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창 밖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캔 맥주를 사들고 갑판으로 나갔다. 바다를 바라보았다. 공복 속에 짜르르 흐르는 맥주 맛. 나 홀로 감미롭게 취해갔다. 바다의 푸르름과 싸늘함이 지난 밤의 객기와 취기에 젖은 몸 전체로 파고들었다.
어렸을 적 겨울 아침, 양은 대야에 꽁꽁 얼어붙은 얼음을 깨 차가운 얼음물로 세수할 때의 상쾌함. 얼얼해진 얼굴로 하늘을 올려보았을 때, 또렷하게 빛나던 원색의 하늘 색깔. 어머니는 화단에 묻은 장독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백김치를 꺼내 아침을 준비하고 있고, 출근 준비를 하는 아버지는 펌프 가에서 하얀 소금으로 이를 닦았던 낯익은 정경들. 동네 친구들과 우루루 냇가로 몰려가, 얼음 조각을 떼어내 올라타기도 했었다.
날씨는 지독히도 추웠고, 하늘과 공기는 파랗고 상쾌했었다. 얼음 배를 타고 물 위를 떠내려가는 곁으로 눈에 덮힌 하얀 들판....시간이 갈수록 얼음 배가 녹아들고 깨져나가 결국 물 속에 첨벙 빠지게 되었고, 젖은 옷이 얼어붙어 얼음의 갑옷을 입은채 덜덜 떨면서 멀리 집으로 걸어오던 길. 온몸이 오그라들었지만 지금까지도 기억에 생생한 강렬한 상쾌함이, 그 어린 머릿속에 반짝이고 있었다.
멀리 작약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작약꽃 봉오리처럼 생겼다 해서 작약도란 이름이 붙은 섬. 함박꽃이라고도 불리는 붉은 작약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오래된 노송, 울창한 수목이 우거진 작고 아담한 섬. 해변을 따라 암벽 길이 죽 나있고, 갯벌에 내려서면 호미나 집게로 조개를 잡는 사람들, 푸른 망 속으로 잡은 조개를 집어넣는 아낙네들을 쉽게 볼 수 있는 섬.
원래 이름은 물치도라 하여 우리 가슴속의 오래된 정서, 잊혀진 정취를 훅 느끼게 하는 곳. 근처의 영종진에 땔나무를 공급할 정도로 자원이 풍성하던 곳. 숫처녀 같은 이 순박한 섬에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제국주의 깃발을 꽂은 프랑스 함대가 정박해 수수한 조선 땅을 시시탐탐 노리기도 한 곳. 수목이 울창하다 하여 숲섬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던 곳. 아펜젤러, 언더우드가 이 섬 곁의 물길을 따라 멀리 서양으로부터 건너와 가난한 초가와 푸른 하늘의 땅 우리나라에 기독교의 씨를 뿌리기도 했던 곳.
민족 상잔의 비극 6.25가 터져 온 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피로 물들이며 최후의 배수진 부산마저 먹어치우려는 찰나, 월미도를 통해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되어 결과적으로 빨치산이 초토화되고 남북이 장작 쪼개지듯 뼈마디 아프게 나누어질 때, 바닷길이 되기도 했던 섬.
민다나오. 뜨거운 열병의 섬. 남국의 끝. 식민지 내음 물씬 풍기는 가난, 폭력, 부패, 무슬림, 원색의 바다와 시뻘건 태양, 뇌쇄적인 파인애플 향기, 순정 넘치는 까무잡잡한 원주민들이 천연의 아름다움과 포탄의 공포 속에 살아가는 곳.
민다나오. 내 청춘의 아린 핏물을 씻겨준 곳. 내 마음의 중세 시대. 이교도 지하 교회에서의 찬란한 환각과 증독 같은 잠, 지칠대로 지쳐버린 영육의 물감을 화사한 색깔로 되돌려 준 곳. 영혼의 숨결을 지닌 잊을 수 없는 친구들. 고뇌하는 우리들 가슴속으로 주저 없이 드나들던 풍요롭던 밀물. 다시는 함께 할 수 없는. 그리고 그 섬으로부터 성난 파도의 태평양을 가로질러, 난파될 듯한 배를 타고 당도한 신비의 섬 화이트 아일랜드. 불멸의 아름다움. 원색들의 완벽한 조응. 푸르른 투명 위에 뜬 새하얀 불사막.
두 번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첫사랑처럼,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몰래 품은 섬, 작약도. 갈매기 울음 소리 흉내내던 청아한 목소리. 플루트 속을 막 빠져나온 듯한 맑고 고운 음색. 다시는 들을 수 없는, 그때 그 목소리.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기억의 안개 속으로 한없이 잠겨들어도 만져질 듯 만져지지 않는, 현기증일 뿐인 실체. 하지만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누구도 감히 따를 수 없는 선연한 광채로 빛나며 분명 실재할 것 같은, 그 빛을 향해 겁 없이 날아간 무수한 순수의 날개들을 남김없이 태워버렸어도 그 잔인 속에, 오히려 그 잔혹의 미소 안쪽에 고요히 숨 쉬고 있을 것 같은 불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