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만나본 오지은은 아주 여성스러운 외모와 대비되는 털털한 성격과 말투를 지닌 여배우였다. 그에게 MBC 일일드라마 '소원을 말해봐'의 긴 여정을 마치고 '후련하냐'고 물으니 "많이 아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극중 소원은 결혼과 동시에 누명을 쓰고 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구하려 대기업과 홀로 싸우는 인물. 비극적 스토리와 전개가 계속되다 보니, 제 아무리 긍정적인 오지은도 영향을 아주 안받을 수는 없었을 터였다.
"소원이 기구한 인생이 기가 막혔죠. 눈만 뜨면 일주일에 한 번씩은 계속 비극적인 일이 터졌어요. 그 괴로운 인생으로 빠져드는 듯 했죠. 바람 잘 날 없었던 소원이를 벗어나니 감정적으로 해방이 된 듯 해요. 그러면서도 이제 그 빈자리가 너무 허전하고 먹먹하게 느껴지네요. 굉장히 '소원이란 존재가 컸구나' 싶어요. 괴로운 적도 많았지만 허무하기도 하고, 마냥 후련하다고 말하기엔 많이 아프네요."
오지은이 말한 것처럼 '이렇게도 기구한 운명이 있을까' 싶은 일들이 소원에게 반복됐다. 식물인간이 된 남편의 억울함을 밝히려는 개인 앞에는 크고 단단한 장벽이 존재했고, 출생의 비밀과 맞물린 친어머니의 악행도 소원을 힘들게 했다. 약간은 한국식 드라마의 한계라고도 볼 수 있는 '소원을 말해봐'의 진부함에 아쉬움은 없었을까.
"처음 작가님 만나 미팅했을 때 멜로가 주된 이야기라고 하셨었어요. 가족들 에피소드도 있겠지만 설정 자체가 멜로였는데, 실제로 그런 부분이 많이 안살아서 약간 아쉬워요. 너무 양념처럼만 나왔거든요. 물론 어쩔 수 없었긴 해요. 식물 인간이 된 남편이 있는데 멜로에 집중하기도 좀 보시는 분들이 불편했을 수 있죠. 그럼에도 전 '진부한 드라마적 설정'을 다 연기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어요. 강한 감정에 몰입할 수 있는 장면들이 아주 많아 단련하는 데 도움이 됐죠."
특히나 '소원을 말해봐'에서는 차화연, 김영옥, 김미경을 비롯해 탄탄한 중견 연기자들이 오지은, 기태영, 유호린을 든든하게 서포트했다. 오지은은 특별히 의붓 모녀였던 김미경과 호흡, 친 모녀지간으로 나왔던 차화연과 뒤늦은 화해 신을 꼽으며 선배들과 연기할 수 있었던 경험이 '소원을 말해봐'의 최고 수확이라고 털어놨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마지막 차화연 선배와 앉아 삼계탕 먹는 신이에요. 첫 친 모녀간의 화해를 하는 장면이라 눈물이 너무 쏟아졌죠. 차화연 선생님이 김미경 선생님이 어머니 역할이었는데, 항상 합을 많이 맞춰주셔서 감사했어요. 안그런 분들도 계신데, 정말 좋았죠. 같은 대사도 맞출 수록 다른 느낌이 되고, 말도 안되는 대사도 이해가 되기도 하거든요. 호흡 하나 하나가 그렇게 완성돼 값진 장면이 만들어졌어요.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셨고 나도 차곡차곡 경험 쌓아서 그런 선배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죠."
약 반년간 함께 해온 소원이와 얼마나 닮았느냐 물으니, 오지은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는 "전혀 다르거나 같다는 개념이 느껴지지 않는다. 내 몸을 빌려서 했을 뿐이지 완전 다른 인격이다. 닮았다면 얼굴이 닮았겠죠. 어쩔 수 없는 체구와 얼굴이 똑 닮았다"고 말해 웃음을 줬다.
