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m 간격도 안돼 초가 타고 남은 흔적
"미끄럽다" 아닌 "조심해야겠다" 불평은 없고
'정치 개혁' 간절함 배어있는 광화문
[뉴스핌=김범준 김규희 황유미 기자] 지난 20일 일요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진행되는 전시회를 보기위해 이동하던 조모(여·28)씨는 광화문역에서 나오다 순간 넘어질 뻔했다. 전날 집회에서 만들어진 촛농을 밟고 미끄러지면서 잠시 중심을 잃었기 때문이다.
조씨는 “그때 주위를 둘러보니 근처 곳곳에 촛농이 뭉쳐있었다”며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길바닥에 떨어진 수많은 촛농을 보며 집회에 정말 많은 사람이 참여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주말마다 대규모 촛불이 켜진다. 평일에도 켜진다. 사람들은 촛농이 거리에 있어도 미끄럽다는 불평은 대놓고 하지 않는다. 촛불에 이은 촛농민심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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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경복궁역 사거리에 아직 남아있는 거대한 촛농 자국. 당시 집회 열기를 보여주고 있다. <사진=뉴스핌 김범준 기자> |
◆ 광화문 곳곳 ‘촛농’ 흔적…1m도 안되는 간격
23일 서울 광화문 광장은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주장하는 대규모 촛불집회가 만들어낸 촛농의 흔적으로 메워져 있다.
촛농 자국은 광화문 광장 뿐만 아니라 광화문 교차로에서부터 세종대로 사거리까지의 양측 인도 위에도 존재했다. 자국들은 1m 안 되는 간격으로 끊임없이 이어져있었다. 세종문화회관의 계단도 마찬가지였다.
희뿌연 촛농은 방울형태로 모여 있기도 했고 주먹크기만한 덩어리로 바닥에 떨어져 있기도 했다. 추운 날씨 탓에 부서져 하얀 소금처럼 보이는 촛농도 있었다.
정재현 서울시 도심관리팀 주무관은 “지난 일요일 자원봉사자 50명과 촛농 제거 작업을 했는데도 다 제거하지는 못했다”고 “제거 전의 촛농의 양은 엄청났다”고 말했다. 이어 “집회에서 시민들이 오랜 시간 초를 들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촛농이 바닥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지난주 경찰과 집회참여자들이 대치를 이뤘던 내자동 사거리에서도 촛농 자국은 발견됐다. KEB하나은행 경복궁역 지점 바로 앞 도로에는 촛농이 약 1m² 넓이의 거대한 흔적을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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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최순실 비선실세 의혹 진상규명과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는 4차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다. <사진=김학선 사진기자> |
◆ 촛농의 ‘흔적’…국민의 간절함 보여주는 것일까?
광화문의 수많은 촛농 자국은 국민들의 촛불 집회의 참여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를 알려주는 흔적이다. 촛농은 촛불이 오랜시간 지나야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정권퇴진에 대한 국민들의 ‘간절함’까지 상징한다.
지난 11월 5일 광화문 집회에는 주최 측 추산 20만 명, 12일에는 100만 명이 함께 했다. 19일에는 60만 명의 시민이 참석했다. 참여 시민들 대다수는 초를 들고 ‘박근혜 퇴진’ 바람을 표출했다.
12일 촛불집회에 참석한 직장인 김현구(29·경기도 광명)씨는 “촛불을 켜고 1시간 정도가 지나니 촛농이 바닥에 흘렀다”며 “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 같이 머물렀던 탓인지 바닥에 촛농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고 전했다.
국민들의 간절함은 전국 규모로 집회가 열린다는 것에서도 읽을 수 있다. 지난 19일에는 추최 측 추산 부산 7만명, 광주 5만명, 대구 2만명, 충북도청 1만명 등 약 70만명의 국민이 대통령 퇴진에 목소리를 모았다.
천웅소 참여연대 시민참여팀 팀장은 “촛농은 정부의 반성과 변화를 바라는 국민의 '염원'과 '간절함'”이라며 “시민들은 매주 주말을 반납하고 거리에 나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며 촛농을 만들어 냈다”고 분석했다.
촛농은 집회가 열리지 않는 평일에도 국민의 염원을 상기시키는 작용도 한다. 촛농은 제거해도 지워지지 않는 기름자국처럼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경복궁역 사거리 도로 위 한 켠에 흥건한 촛농자국을 본 김모(고3) 학생은 "많은 사람들이 모였음을 말해주는 것 같다"며 "그만큼 대통령의 퇴진을 기다리는 국민들의 염원이 크다는 것 아닐까"라고 말했다. 이어 "지난 19일 집회는 수능 후 모의논술을 보느라 못갔다. 이번 26일에는 친구들과 함께 집회에 참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촛불과 촛농에 담겨진 대통령 퇴진과 정치 개혁에 대한 간절함은 앞으로도 이어질 예정이다.
이나영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이번 시위는 2008년 광우병 시위보다 훨씬 간절하다. 정치권과 기득권 전반에 대한 부패가 드러나면서 국민들은 민주주의 국가의 재건축과 같은 더 광범위한 개혁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날씨가 추워지는 게 변수이긴 하지만 국민들의 간절한 마음은 식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뉴스핌 Newpim] 황유미 기자 (hume@new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