, 긴급 시에는 국회의원과 지방 지부 대표만 투표하는 '양원 의원 총회' 방식으로 대체될 수 있다. 이 경우 의원 표의 비중이 커져 파벌 역학이 중요해진다. 차기 총재가 선출되더라도 곧바로 정권 안정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일본 헌법상 총리는 국회에서 지명되는데, 자민·공명 양당은 현재 중의원과 참의원 모두에서 과반을 잃은 상태다. 따라서 야당이 단일 후보를 세워 결집할 경우, 자민당 총재가 총리로 지명되지 못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자민당 총재가 총리에 오르더라도, 예산안·세제 개혁 법안 등 국정 운영은 야당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차기 총재는 곧바로 '연립 확대'나 '정책 연대'를 추진할 수밖에 없고, 총재 선거 과정에서도 어떤 야당과 손을 잡을지가 핵심 화두가 된다. 결국 이번 자민당 총재 선거는 단순히 차기 지도자를 뽑는 절차를 넘어, 일본 정치가 다당제 속에서 어떤 연립 구도를 구축할지 시험대가 되는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goldendog@newspim.com 2025-09-08 09:26
기사 번역
결과물 출력을 준비하고 있어요.
기사제목
기사가 번역된 내용입니다.
종목 추적기

S&P 500 기업 중 기사 내용이 영향을 줄 종목 추적

결과물 출력을 준비하고 있어요.

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이 내용에 포함된 데이터와 의견은 뉴스핌 AI가 분석한 결과입니다. 정보 제공 목적으로만 작성되었으며, 특정 종목 매매를 권유하지 않습니다. 투자 판단 및 결과에 대한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주식 투자는 원금 손실 가능성이 있으므로, 투자 전 충분한 조사와 전문가 상담을 권장합니다.
안다쇼핑
Top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