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흔히 보이는 것들로 뫼비우스적, 그 이상의 상상 여행을 하려 한다. 주변의 사물들엔 저마다 독특한 내력이 숨어 있고 어떻게 빚느냐에 따라 보석이 되기도 하고 나침판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출발한 여행의 과정에 어떤 빛깔의 풍경이 나타날지, 그 끝이 어디까지 다다를지 필자 자신도 설레인다. 인문학의 시대라고 하는데 인문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 메타적 성찰 역시 필요한 시점이다. 사물과 풍경, 시대와 인문을 두루 관통하면서 색다르면서도 유익한 여행을 떠나려 한다.
몸소 겪지 못한 경험들이 따스함과 새로움을 주는 경우들이 많다. 독서나 영화 등등이 그럴 것이고 사소한 일상 대화를 통해서도 그런 에너지가 오곤 한다.
솥단지 검댕. 그것도 내겐 그렇게 왔다. 여행 같은 고급 차원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잔잔하게 번져왔다.
나는 그 말을 얼추 들어는 봤지만 그에 대한 경험이 없다. 그래서 그에 대해 알지 못한다. 당연히 쓸 꺼리도 없다. 그러나 내 안엔 그런 것에 대한 동경이 강했던 터라 그 말은 나의 마음을 바깥에서 부드럽게 두드려댔다. 부엌과 아궁이에 관한 내 에세이 연재물을 고교 친구들의 카톡방에 띄우자 누군가 툭 던진 것이었다.
솥단지 검댕을 본 적은 있다. 내 유년의 집 부엌 부뚜막에 놓인 검은 솥단지에도 검댕은 붙어 있었다. 불길에 타고 탄 새까만 덩어리이다.
“그게 활성탄이야. 숯인 거지. 차콜이라고도 불러. 소화제로 쓰였지. 정수기에 달린 필터에도 그게 들어가. 흡착성이 뛰어나니. 옛날에 소화제가 있니? 뭐가 있니? 솥단지에 붙은 검댕을 떼어서 그냥 먹인 거지. 배 속에 있는 독소를 빨아들여 약효가 있는 거지. 신기한 것은 몸 속의 좋은 성분은 흡수하지 않고 유해 성분만 흡수한다는 거지”
이런 류에 박식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술술 흘러나왔다. 이에 대한 나의 무지가 큰 만큼 친구의 말은 청량감이 있었다.
어릴 적에 솥 바닥에 달라붙어 보기에도 흉측하고 쓰레기인듯한 것이 놀라운 효과를 지닌 약재인 동시에 과학으로 둔갑하고 있었다. 친구는 말을 이어나갔다.
“탄소로 이루어졌지. 연필 안에 든 흑연 있잖아. 그것도 탄소야. 다이아몬드도 탄소이지. 요즘 신소재로 한창 뜨는 그래핀도 탄소로 된 것이고. 탄소로 이루어진 것들이 주변에 엄청나게 많지. 지금의 문명 자체가 탄소 문명이기도 해. 석유도 탄소 빠지면 시체이지. 숯 역시 그런 것들과 같은 계열로 보면 돼.”
연필에 이어 다이아몬드, 신소재까지 확장되자 기분이 배가되었다. 하긴 이 세상의 그 어떤 물건,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 외연을 확장하면 별의별 찬란함들과 연결될 것이다. 그러나 한갓 쓰레기 같은 걸로 여겨졌던 것이 배반을 일으키며 빛을 내어서 그런지 의미가 남달랐다. 나는 그것을 업신여긴 적은 없었고 무시했을 정도인데 새까맣게 일그러진채 검은 솥에 검은 빛으로 달라붙어 있던 그것에서 모종의 검은 카리스마를 느꼈던 것 같기는 하다.
