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핵심 요약
beta- 피크닉이 23일 데보라 터브빌 국내 첫 사진전을 개막했다
- 터브빌은 기존 패션사진 문법을 거부하고 독자적 분위기를 구축했다
- 전시는 오리지널과 컨템포러리 프린트 200점을 내년 2월까지 선보인다
!AI가 자동 생성한 요약으로 정확하지 않을 수 있어요.
-패션사진의 관습 깬 '배스하우스'부터 직접 쓴 소설 사진으로 구성한 포토콜라주까지 망라
[서울=뉴스핌]이영란 편집위원/미술전문기자=당신이 만약 패션사진이라든가 패션디자인 분야에서 일하길 꿈꾼다면 꼭 봐야 할 사진전이 있다. 미국의 여성 사진가 데보라 터브빌(1932~2013)의 국내 첫 사진전이다.

서울 남산 아래자락 회현동의 전시공간 피크닉(piknic)이 미국의 사진가 데보라 터브빌(Deborah Turbeville)의 전시 《데보라 터브빌: 분위기》를 지난 10월 23일 개막했다. 내년 2월 28일까지 피크닉의 전시실 전관에서 계속되는 이번 사진전은 터브빌의 아카이브를 소장한 미국의 무스컬렉션(MUUS Collection)과 협력해 기획됐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터브빌의 작품전에는 빈티지 프린트와 콜라주 원본을 포함해 오리지널 작품 102점과 뉴욕에서 새롭게 제작한 컨템포러리 프린트 88점 등 200점의 작품이 나왔다.
▲터브빌, 패션을 거부한 패션사진가
데보라 터브빌은 '패션을 거부한 패션사진가'로 불린다. 그만큼 기존 패션사진의 문법을 과감히 거부하고, 새롭고 전복적인 사진작업을 펼쳤기 때문이다. 터브빌은 헬무트 뉴튼(Helmut Newton), 기 부르댕(Guy Bourdin)과 함께 1970년대 세계 패션사진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패션매거진인 ≪하퍼스 바자≫와 ≪마드모아젤≫의 패션 에디터로 일하다가 30대 중반에야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했다. 다소 늦은 나이의 데뷔였지만 대단히 과감하고, 무모하리만치 실험적이었다. 그는 옷과 모델을 선명하고 매혹적으로 묘사하던 당시 패션사진의 관습을 정면으로 거부했다.
터브빌이 사진가로서 자신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린 작품은 1975년 '배스하우스(Bathhouse)' 연작이다. 당시 미국 ≪보그≫에 실린 이 연작은 뉴욕의 오래된 애서 레비 공중목욕탕에서 촬영됐다. 수영복 차림의 다섯 명의 모델은 카메라의 시선을 별반 의식하지 않은 채 각자 상념에 빠겨 있다. 한쪽으로 물이 웅덩이처럼 고여 있는 낡은 샤워실 안에서 모델들은 뜬금없이 기계체조를 하는가 하면, 목욕가운을 걸친채 철퍼덕 바닥에 앉아 있기도 하다.
벗겨진 타일, 낡고 습한 바닥, 침울한 분위기의 이 패션사진은 화려하고 완벽한 아름다움을 강조하던 기존 패션화보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뤄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콘데 나스트의 아트디렉터 알렉산더 리버만의 의뢰로 미국의 최고 매거진인 '보그'를 위해 촬영한 수영복 화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묘한 긴장감과 함께 수수께끼같은 궁금증을 던진다. 이 사진은 출간 즉시 독자들의 거센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터브빌은 훗날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아우슈비츠와 레즈비언, 마약에 대해 수군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그저 공간 안에서 다섯 인물을 배치하려 했을 뿐이다."라고. 패션사진을 상업적 용도 이상의 예술적 표현 매체로 다루고자 했던 터브빌의 올곧은 작가적 태도는 이때부터 드러났다.

▲독립출판과 진(zine)의 선구자
터브빌의 실험은 의뢰받은 잡지나 광고지면을 넘어 독자적인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1975년 제작한 '마키야주
(Maquillage)'는 터브빌이 직접 이미지를 찢고, 오려 붙여 구성한 가상의 패션잡지다. 흐릿한 사진과 손글씨, 파편적인 텍스트를 자유자재로 배치한 이 작업은 오늘날 독립출판과 진(zine)의 제작방식을 반세기 전에 보여줬다는 점에서 더없이 혁신적이다.
1000부 한정으로 제작된 이 출판물은 뉴욕 리졸리 갤러리에서 열린 '환상으로서의 패션'에서 칼 라거펠트, 발렌티노, 이브 생 로랑의 패션 디자인과 함께 소개됐다.
▲파격의 이미지 만들기 'Becoming'
터브빌의 사진에서 숲과 정원, 오래된 건물과 텅 빈 실내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이미지를 만드는데 핵심적인 요소였다. 촬영할 때 배경을 직접 구성한다고 작가 스스로 밝혔듯, 모델과 의상 역시 공간 안에 놓이는 '예술의 한 요소'로 다뤄졌다.

