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장주연 기자] 재벌과 정치인의 뒷거래를 도와주던 정치깡패(내부자들, 2015), 희대의 사기범(마스터, 2016). 최근 선 굵은 연기로 관객을 사로잡았던 배우 이병헌(47)이 모처럼 새로운 모습으로 극장가를 찾았다. 그간 보여준 강렬한 카리스마 대신 가슴 절절한 감성을 입었다. 신작 ‘싱글라이더’를 통해서다.
22일 개봉한 ‘싱글라이더’는 증권회사 지점장으로서 안정된 삶을 살던 가장이 부실 채권사건 이후 가족을 찾아 호주로 사라지면서 충격적인 진실이 밝혀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극중 이병헌은 모든 것을 잃고 사라진 가장 강재훈을 열연, 섬세한 감성 연기로 또 한 번 클래스를 입증했다.
“감성이 살아있는 영화를 보기 힘들었어요. 워낙 범죄, 액션, 오락 영화가 홍수처럼 쏟아져서 시나리오 자체가 없었죠. 한쪽 장르에 치우치다 보니 감성 영화 발전 속도는 더뎠던 거예요. 저도 장르 편식을 안 하는 편인데 이번 작품을 하면서 제가 이런 작품에 갈증이 심했다는 걸 새삼스럽게 알게 됐죠. 액션 등 유행하는 장르도 좋지만, 아주 디테일한 감성을 따라가고 표현하는 거에 배우로서 기쁨이 있어요.”
이병헌에게 배우의 기쁨을 느끼게 해준 섬세한 감성 표현은 그야말로 감탄스럽다. 실제 이 영화의 백미는 이병헌의 연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병헌은 눈빛, 호흡, 몸짓 하나하나에 각기 다른 감정을 담았다. 많은 대사 없이도 베테랑의 연기는 매 순간 번뜩인다.
“내 감정이 왜곡되지 않게 애를 썼죠. 대사가 많이 없으니까 자칫하면 잘못 전달될 수 있잖아요. 그렇다고 표정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진 않았어요. 표현하려 애쓰기보다 가만히 느꼈죠. 관객은 배우의 눈썹 움직임보다 기운으로 주인공의 감정을 전달받아요. 그래서 전 연기할 때 오로지 그 상황을 생각해요. 그래야 감성이 나오죠. 표정을 생각하는 순간 감성은 깨져요. 나를 바라보려 할 땐 이미 감정 밖으로 나온 거죠.”
혹 풍부한 감성 연기가 세월과 경험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냐고 물었다. 40대 남자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 그 세월을 겪고 살아온 자만이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이 있을 거라 믿었다.
“맞아요.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생활 패턴이나 연기할 때 문득문득 느끼죠. 과연 이런 기분, 이런 감정을 내가 예전에도 느낄 수 있었을까 싶어요. 설령 그런 감정을 연기했다고 해도 그건 힘겹게 끄집어낸 거겠죠. 근데 그게 단순히 나이가 들어서는 아닐 거예요. 가장 큰 영향은 아무래도 아들이겠죠.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됐다는 것. 아이를 낳은 후, 이제서야 깨닫게 되는 느낌이 많죠. 여러 가지로.”
영화가 주는 묵직한 메시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하고 사는 것에 관한 이야기도 이어졌다. 이병헌은 “짐을 안고 열심히 살아가는 게 어쩌면 어리석은 삶일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다만 아이러니한 게 그런 깨달음을 관객에게 느끼게 해주고 싶다고 선택해 놓고 나 자신은 그렇게 안 사는 거예요. 서부 영화 찍느라 미국에 4~5개월 가 있고, ‘마스터’ 찍는다고 필리핀 가고, 2개월 남짓한 사이에 ‘싱글라이더’ 찍겠다고 호주에 가고(웃음). 그래도 이 영화를 찍으면서 분명 영향은 받았어요. 살면서 문득문득 뒤돌아보고 주변을 보게 되겠죠. 지금 찾을 수 있는 행복은 생각 못 하고 앞만 보고 가는 건 아닐까 잠깐씩 서볼 거고요.”
이병헌은 자신이 느낌 이 감정을 고스란히 관객들도 느낄 수 있길 바랐다. 만일 그렇게 될 수 있다면, 그건 이병헌에게 흥행만큼이나 더 값진 선물로 남을 거다.
“이 영화가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는 분은 존재할 거예요. 하지만 영화를 본 관객 중에 ‘싱글라이더’가 인생영화라고 하는 분도 있을 거라 믿죠. 이 영화가 내게 준 느낌과 의미가 그렇듯요. 사실 ‘번지점프를 하다’나 ‘달콤한 인생’은 흥행했다고 볼 수 없죠. 하지만 여전히 좋은 영화라고 이야기되고 지금도 찾아봐요. 그런 게 배우에게는 소중해요. 어떻게 생각하면 더 큰 영화의 힘이고요. ‘싱글라이더’도 누군가에겐 작품이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뉴스핌 Newspim] 장주연 기자 (jjy333jjy@newspim.com) <사진=워너브라더스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