“동의보감엔 열독을 없애고 배 속의 덩어리진 것을 삭히며 갑자기 허한 증상이나 이질과 설사를 멎게 한다고 되어 있지요. 숯엔 백탄도 있지요. 고온 처리된 것이 백탄이고 상대적으로 저온 처리된 것이 흑탄이예요. 찰밥에 숯검댕을 치대서 환으로 만들어 먹인다는 얘기도 들은 적 있어요. 아마 급체했을 때 했던 것 같아요.”
또다른 지인도 고맙게도 그런 좋은 정보를 알려주어 검댕에 대한 인식이 한결 넓어지고 있었다. 서구 과학만이 과학이 아니고 우리나라든 그 어느 나라든 널려 있는 민간요법에도 과학성이 들어 있어 그 둘에 대한 섣부른 이분법적 생각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평소의 생각에도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내 유년의 부엌엔 기차가 연상되는 레일이 아궁이 속에 있었고 간장과 고추장, 식초 외에도 빵을 구울 때 먹음직하게 부풀리는 이스트가 든 찬장이 있었다. 아궁이의 연탄, 그 열 아홉 개의 구멍 속에서 치솟는 불은 벌겋고 푸릇했다. 나는 불이 그렇게 서로 정반대의 빛을 낼 수 있다는 것을 연탄을 통해 알았다. 불이면 빨간 빛으로만 알던 유년의 내겐 신기한 체험이었다. 불이 꺼지고 나면 연탄은 검은색에서 흰색으로 변한다. 검은 색의 연탄은 무겁고 희게 변모한 연탄은 가볍다. 그 무게의 차이가 온돌방을 뜨듯하게 했으며 냄비의 국을 끓여 우리 식구를 먹였다. 그 연탄불 위에 설탕을 부은 국자를 올려놓고 나무 젓가락으로 휘이 저으며 끓이곤 했다. 찬장에서 이스트를 꺼내와 넣으면 소담하게 부푼다. 쇠판에 쏟아 놓고 바닥이 평평한 쇠붙이로 꾸욱 눌렀다. 달고나라고 해서 학교 앞에선 별이나 새, 곤충 모양으로 떼게 해 돈 버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 놀이를 부엌에서 했던 것이다.
어머니에겐 노동의 장소이며 아버지에겐 무관심의 영역이지만 우리 어린이들에겐 놀이의 장소이자 연금술의 공간이 부엌이었다.
때론 쥐들이 돌아다녀 공포스러웠다. 연탄집게나 빗자루를 들어 쫒아내고 나면 찝찝한 먼지가 음식에 들어가진 않았을까 불결함이 깃든 식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달리 생각해보면 쥐와 파리, 모기, 거미 등등과 함께 서식하던 자연 생태계이기도 했다.
그런 부엌에서 가장 허접한 것이 아마 솥단지에 붙은 검댕일 것이다. 그러나 나의 어머니는 아닐지라도 수많은 여인들은 그것이 설사나 배탈에 훌륭한 약재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버드나무 껍질에서 해열제나 진통제를 옛날엔 구했다고 하니 약은 채취된 식물에서 비롯됨직하며 그 기원이 엄청 깊을 것이다. 아스피린도 바로 그 버드나무 껍질에서 추출된 것으로 만든 것을 보면 민간요법과 현대 의학과의 관계가 요원한 것만은 아니다. 숯이 쓰여진 역사도 장구한데 청동기나 철기를 만들던 시기에도 그 주조에 숯이 필수적으로 들어가야 했다. 무기 제조 외에도 숯은 연료로도 쓰이고 온돌의 온기가 미치지 못하는 방구석의 공간을 화로 속에 담겨 달구어져 덮혔다. 그렇듯 생활에 다양하게 사용된 숯이 의약으로도 쓰인 것이다.
밭솥에서 밥을 퍼내면 누룽지가 남는다. 현대의 전기밥솥에선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 누룽지 또한 배고픈 시절의 훌륭한 간식거리인데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것들을 모아 기름에 튀긴 후 설탕을 바르기도 했다. 그러면 고소한 과자로 변모했다.