뉴욕에서 20년을 보낸 터브빌은 1970년대 후반 파리로 이주한다. 이미 파리에서 첫 일감을 받아 작업을 하기도 했던 그는 거처를 옮기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리곤 파리의 오래된 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에 매료돼 많은 작업을 시도했다. 1648년 설립된 왕립회화조각학교에서 기원해 1863년 에콜 데 보자르라는 이름으로 개편된 이 학교의 19세기 건축물과 폐허처럼 방치된 공간은 터브빌에게 기절할 정도로 탐나는 촬영장소였다.
터브빌은 학교 곳곳에 새하얀 분을 바른 모델들을 배치해 조각상처럼 촬영했다. 이후 자신의 사진을 핀으로 이어붙여 콜라주로 만들고, 일부 이미지는 네거티브 상태로 반복해 사용했다. '에콜 보자르' 연작은 사진집 '월플라워'(1978)에 수록됐고, 이후 '불완전 과거'(2009)에도 소개되기도 했다.
그는 촬영된 사진을 자르고 겹치거나, 표면을 긁고 훼손하는 '포토콜라주'를 통해 오히려 미완성인 듯한 이미지로 변형하길 즐겼다. 터브빌에게 사진은 촬영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었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잘라낼지, 어떤 이미지를 서로 만나게 할지 결정하는 과정까지가 '사진을 만드는 일'이었다.

▲특정 사조 뛰어넘으며 독자적 스타일 구축
데보라 터브빌의 작업은 특정 사조 안에 가두어 설명하기 어렵다. 워낙 다양하고 전방위적인 실험을 구사했기 때문이다. 그는 선명하고 유혹적인 이미지가 추앙받던 1970년대 패션사진과는 다른 길을 택하며 초기부터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갔다. 을씨년스럽고 낡은 공간이 반복해 등장하는 가운데 인물 또한 가라앉거나 미묘하기 일쑤다. 화면은 대체로 흑백이거나 세피아 톤이었다.
터브빌에게 '분위기'는 사진에서 느껴지는 막연한 인상이 아니라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방식이었다. 그는 시간이 멈춘 듯한 공간과 이야기를 간직한 얼굴을 찾아 대상과 배경, 빛과 어둠을 한 장면 안에 배치했다. 흐릿한 초점과 빛바랜 색조, 의도적으로 긁어내거나 훼손한 흔적은 언제쩍 사진인지 가늠키 어렵다. 인물들 역시 각자의 시간 속에 머물며, 사진의 앞뒤에 놓여 있을 이야기를 상상하게 만든다.

패션은 터브빌에게 작업의 출발점이었지만, 그는 그 형식 안에서 자신만의 인물과 공간을 만들어갔다. 그가 촬영한 여성들은 타인의 시선에 의해 규정되는 여성이라기보다, 터브빌 자신이 바라보고 경험한 '여성의 또 다른 모습'으로 표현되곤 했다. 8등신의 할리우드 스타 배우인 줄리아 로버츠를 찍으면서도 물 속에 텀벙 들어가게 해 마치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묘하게 연출한 게 좋은 예다.
결국 남성 사진가들이 주도하던 패션 사진계에서 터브빌은 여성의 미묘한 내면과 심리를 입체적으로 담아내는 작가로 평가받기에 이른다.

▲영화와 문학, 건축이 '사진'이 되기까지
터브빌은 영화와 문학으로부터 지대한 영감을 받았다. 특히 예술영화에 매료되곤 했다. 알랭 레네, 잉마르 베리만,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영화에서 영감을 얻은 그는 한 장의 사진에도 그 전과 후의 이야기가 존재하는 듯한 장면을 구축해냈다.
문학 작품에서도 큰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러시아 문학에 대한 애정이 깊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여러 차례 찾았다. 그곳에서 작업한 사진집 '스튜디오 상트페테르부르크'(1997)에는 푸시킨, 도스토옙스키 등 러시아 문학가들의 글을 직접 선별해 수록하기도 했다.
터브빌은 또한 오래된 건축과 지나간 시대의 흔적에 푹 빠져지냈다. 1981년 출판사 에디터였던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의 의뢰로 베르사유 궁전을 촬영한 사진집 '보이지 않는 베르사유'를 펴냈다. 재클린의 도움으로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던 궁전 내부에 접근했던 그는 천으로 덮인 가구와 먼지 쌓인 방, 낡은 조각상들을 프레임 안에 신명나게 담아냈다. 한때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던 장소에서 작가는 역설적으로, 쇠락한 아름다움과 사라진 시간의 흔적을 퐆착해냈던 것.

