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뉴스핌 황숙혜 특파원] 유럽 은행권이 처한 ‘돈가뭄’의 절박함을 엿보게 하는 징후가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미국의 연방준비제도(Fed)와 유럽중앙은행(ECB)를 포함한 6개 중앙은행의 공조로 달러 조달 비용이 50bp 인하된 데 따라 은행권 대출이 폭증했지만 유동성 해갈은 아직 먼 얘기다.
8일(현지시간) 유럽은행감독청(EBA)은 유럽 은행권에 1147억유로(1530억달러) 자본을 추가 확충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지난 10월 발표된 예상치보다 80억유로 웃도는 것으로, 은행권 자금 압박 수위가 높아질 전망이다.
◆ 달러 조달 위해 금 대여
국제 금 딜러 업계에 따르면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 은행권이 최근 금 대여에 나섰다. 금을 빌려주고 필요한 달러를 조달하기 위해서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유럽 은행권의 이른바 ‘골드 러시’의 진풍경을 연출하면서 1개월 금 대여 금리가 -0.57%를 기록, 사상 최저치로 떨어졌다. 은행이 금을 빌려주면서 오히려 연율 0.57%의 비용을 치렀다는 얘기다.
UBS의 에델 툴리 금속 상품 애널리스트는 “유럽 은행권이 재무건전성 향상이나 달러 조달, 혹은 두 가지를 동시에 충족시키기 위해 금 대여에 나섰다”고 설명했다.
은행권은 금괴를 투자자나 중앙은행, 다른 상업은행에 대여하고 이들의 달러 예금을 예치한다. 재무건전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통상 분기 말 이 같은 움직임이 고개를 들지만 최근 상황은 전례 없는 현상이라고 업계 관계자는 전했다. 달러 조달이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다.
업계 한 관계자는 “최근과 같은 금과 달러 스왑은 이번 유로존 부채위기가 불거지기 전까지 지극히 보기 드문 일이었다”고 말했다.
◆ 채권 할인價 ‘바이백’으로 화장발 효과
신규 자금 조달이 여의치 않자 은행은 회계 원칙의 허점을 이용해 자본을 추가로 확보하지 않고 대차대조표 상 자본 규모를 늘리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바클레이스와 코메르츠방크, BNP파리바 등 주요 은행 보유중인 채권을 매각한 후 이를 할인한 가격에 되사들이고 있다. 또는 채권을 매입한 투자자로부터 주식으로 전환이 가능하거나 배당을 지급하는 하이일드 채권을 매입하고 있다.
가령, 100억달러 규모의 하이브리드 채권을 투자자로부터 70억달러에 매입하는 방식으로 장부 상 부채를 줄이고, 차액 30억달러를 자본으로 편입하는 식이다.
JP모간의 휴 리처드 매니징 이사는 “이 같은 채권 거래가 자본 기반을 확대해야 하는 은행들 사이에 성행하고 있다”고 전했다.
피치의 브리짓 갠디 유럽 은행 공동 헤드는 “유럽 은행은 협소한 시장에서 한꺼번에 자금을 확충해야 하는 상황이고, 신규 채권 발행은 조달 비용이 상당히 높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하지만 이 같은 채권 거래는 거시경제 리스크가 높아지는 가운데 중장기적으로 은행권 자본건전성을 오히려 해칠 수 있다고 업계 전문가는 지적했다.
◆ 헐값에 ‘울며 겨자먹기’ 기업 매각
도이체방크와 소시에떼 제네랄 등 유럽 주요 은행은 재무건전성을 높이기 위해 향후 2년에 걸쳐 1조달러 이상의 자산 매각을 단행할 것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계획의 일환으로 은행권은 50여개의 기업을 매물로 내놓았으나 투자자를 찾는 데 난항을 겪고 있다. 최소 320억달러에 이르는 기업 매각이 차질을 빚자 은행권은 가격을 대폭 깎아내리는 움직임이다.
지난달 억만장자 리처드 브랜슨이 이끄는 버진 머니 홀딩스는 노던 록을 7억4700만파운드(12억달러)에 매입하기로 했다. 총 매입 가격은 10억3000만파운드로, 은행이 장부상 책정했던 기업 가치 11억파운드에 못 미쳤다.
링크레이터스의 얼레인 가니엘 파트너는 “자산을 유지함에 따라 발생하는 자본 소모보다 이를 내재가치보다 싸게 매각하는 편이 자본건전성 측면에서 유리하다”고 전했다.
◆ 유럽 은행권 자본 확충 1147억유로
이날 EBA가 제시한 유럽 은행권 자본 확충 규모는 1147억유로로 10월 예상치 1060억유로를 웃돌았다. 이를 통해 212년 중반까지 기본자기자본비율을 9%로 높여 위기에 대처해야 한다는 얘기다.
독일과 이탈리아 은행권의 자본 확충 규모가 각각 131억유로와 154억유로에 달했다. 특히 독일의 자본 확충 규모는 10월 예상치에 비해 두 배 이상 늘어났다. 프랑스 은행권은 73억유로의 자본을 확충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EBA는 은행권이 자본 확충을 통해 부채위기와 신용경색 조짐에 따른 리스크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뉴스핌 Newspim] 황숙혜 특파원 (higrace@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