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각 지역별 수용 능력을 고려할 필요"
[서울=뉴스핌] 조수민 기자 = 정부가 지난달 29일 주택 공급 대책을 발표한 이후 서울시 자치구들이 잇따라 반대 입장을 내놓고 있다.
정부는 서울 시내 공급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최대한 공급량을 확보해야 한다는 시각이다. 그러나 용산구, 동대문구, 노원구 등에서는 단순 물량 확보보다는 상업 및 업무시설 유치, 기반시설 마련, 교통망 확충 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전문가들은 시장에 공급 신호를 주겠다는 정부의 방향성이 옳다고 보면서도, 각 지역별 수용 능력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 용산구·노원구·동대문구 입장문 발표..."인프라 고려해야"
2일 업계에 따르면 정부의 1·29 공급 대책에 대한 서울시 자치구들의 반발이 커지고 있다. 이번 대책에는 ▲용산구 용산국제업무지구(1만가구) ▲노원구 태릉CC(6800가구) ▲동대문구 국방연구원 및 한국경제발전전시관(1500가구) 등 주택을 공급하겠다는 구상이 담겼다. 이에 자치구들은 과도한 주택 공급이 인구 밀집을 가중시켜, 이미 거주 중인 구민들의 생활 여건과 도시 환경의 질을 저하시킬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용산구는 대책 발표 당일 입장문을 통해 "용산구는 이미 한남뉴타운 등 대규모 정비사업이 진행 중인 지역으로, 여기에 용산국제업무지구 1만 가구가 들어설 경우 학교·통학 여건 악화, 교통체증 심화, 생활 SOC 부족 등 생활권 전반에 심각한 부담이 불가피하다"며 "기반시설 대책 없는 물량 중심 접근은 전형적인 난개발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용산 정비창 일대를 개발하는 '용산국제업무지구' 사업은 대책 발표 전부터 주택 공급량을 두고 국토교통부와 서울시의 갈등이 있었다. 국토부는 공급 효과가 유의미할 정도의 수치를 1만가구로 보고 있다. 그러나 서울시는 8000가구 이상 공급 시 1인당 녹지비율이 줄고 소형 위주의 고밀 주택이 대거 들어가 '국제업무지구' 사업이 '대형 주거단지화'로 변질될 수 있다고 반발한다. 용산구는 지난달 9일 "1만가구 공급은 국제업무지구 특유의 전문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입장을 내놓은 바 있다.
노원구도 같은날 입장문을 내고 "태릉골프장이 개발제한구역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태·강릉과 인접해 있다는 지리적인 특징을 고려할 것, 오랜 기간 서울의 베드타운으로서 부족한 도시 인프라를 확충하고 장기적인 성장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지역의 과제를 반영할 것, 노후되어 가는 과밀주택과 교통난으로 주거의 질이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고 있는 주민들의 고통을 해소할 것 등을 (정부에) 요구한다"고 밝혔다.
'태릉CC' 사업은 노원구 공릉동 군 골프장(태릉 컨트리클럽) 부지를 개발하는 것이다. 2020년 문재인 정부는 이 부지에 주택 1만가구를 짓겠다는 구상을 발표했으나 구민 반발로 6800가구로 공급 규모를 축소했다. 공릉동 화랑대사거리 일대 등 인근 도로가 이미 교통 혼잡을 겪고 있어, 해당 부지에 대규모 주택 공급이 이뤄질 시 교통 문제가 더욱 악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컸다. 여기에 부지와 인접한 세계문화유산 태릉·강릉의 경관을 훼손할 수 있다는 논란이 불거지면서 개발이 무산됐다. 현재 노원구는 6800가구라는 수치는 수용 가능하지만 앞서 문제가 됐던 교통과 문화재 문제를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대문구는 지난달 30일 입장문을 발표하고 "대상지는 홍릉 일대 바이오 연구개발 벨트의 중심축으로 고려대·경희대·KAIST 서울캠퍼스 등 주요 대학과 연구기관이 밀집해 있다"며 "이는 대학 창업과 연계해 산업기지화할 수 있는 요지이자 연구·창업·인재 양성 기능이 함께 작동해야 하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이어 "구는 경제 기반이 상대적으로 취약하고 주택 공급 비율이 높으며 소형 주택 중심의 공급이 집중되어 있는 지역 여건"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단순한 주택 물량 확대가 아니라 양질의 일자리 창출과 지역경제 활성화를 견인할 전략 거점의 조정·추진"이라고 덧붙였다.
국방연구원과 한국경제발전전시관은 동대문구 청량리동에 위치한다. 2020년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인근 홍릉동 일대를 '서울 홍릉 강소연구개발특구'로 지정했다. 이후 동대문구는 국방연구원 부지를 포함한 인근 일대에 바이오·메디클러스터를 조성하고 의료 인프라를 구축하고자 했다. 그러나 해당 부지에 주택이 들어서게 되면 이 일대에 대해 그간 논의돼 온 개발 방향과는 다소 '결'이 다른 활용이 이뤄지는 것이다.
◆ 자치구, 정부 제동 방법 없어...전문가 "지역별 수용 가능 물량 살펴야"
정부가 일방적으로 사업을 추진한다고 해도 자치구들이 이를 저지할 수 있는 방안은 없다. 실질적으로 자치구의 주장이 반영되기 위해서는 각종 인허가권을 보유한 서울시를 경로로 삼아야 한다. 다만 공공주택특별법에 따라 공공주택 건설 시 국토부 장관이 지구단위계획 승인 권한을 갖는다. 이 때문에 한 자치구 관계자는 "구 입장을 서울시에 전해도 시가 국토부를 제동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고 말한다.
추가적인 변수도 있다. 지난해 말 발의된 '도심 내 주택공급을 위한 노후 공공청사 등 복합개발 특별법안'은 국가·지자체·공공기관이 보유한 유휴 국·공유지에 대해 국토부 장관이 직접 개발 대상지를 지정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국토부 장관이 '복합개발지구'를 지정하는 과정에서 관할 시·도지사와의 합의가 30일 이내에 이뤄지지 않으면 그 이후에는 협의가 마무리된 것으로 간주한다.
해당 법안은 지난해 말 국토교통위원회 등 관련 상임위원회에 회부된 상태다. 정부는 연내 특별법 제정을 완료하겠다는 목표다. 서울시가 자치구의 반대 입장을 정부에 전달하더라도, 정부가 해당 법을 활용할 경우 자치구의 의견이 실제 사업 추진 과정에서 반영되기 어려울 수 있다. 서울시는 우선 용산국제업무지구 사업의 경우 도시개발법이 적용돼 인허가권을 시가 갖는다는 시각이다. 그러나 특별법 제정 이후 법 적용을 둘러싼 해석 차이가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전문가들은 주택 공급을 확대하고자 하는 정부 정책 기조가 옳다고 보면서도, 각 자치구의 실정을 고려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박인호 숭실사이버대 교수는 "가령 강북 지역의 가장 큰 문제는 도로가 부족하다는 것인데 도로 마련 여부, 이를 위한 비용 지출 등이 준비가 안 된 상황에서 노원구 개발을 일방 추진해서는 안 된다"며 "각 자치구의 인프라에 대한 심층 조사를 선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도시정비사업의 규제 개선을 병행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남혁우 우리은행 부동산연구원은 "각 지역의 기반시설 부담 능력을 초과하는 공급 물량은 부담일 수밖에 없다"며 "자치구와의 협의로 물량을 일부 조정하되, 정비사업 관련 규제를 완화해 공급량을 추가 확보하는 식으로 절충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분석했다.
blue99@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