▲멕시코와 러시아의 느린 도시를 사랑한 작가
유목민처럼 세계 곳곳을 오가며 머물렀던 터브빌은 러시아와 멕시코가 특히 각별한 장소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반복해서 찾으며 '느린 삶'의 속도에 빠져든 그는 현재와 과거가 중첩된 이 도시의 독특한 감각을 '러시아적 시간'이라 불렀다. 뿐만 아니라 멕시코 산미겔 데 아옌데에는 아예 집을 마련해 매년 몇 달씩 머무르곤 했다. '보그 이탈리아' 편집장 프랑카 소짜니는 뉴욕과 멕시코에 있던 터브빌의 집을 '아름답게 낡은' 공간으로 기억하며, 그가 세상과 거리를 둔 채 자신만의 세계에서 살았다고 회고했다.
생전에 터브빌은 "은밀하고 낯선 러시아적 시간은 나를 매혹하는 시간이다. 전쟁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러시아적 시간'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그늘에서 활동했던 비범한 소설가와 작곡가, 안무가, 시인들이 작품 속에 빚어온 하나의 물질이었다."라고 토로했다.

▲기억과 상상의 중첩..'분위기' 속으로
"나에게 분위기란 장소를 뜻하지만, 어떤 존재를 뜻하기도 한다. 분위기는 손에 잡히지 않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무엇이다." 그의 고백처럼 '분위기'는 터브빌이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열쇠이자 방식이었다.
보스턴 근교의 상류층 가정에서 자란 터브빌은 메인주의 작은 해안마을에서 한 가족을 촬영했다. 이는 초기작업 '메인에서의 이야기'로 이어지는데 실제 인물들을 상상 속 이야기에 끌어들여, 일어난 적 없는 상황과 장면을 자유롭게 덧붙여갔다. 터브빌이 중요하게 여긴 '분위기'는 바로 이같은 열린 구조 속에서 만들어졌다.
터브빌이 평생 천착한 것은 눈앞의 현실 너머에 존재하는 세계였다. 기억과 상상을 뒤섞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장면을 구성하곤 했던 그는 낡은 실내, 황폐한 정원, 흐릿하게 포착된 인물을 교차시켰다. 터브빌의 사진에 응축된 노스탤지어의 감각은 지나간 시간을 향한 향수를 넘어 한번도 존재한 적 없는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다.
이번 전시는 터브빌의 초기 실험부터 패션화보를 위해 촬영한 사진, 건축과 장소를 탐구한 작업, 후기 포토콜라주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세계를 폭넓게 살펴본다. 나아가 터브빌이 평생 구축해온, 현실과 허구를 오가는 아스라한 '분위기'를 경험하도록 관객을 이끌고 있다.

▲데보라 터브빌은 어떤 작가?= 1970년대 패션사진의 새로운 흐름을 이끈 사진가이자, 사진의 경계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확장해간 예술가다. 모델과 패션 에디터를 거쳐 뒤늦게 카메라를 잡은 그는 '보그'를 비롯해 주요 패션잡지와 꼼데 가르송, 발렌티노, 샤넬, 발렌시아가, 웅가로 등의 패션하우스와 작업했다. 그러나 의상과 모델을 매혹적으로 보여주는 대신, 오래된 공간과 생각에 잠긴 여성들, 흐릿하고 불완전한 이미지에 주목하며 기존 패션사진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터브빌의 작업은 한동안 논의의 중심에서 비켜나 있다가 2020년 MUUS Collection이 그의 아카이브를 인수하면서 본격적인 연구와 재평가가 시작됐다. 미공개 사진과 포토콜라주가 새롭게 공개되고 여러 미술관에서 전시가 이어지며, 패션사진의 통념을 뒤흔들고 예술로서의 사진의 표현영역으로 확장한 작가로 주목받고 있다. MUUS Collection은 20세기 미국 사진을 중심으로 한 컬렉션으로, 소장 아카이브를 체계적으로 정리 연구하고 해석하는 한편 출판, 전시 등을 통해 사진가들의 작업을 폭넓게 소개하고 있다.

터브빌의 작품은 퐁피두센터, 에르미타주뮤지엄 등에서 전시됐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현대미술관, 뉴욕 휘트니미술관, 런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뮤지엄 등에 소장돼 있다.
한편 피크닉 측은 포토 엘리제 관장이자 사진전문 미술사학자인 나탈리 허시도르퍼를 초청해 내년 1월 23일에 터브빌의 작품세계와 사진사적 의미를 살펴보는 강연을 진행한다. 전시관람료는 성인 1만5000원, 청소년 및 어린이 1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