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업계 핫라인 가동
비공개 회의 통해 공정 차질 점검
[서울=뉴스핌] 정영희 기자 = 중동 지역의 전운이 짙어지며 현지에 진출한 국내 건설사들의 안전과 사업 계획에 비상이 걸렸다. 정부와 업계는 긴급 대응 체계를 가동해 임직원 보호에 총력을 기울이는 한편, 이번 사태가 글로벌 공급망과 수주 목표에 미칠 파장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 현장 피해 없으나 인력 안전 최우선…출장·휴가 전면 중단
3일 건설업계에 따르면 미국과 이란 사이의 갈등이 격화하면서 중동 현지에 진출해 있는 국내 주요 건설업체들이 전쟁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지난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선제 타격하며 시작된 이번 분쟁은 이란 최고지도자의 사망 소식까지 전해지며 제5차 중동전쟁으로 번질 수 있다는 전면전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봉쇄 등 총력 반격을 예고함에 따라 글로벌 경제에는 이미 초비상이 걸린 상태다.
현재 이란에 지사나 현장을 운영하고 있는 건설사는 많지 않다. 2018년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이란 핵합의(JCPOA)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경제 제재를 복원했을 당시 많은 기업이 현지 사업을 접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이 이란과 거래하는 제3국 기업까지 제재하는 '세컨더리 보이콧'을 강력하게 실행하자, 달러 결제망을 포기할 수 없었던 국내 건설사들은 대규모 수주 계약을 해지하고 전면 철수했다.
이란에 현장은 없지만 지사는 운영 중이던 DL이앤씨는 현재 직원을 안전하게 대피시킨 상황이다. DL이앤씨 관계자는 "테헤란 지사에서 근무하던 직원 1명은 상황의 심각성을 고려해 선제적으로 대피를 마쳤으며, 현재는 제3국에서 근무를 이어가고 있다"며 "임직원의 안전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 현지 상황을 지속적으로 점검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현대건설, 대우건설, 한화 건설부문, 삼성E&A 등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라크 등 주변국에서 활발히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현대건설에는 사우디 자푸라 유틸리티 사업과 380kV(킬로볼트) 송전 공사를 포함해 ▲이라크 3개 ▲카타르 1개 ▲사우디 13개 ▲UAE(아랍에미리트) 1개 ▲쿠웨이트 1개 등 총 19개 현장이 있다.
현대건설 관계자는 "현재까지 현장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으며, 임직원과 가족의 안전을 위해 비상상황 대응 체계를 유지하고 출장과 휴가 등 이동을 전면 제한했다"고 말했다.
이라크에서 신항만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대우건설은 이라크가 친이란 성향을 띠고 있어 대규모 공격 대상이 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고 진단했다. 다만 영공 폐쇄로 인해 휴가와 출장은 중단된 상태다. 대우건설 관계자는 "이미 이전부터 육상과 해상 등 다양한 루트를 통한 직원 철수 계획을 수립해 뒀으며, 상황이 시시각각 변하는 만큼 이에 맞춰 만전을 기해 대응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삼성E&A는 사우디 파딜리 가스 증설 사업과 카타르 에틸렌 저장 설비 사업 등을 맡고 있다. 현재 비상대응체계를 운영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이라크 비스마야 신도시를 짓고 있는 한화 건설부문은 현지에 체류 중인 임직원과 가족 40명의 안전을 위해 대사관 및 이라크 군·경찰과 상시 협력 체계를 가동하고 있다. 한화 건설부문 관계자는 "현재까지 직접적인 영향은 없으나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 차원의 대응도 속도를 내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이날 오후 해외건설협회와 주요 건설사들이 참여한 비공개 회의를 열어 현장 안전과 공정 차질 가능성을 논의한다. 분쟁 직후 비상대책반을 즉시 가동해 해외건설협회 및 주요 기업들과 함께 현지 동향을 모니터링하고 있다. 해외건설협회 관계자는 "국토부와 진출 기업 간 핫라인을 통해 현지 상황을 상시 점검하고, 현장 인력의 안전을 최우선 원칙으로 삼아 필요한 조치를 기민하게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 수주 목표 달성 '비상'…분쟁 장기화 시 신규 수주 절벽 오나
해외건설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해외건설 수주액은 472억7000만달러(한화 약 63조8145억원)를 기록했다. 이 가운데 중동 지역 수주액은 118억8000만달러(약 16조380억원)로 전체의 25.1%를 차지했다. 2014년 이후 11년 만에 달성한 최대 실적이다.
정부는 이를 동력 삼아 올해 수주 목표를 500억달러(약 67조5000억원)로 설정하고 '제2의 중동 붐'을 기대해 왔다. 국제통화기금(IMF) 역시 지난해 10월 전망에서 중동·북아프리카 경제가 석유 수출량 증가와 비석유 부문의 성장세에 힘입어 2026년에는 3.7%의 성장률을 기록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번 분쟁이 장기화하고 여타 산유국들이 전쟁에 개입할 경우 리스크는 커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원유 생산 시설이나 수송로가 침해받아 유가가 급등할 경우 우리 경제 전반에 큰 타격이 예상된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 분석 결과 국제 유가가 10% 상승할 때 수출 금액은 약 0.2% 증가하는 데 그치지만, 수입 금액은 약 0.9%나 급증해 무역수지를 급격히 악화시킬 수 있다.
건설업계에선 이번 사태가 길어질 경우 신규 발주가 줄어들고 공사가 지연되면서 중동 건설 시장 자체가 위축될 것이란 우려가 고개를 든다. 김태준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신성장전략연구실장은 "공급 측면에서 건설산업뿐 아니라 모든 산업 내 원자재 가격 상승과 수급 불안정이 발생할 수 있다"며 "건설산업이 국내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만 타 산업에 비해 공급망 관리가 부족한 편이기에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공급망 고도화와 안정화 작업이 시급하다"고 제언했다.
현재까지는 이란이 페르시아만 국가들을 상대로 보복 공격을 가하고 있으나 산업 설비에 대한 직접적인 타격은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그러나 물류 이슈 등으로 인해 전반적인 공정 진행이 느려질 수밖에 없다.
공사 지연이 발생하더라도 제도적 보호 장치는 존재한다. 전쟁은 불가항력 공기 연장 사유에 해당, 건설사에 부과되는 지체상금이 면제되거나 공사 기간이 연장돼 당장의 손실은 일부 방어할 수 있다. 장문준 KB증권 연구원은 "이 같은 정세 악화가 이익보다는 매출에, 매출보다는 수주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라며 "신규 프로젝트 발주가 중단될 경우 '500억달러 수주'라는 정부의 목표 수정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chulsoofriend@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