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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은행은 중국 국가번영의 동반자' 中 언론

기사입력 : 2013년08월06일 17:41

최종수정 : 2013년08월06일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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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핌=강소영 기자]

출처:텅쉰재경
세계은행이 최근 중국에 은행 민영화와 농지거래 자유화 방안을 제시한 것을 계기로 오랜동안  중국의 개혁 개방과 경제 발전과정에서  세계은행이 끼친 공로가  중국 사회의 높은 평가를 얻고 있다. 

사안으로 볼때 이런 정책 제시안이 중국 당국의 개혁실행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이는 세계은행과 중국의 '끈끈한' 관계와 중국 개혁 개방과정에있어  세계은행의 영향력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증표가 됐다.

특히, 시진핑 국가주석을 정점으로 하는 중국 현 지도부의 대표적 경제개혁 사업인 도시화 문제에 대해서도 세계은행이 최근 중국과 함께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눈길을 끌고있다.

6일 중국 유명 뉴스포털 텅쉰(騰訊)재경은 '세계은행과 중국 경제개혁 30년 협력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중국 경제개혁 과정에서 세계은행의 역할을 집중조명했다.

◇ 1980년대: 체제개혁과 거시경제 조정
세계은행과 중국의 협력은 1980년대초 차관도입, 국제협력 등 업무로 시작됐다. 특히, 1981~1994년까지 체제개혁과 거시경제 운용에 관한 세계은행의 연구와 협력은 중국원조전략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1981년부터 1989년까지 세계은행은 총 24개의 중국관련 연구 보고서를 발표해 사회주의 시장경제, 농촌금융, 교통운수, 전력, 석탄가격, 대외무역 등 다방면에 걸쳐 심도있는 의견을 제시했다.

1982년과 1985년 중국은 세계은행과 전문가 회의를 개최했다. 이때 중국과 세계은행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중국을 시찰한 전문가들은 중국이 시장개방에 나서야 한다고 권고했고, 중국 지도부는 이를 통해 중국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선 동유럽식 개혁이 아닌 시장지향적 개혁에 나서야 한다고 깨닫게 됐다.

한편, 1981년 중국은 세계은행으로부터 2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받기 시작했고, 그 규모는 점차 커져 1988년 15억 달러에 달하게 돼 경제발전을 위한 '종자돈'을 마련할 수 있게 됐다.

1990년대 들어 중국의 개혁에 가속도가 붙으면서, 중국과 세계은행의 협력도 더욱 긴밀해졌다. 이때 세계은행은 중국의 개혁을 위한 많은 정책방향을 제시했는데, 1994년 중앙과 지방의 세수분리 개혁을 단행, 1995년 중앙권력의 분산화, 1996년 국유기업개혁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1997년에는 중국의 요청에 따라 '2020년의 중국'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해 식량안보·환경보호·보건위생 분야의 자금조달·양로문제·세계경제 참여·소득분배 등 방면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1990년대 말 중국의 경제력 향상으로 세계은행의 차관지원은 중단됐고, 중국과 세계은행은 제도개혁 분야에 관한 협력의 강도를 높여갔다.2000년대 들어 중국과 세계은행은 경제발전 문제에 대해 공동연구를 진행했고, 2010년 세계은행은 중국의 지방정부 부채 및 위험관리에 관한 두개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2012년에는 중국 국무원이 처음으로 세계은행과 손을 잡고 중국 경제와 사회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2030년의 중국'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 다음 협력은 '중국의 도시화' 추진
중국 재정부의 최근 소식에 의하면, 올해 6월3일~4일 중국과 세계은행은 도시화 과제 연구팀을 구성하고, 9명으로 구성된 전문가팀을 광둥(廣東)성에 파견했다.

이는 리커창(李克强) 중국 총리가 상무부총리였던 지난해 말 중국을 방문한 김용 세계은행 총재를 접견하면서 합의된 사항이다. 김용 세계은행 총재는 중국의 지속적 발전과 도시화는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세계은행은 중국의 중요한 협력 파트너로서 이 문제를 심도있게 연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김용 세계은행 총재는 중국을 방문했던 지난해 12월 중국의 지도부와 회담을 갖는 것 외에, 당시 중국 재정부장인 셰쉬런(謝旭人)을 만나 '세계은행-중국발전실천지식센터'를 건립하는 방안에 대해 심도있는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다.

텅쉰재경은 세계은행으로부터 차관원조를 받던 중국이 2010년 세계은행의 제3대 주주로 부상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그 과정에서 세계은행의 '공헌'이 적지않았다고 밝혔다. 또한, 중국과 세계은행이 향후 녹색성장, 포용성 발전(상생발전)을 공동 추구하고 중국이 세계와 공동 번영하는 차원에서 협력을 강화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뉴스핌 Newspim] 강소영 기자 (jsy@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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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기차 주행거리 두배 증가 배터리 개발 [베이징=뉴스핌] 조용성 특파원 = 중국이 에너지 밀도를 두 배 증가시킬 수 있는 전고체 배터리를 개발해 낸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 칭화(淸華)대학 화학공학과의 연구팀은 '음이온이 풍부한 용매화 구조 설계'를 개발해 냈으며, 이를 기반으로 불소 함유 폴리에테르 전해질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냈다고 중국 관찰자망이 30일 전했다. 해당 연구 성과는 논문 형식으로 국제 학술지인 네이처에 등재되었다. 연구진이 만들어낸 폴리에테르 전해질은 고체이며, 연구팀은 해당 전해질을 사용하여 전고체 배터리를 제작했다. 제작된 전고체 배터리는 604Wh/kg의 에너지 밀도를 기록했다. 이는 현재 리튬 이온 배터리의 에너지 밀도가 150~320Wh/kg인 점을 감안하면 에너지 밀도가 두 배 이상 높아진 것이다. 동일한 무게의 배터리이지만 해당 전해질을 사용한 전고체 배터리는 두 배 이상의 전력을 충전할 수 있는 셈이다. 이론적으로 전기차의 1회 충전 주행 거리가 두 배 증가할 수 있게 된다. 현재 500km가량을 주행할 수 있는 전기차가 1000km를 주행할 수 있게 된다. 해당 전고체 배터리는 안전성 테스트도 통과하였다. 못을 박아도 화재와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120도의 높은 온도의 박스 안에 6시간 동안 방치되었지만, 연소나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500회 이상 충방전을 거치면서도 에너지 저장 용량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연구진이 만들어낸 전고체 배터리가 상용화된다면 많은 분야에서 활용이 가능해진다. 전기차의 주행 거리는 두 배 증가하며, 드론의 비행 거리도 두 배 증가하게 된다. ESS(에너지저장장치) 역시 부피당 저장 용량을 크게 끌어올리게 되며 ESS 소형화가 가능해진다. 칭화대 연구진이 개발한 전고체 전해질의 도식도 [사진=네이처 캡처] ys1744@newspim.com 2025-09-30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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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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