남은 누룽지에 물을 부어 끓이면 숭늉이 된다. 전통 밥솥과 누룽지가 사라졌기에 숭늉도 덩달아 사라졌지만 숭늉의 맛은 요즈음 식후에 마시는 커피나 녹차보다 나은 점도 많을 것이다. 구수하기가 일품이며 이미 먹은 밥과 호응이 잘 되기에 자연스럽고 편하게 배에 들어간다.
밥과 누룽지와 숭늉이 밥솥 안의 세계라면 그 바깥의 바닥 아래쯤에선 또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아궁이에 집어넣은 장작이 불길에 타오른다. 장작은 숯으로 변해가며 그 숯가루와 그을음, 연기가 솥바닥에 맺히고 맺혀 덩어리가 되어 간다. 이른바 검댕이다. 장작은 그렇게 불에 타 숯과 재가 된다. 재는 또다른 세계이다.
먹을 것도 모자란 시절이었다. 한약방이래야 드물었고 약 지을 돈 구하기도 무리였을 것이다. 가족 중 누군가가 배탈이나 설사가 나면 어머니들은 아궁이로 달려갔다. 아궁이가 여러 개인 집이라면 그 중 꺼진 아궁이 속을, 하나인 집에 아궁이 속에 불이 있다면 그것을 급히 끄던가 솥단지를 들어내 찬 물을 끼얹어 식혔을 것이다.
불씨가 꺼지면 큰 일이 나는 시대가 조선 시대였다. 불씨의 보존을 생명처럼 여겼다. 아궁이 곁에 ‘화티’라고 해서 불씨 보관 장소를 자그마하게 만들어 불씨를 꺼뜨리는 일이 없도록 노력했다. 불씨는 늘 지펴 있어야 하고 거기에서 얻어낸 불로 인해 만들어져 그 불이 죽어야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검댕이다. 그런 역설 속에 있기에 검댕은 빛나기도 한다.
아궁이에 장작을 연신 넣던 어머니의 손. 농사를 짓고 쌀을 안치고 옷을 만들고 벽지를 바르던 손. 추운 겨울이 오기 전에 한지를 문에 새로 입히던 손. 김장을 담그고 장독에 든 그 김장 김치를 꺼내와 손으로 주욱 찢어 자식들 입에 넣어주던 손수저인 그 손. 그 손이 이젠 아궁이 속의 식은 재 속을 헤집거나 뜨거운 솥단지를 들어 올려 부려부랴 식힌 다음에 찰싹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도 않는 검댕을 떼어내는 것이다. 배가 아파 우는 아이의 울음 소리는 그런 어머니들의 가슴을 찢어놓아 미처 식지 않은 불길에 손을 데인 날도 많았을 것이다. 어머니들의 그 거룩한 희생과 사랑을 통해 솥바닥에 맺힌 천덕구리인 검댕이 명약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 검댕은 연필심인 흑연, 다이아몬드, 신소재인 그래핀과도 가족이며 형제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훌륭한 로얄 페밀리를 지닌 존재가 부엌에서 못난 천덕구리였다가 그 가족의 위기 시에 구원투수로 나서는 것이다.
솥단지 검댕. 그것에 대해 경험이 없던 내가 그 말을 듣자마자 마음이 저미듯 열린 것은 어릴 적에 언뜻 느꼈던 검게 웅크린 카리스마 덕택인지도 모른다. 무엇인가 깊은 것이 담겨 있는데 그것이 뭔지를 모른채 몇 십년을 살아도 그 존재감으로 인해 결국은 본질이 열려져 압도를 당했다고나 할까.
전통 부엌은 그 하나만으로도 눈부시게 빛난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누추한 셋집의 주방이나 그 이전에 내가 꽤 잘 나가던 시절의 아파트의 주방이나 솥단지 검댕, 그 검은 보석이 도사리던 전통 부엌에 비하자니 문득 밍숭밍숭하다.
이명훈 (소설 ′작약도′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