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리어우먼 스타 '미셸', 아이 다섯 키운 '앤'
'D-53'. 미국 대통령 선거가 7주여 앞으로 다가왔다. 미국은 금융 위기 이후 회복이 주춤한 상황에서 고실업률이 지속되며 민심을 흔들고 있다. 또 과거 감세 정책의 일몰과 재정지출 억제 정책이 겹치는 이른바 '재정절벽(Fiscal Cliff)' 문제는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의 관심사다.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자 대공황 이래 최악의 시기를 헤쳐온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재선 가도를 미트 롬니가 추격하고 있는 형국이다. 2012 미국 대선의 구도와 쟁점을 조망해 본다. <편집자 註>
[뉴스핌=유주영 기자] 민주당과 공화당 후보 부인은 힐러리 클린턴 등 전통적으로 적극적인 외부활동에 나섰던 민주당 후보 부인과 로라 부시 등 전업주부로 내조에 치중했던 퍼스트레이디의 내조로 대비를 이룬다.
미셸 오바마 [사진=AP/뉴시스] |
오바마 대통령 부인 미셸 여사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처럼 변호사 출신으로, 남편과 함께 사회운동에 정력적으로 임해왔다.
미셸은 미국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흑인 중산층 가정의 딸로 태어났다. 결혼 전 이름은 미셸 라본 로빈슨이다. 아버지 프레이저 로빈슨은 시카고 시의 상수도 펌프 운용 기사로 일하면서 민주당 지역구의 지구당 담당자를 지냈고, 어머니 메리언 로빈슨은 스피겔이라는 홈쇼핑 잡지사에서 일했다.
미셸은 시카고에서 가장 뛰어난 공립 고교로 알려진 휘트니 영 고등학교를 1981년 졸업한 후, 프린스턴 대학교에 진학해 사회학을 전공하고 1985년 우등으로 졸업하였다. 1988년 하버드 법학대학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고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시카고의 한 로펌에서 일하다가 하계 인턴 사원으로 들어온 오바마를 만났다. 당시 미셸은 버락 오바마의 사수였으며 그들은 당시 그 로펌에서 둘뿐인 흑인이었다.
두 사람은 1992년 결혼해 슬하에 두 딸 말리아 (1999년생)와 사샤 (2001년생)를 두고 있다.
미셸은 로펌에서는 주로 지적 재산권 분야 업무를 담당했으며, 시카고 시청에서 일하기도 했다. 시카고 대학교 지역업무담당 책임자를 거쳐 남편의 선거 운동 활동 직전까지 시카고 대학교 부속병원 부원장을 지냈다. 그와 함께 대형 식품회사의 사외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녀의 젊고 활기찬 이미지는 남편의 대선 가도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미셸은 탁월한 패션감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남편의 취임식 때도 중저가 브랜드로 뛰어난 훌륭한 스타일을 연출해 칭송을 받기도 했다.
앤 롬니 [사진=AP/뉴시스] |
반면 앤 로이스 롬니는 평생 전업주부로 살아왔다. 직장생활 경험이 없는 앤은 대신 시민 단체에서 활동했다. 그는 최근 다발성경화증과 유방암 투병을 내세워 유권자들의 감성에 호소하고 있다. 롬니 부부에게는 태그(1970년생), 매트(1971년생), 조시(1975년생), 벤(1978년생), 크레이크(1981년생)의 다섯 아들이 있다.
앤의 결혼전 성은 데이비스로 1949년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미시건주 블룸필드에서 자라 롬니와 데이트를 했던 킹스우드사립학교에 다녔다. 앤은 이 시기에 몰몬교로 개종한 것으로 알려진다. 브리검영대 재학중 롬니와 결혼했으며 1975년 불문학사를 취득했다.
매사추세츠주 주지사 부인 시절, 그녀는 오퍼레이션 키드 등 아동복지재단에 관여했으며 남편의 2008년 대선출마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앤은 1988년 다발성경화증 진단을 받았으며 2008년에는 비침습적 유방암인 유관 상피내암종 진단을 받았다. 그녀는 같은 해 유방종괴절제술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앤은 다발성경화증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자 뉴잉글랜드다발성경화증협회에서 일했다. 또한 다발성경화증의 연구를 촉진하기 위한 기금마련에도 나섰다. 유나이티드웨이 등 불우청소년들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위원회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한편, 앤은 승마 애호가로 알려져 있다. 당뇨 합병증과 허리 통증으로 고생하던 앤은 1998년부터 말을 타면서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승마는 미국에서도 '귀족스포츠'로 각인돼 있어 롬니 캠프는 그동안 앤 여사의 '승마사랑'을 가급적 알리지 않았었다.
앤은 민주당 선거전략가로부터 “생애 통털어 하루도 일한 적이 없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에 대해 앤은 그녀의 트위터에 “나는 집에 머물기를 선택했고 다섯 아이를 키웠다. 믿어 달라, 그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고 말했다. 앤은 이런 점을 공화당 전당대회 연설에서 호소하기도 했다.
매사추세츠주 벨몬트에 살던 당시 27살이던 앤은 적극적으로 남편과 반대편에 서서 여론몰이에 나서기도 했다. 현안은 소방서를 이전하는 것이 옳으냐 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사진을 넣은 플래카드를 인쇄했으며 인쇄물을 집집마다 돌리고 거리에서 주민들을 설득했다. 결과는 앤의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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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핌] 유주영 기자 (boa@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