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핵심 요약
beta- 미국은 1953년 이승만 축출안을 검토했다
- 이승만은 반공포로 석방과 북진론으로 맞섰다
- 로버트슨이 정전과 방위조약 타협을 이끌었다
!AI가 자동 생성한 요약으로 정확하지 않을 수 있어요.
에버레디' 검토한 미 정부, 정전 저지·단독북진 선언에 초강수
1953년 6~7월 연쇄 담판…안보조약·경제원조·국군 증강 맞바꾼 협상
[서울=뉴스핌] 오동룡 군사방산전문기자 = 1953년 여름, 미국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동맹국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강제로 축출·격리하는 방안까지 검토했다. 전쟁 3년째, 전선은 교착에 빠졌고 미국 내에서는 인명·재정 손실을 감수한 장기전에 대한 피로감이 커지고 있었다.
워싱턴의 목표는 정전협정 체결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분단을 고착할 정전에 반대하며, 미국의 확실한 방위공약 없이는 협정에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갈등은 1953년 6월 18일 반공포로 석방을 계기로 정점으로 치달았다. 이승만 정부가 유엔군사령부 관리 아래 있던 반공포로들을 전격 석방하면서 판문점 정전회담의 타결 전망은 흔들렸다.
이 대통령은 정전 뒤에도 한국군이 단독으로 북진해 통일을 추구할 수 있다는 의지를 공개적으로 밝혔다. 당시 한국군의 군수·유류 지원은 유엔군 체계에 의존하고 있었던 만큼, 독자 군사행동은 전쟁 재확전과 한미관계 파국을 동시에 부를 수 있는 사안이었다.

미국 정부가 검토한 것이 '에버레디(EVERREADY) 작전계획'이었다. 비밀해제 문서와 관련 연구·보도에 따르면 이 계획은 한국 정부가 정전협정을 실력으로 방해하거나 유엔군 체제에서 이탈할 경우, 이 대통령을 보호구금하고 한국군 내 친이승만 성향 부대를 통제하며 필요시 계엄 통치체제를 가동하는 방안을 담았다. 실제 집행되지는 않았지만, 워싱턴이 이 대통령을 얼마나 중대한 전략 변수로 판단했는지를 보여준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강제조치보다 협상을 택했다. 백악관과 국무부가 서울로 보낸 인물은 당시 국무부 극동 담당 차관보였던 월터 S. 로버트슨이었다. 중국 근무와 전후 동아시아 외교 경험을 지닌 로버트슨은 1953년 6월 25일 서울에 도착해 이승만 대통령과 확대·단독회담을 이어갔다. 신용석 월터로버트슨기념사업회장의 신간 《자유세계의 위대한 시민 월터 S. 로버트슨》은 이를 12차례의 회담으로 복원한다.
신용석 월터로버트슨기념사업회장은 서울대 재학 시절 《대학신문》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으며, 졸업 뒤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해 파리특파원과 논설위원 등을 역임한 원로 언론인이다. 현재 인천일보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하고 있다. 1960년 4·19혁명 당시 서울대 신입생이던 그는 이승만 대통령 하야 직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에 한국 사회의 이승만 인식을 담은 편지를 보낸 일화로도 알려져 있다.
협상 구도는 명확했다. 미국은 한국이 정전협정 발효를 방해하지 않고 단독 북진을 자제하기를 원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전 뒤 북한의 재침에 대비할 제도적 안전장치를 요구했다. 그가 요구한 것은 한미상호방위조약, 국군 증강, 경제원조, 그리고 정치회담 실패 뒤 공산 진영 위협에 대한 미국의 대응 의지였다.
로버트슨은 미국이 헌법과 의회 권한상 통일전쟁이나 재전쟁을 사전에 약속할 수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대신 상호방위조약 추진, 국군 현대화와 증강, 경제 재건 원조, 공산 측 정전 위반 시 대응 의지를 묶은 패키지를 제시했다.
1953년 7월 4일 회담 기록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은 정치회담이 실패하면 "그 다음은 무엇이냐"는 취지로 안전보장 문제를 거듭 제기했다. 로버트슨은 한국이 유엔군과 공조할 때 실질적 지원을 얻을 수 있다고 설득했다.
로버트슨은 이승만 대통령의 정전 반대와 통일 의지를 단순한 고집으로만 보지 않았다. 정전이 분단의 고착으로 이어질 경우 한국이 감당해야 할 안보 불안과 군사적 취약성을 이해하려 했다. 반대로 이승만 대통령도 미국이 한반도 재확전이 소련·중국까지 얽힌 대규모 전쟁으로 번질 가능성을 우려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양측은 서로의 목표를 전면 수용하지는 못했지만, 충돌을 거래로 바꿨다.
협상 타결의 틀은 '정전 수용'과 '안보보장'의 맞교환이었다. 한국은 정전협정을 물리적으로 저지하지 않는 쪽으로 입장을 조정했고, 미국은 정전 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추진과 경제원조, 국군 증강 지원에 나섰다. 정전협정은 1953년 7월 27일 체결됐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은 8월 서울에서 가서명 절차를 거쳐 10월 1일 워싱턴에서 정식 서명됐다.
협상은 순탄하지 않았다. 회담이 진전을 보이면 조약 문안과 비준 절차, 서울과 워싱턴의 정치적 메시지가 다시 쟁점이 됐다. 책은 7월 4일 회담을 결정적 장면으로 다룬다. 로버트슨은 이승만 대통령이 이전보다 합의에 가까워졌다고 판단했지만, 한국 측은 미국의 조약 체결 의지와 미 상원 비준 가능성을 더욱 분명히 확인하려 했다. 이 대통령에게는 구두 약속보다 조약이라는 제도적 담보가 중요했다.

신용석 월터로버트슨기념사업회장은 로버트슨을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실무 협상가로, 이승만 대통령을 정전 국면에서 미국의 방위공약을 끌어내려 한 '협상가'로 조명한다.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단독 북진론은 미국에 심각한 위협이었지만, 한국 입장에서는 정전 이후 생존을 위한 안전보장을 확보하려는 극단적 압박 수단이었다는 해석이다.
다만, 한미동맹의 성립을 개인 한 명의 성과로 환원하기는 어렵다. 냉전의 세계질서,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유엔군 체제, 북한·중국의 위협, 전후 한국 재건 필요성이 함께 작동했다. 그럼에도 1953년 여름의 위기는 한미동맹이 자동적으로 주어진 장치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미국은 이승만 제거 비상계획을 검토할 만큼 정전을 우선시했고, 이승만은 정전 반대와 상호방위조약 요구를 결합해 미국의 안보공약을 압박했다. 로버트슨은 이 충돌의 한복판에서 동맹이라는 타협안을 설계했다.
《자유세계의 위대한 시민 월터 S. 로버트슨》은 전쟁의 막바지, 정전과 재전 사이의 벼랑 끝에서 한국과 미국이 어떻게 불신을 관리하고 국가이익을 조정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북핵 위협과 미중 전략경쟁, 확장억제 신뢰성 논의가 교차하는 지금에도 1953년의 협상은 동맹이 군사력만으로 유지되지 않으며, 정치적 결단과 제도적 신뢰가 함께 작동해야 한다는 점을 환기한다.
gomsi@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