"소원이와 상황이 달라서 그런지, 저랑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어요. 사실 사람은 환경이 만드는 건데, 저도 만약 소원이처럼 누군가에게 버림받은 경험이 있다면 항상 짐이 될까 염려하고, 불편한 일을 숨길 것 같아요. 또 오히려, 소원이는 친모의 DNA를 받았으니 당차고 회사를 상대로 맞서기도 했겠죠. 저한테 과연 그런 당찬 면이 있나 생각하면 아니예요. 궁지에 몰릴 때 정말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죠. 아직도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라니까요. '절대 가만 안둘거야' 하길래 복수하나 했는데 또 참고 넘어가요. 진정한 인내의 아이콘이죠."
참을성 강한 비련의 여주인공 소원을 연기하고 나니, 이제 오지은은 '악녀 본능'을 깨우고 싶단다. 만약 연기 변신을 한다면 가장 해보고 싶은 캐릭터로 "울분을 터뜨리다가 나중에 행복해지는 캐릭터"라고 꽤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그는 "단 몇 회만에 분노를 다 터뜨린 다음에 로코로 완성되는 캐릭터를 해보고 싶다"고도 덧붙였다.
"특히 작년에 '악녀 열풍'이 거셌잖아요. 저도 항상 장희빈같은 팜므파탈 역을 꼭 해보고 싶었어요. 참지 않고 감정을 터뜨리거나 교활하게 누군가를 지능적으로 이용하는 걸로요. 사실 제가 여성성도 강해서 기생 역도 좋은데, 아직 안어울리나봐요. 수동적이기보다 진취적이고 극을 이끌어가는, 엣지 있는 캐릭터에 도전하고 싶어요. 만약 카리스마가 없다면 좌충우돌 4차원 캐릭터여도 좋을 듯 해요."
벌써 연기자로 데뷔한 지 8년차를 맞은 여배우 오지은. 조금 있으면 10년차 중견 배우가 된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아직 많은 이들에게 신선한 얼굴이다. 사실 동안 외모와 달리 나이가 꽤 있는 늦깎이 연기자인 그는 "예전보다는 여유가 생겼다"면서 연기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리고 작품을 산에 비유하며 구석구석 잘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가이드 같은 배우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뭐든 10년 하면 완성된다고 하잖아요. 살짝 예전보다는 여유가 생겼고, 그게 '소원을 말해봐' 덕분이기도 해요. 예전엔 나이에 비해 데뷔가 늦어서 경험 쌓기에 여념이 없었죠. 이젠 강박을 내려놓고, 양보다는 질적으로 심도있는 연기를 하고 싶어요. 다들 북한산이 좋은 건 알지만, 어느 가이드를 만나느냐에 따라 산의 일부만 볼 수도 있고 구석구석 아주 잘 보고 올 수도 있잖아요. 좋은 가이드 같은 배우가 되고 싶어요. 항상 완벽하게 준비해서 어떤 작품을 하더라도 '이건 오지은이었으면' 하는 배우가 되는 게 지금의 제 소망입니다."
"류현경·정유미·이정진 오빠와 '한양대 동문'…연기와 인생 고민 나누죠" 8개월 간 달려온 '소원을 말해봐' 이전에도 단 6개월만 쉬는 시간을 가졌다는 오지은. 이젠 연기 경험에 관해 강박을 내려놓은 만큼, 그는 여행, 독서, 평범한 삶을 누리는 일상이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이라고 말했다. "사실 제 삶을 잘 영위해야 하는데, 그러려고 일을 하는건데 주객이 전도되서 삶을 해치면 안되잖아요. 균형을 어떻게 맞출 수 있는지 항상 고민해요. 연애요? 쉴 때 연애도 해야죠. 저도 위로 받고 사랑의 감정을 느끼며 인간답게 살아야죠. 지난 8개월 동안 전 사실 그냥 배우였어요. 몸매나, 외모까지도 역할에 어울리게 맞춰야 하고, 여배우인 제게 신경써주는 스태프들이 항상 곁에 있었으니까요.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쉴 땐 좀 제 취향으로 맘 편하게 살아보고 싶어요." |
[뉴스핌 Newspim] 양진영 기자 (jyyang@newspim.com) · 사진 이형석 기자 (leehs@newspim.com) [장소 협조=스마일 플라워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