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이지은 기자 = "대사 자체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발연기라는 말을 들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어요.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대사 전달만 잘 하자는 목표가 있었죠."
배우 김희애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돌풍'을 통해 또 다른 캐릭터를 입었다. 세상을 뒤엎기 위해 대통령 시해를 결심한 국무총리 박동호(설경구)와 그를 막아 권력을 손에 쥐려는 경제부총리의 대결을 그린 이번 작품에서 김희애는 더 큰 권력을 원하는 정수진 경제부총리를 맡았다.
[서울=뉴스핌] 이지은 기자 = 배우 김희애 [사진=넷플릭스] 2024.07.05 alice09@newspim.com |
"대본 초반을 읽었을 때 이 작품은 박동호의 드라마라고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그저 박동호를 괴롭히는 악당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서사를 알게 되고 감정이입이 되니까 정수진도 너무 안됐더라고요(웃음). 또 회차가 거듭되면서 너무 커져가는 인물이더라고요. 정수진이 불쌍하게 느껴져서 너무 나쁘게만 보이지 않길 바랐어요."
작품 속 정수진은 대통령 장일준이 시해된 후 차기 권력을 독차지하려는 야심가이다. 이에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박동호를 몰락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 전쟁을 시작한다.
"처음부터 정수진도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요. 그의 서사를 보시면 아시잖아요. 악당이 아닌, 시대가 낳은 피해자이자 괴물이라고 느껴지더라고요. 너무 불쌍한 인간이라고 생각해서 정이 갔고요. 그 순간이 되면 누구나 괴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작가님이 박동호는 위험한 신념을, 정수진은 타락한 신념을 가졌다고 이야기를 하셨는데 정수진도 처음엔 정의로웠죠. 작은 정의감을 가진 소녀였는데 시대로 인해 바뀌어버린 인물 같았어요."
[서울=뉴스핌] 이지은 기자 = 배우 김희애 [사진=넷플릭스] 2024.07.05 alice09@newspim.com |
정치권 이야기를 그리다보니 배우들은 엄청난 양의 대사를 소화해야만 했다. 그리고 드라마 '추적자 더 체이서', '황금의 제국', '펀치'로 '권력 3부작'으로 불리는 작품을 집필한 박경수 작가의 특유의 문어체가 어려움을 배가시켰다.
"처음에 대사가 너무 어려워서 정확하게 발음을 하려고 했어요. 저도 드라마를 보면서 대사를 못 알아들어서 돌려 보는 게 너무 싫었거든요. 저도 대사 읽는 게 힘들었는데, 작품 전개가 빠르다 보니까 연기 신경 쓰지 않고 대사만 잘 전달하자는 마음으로 시작했죠. 생활연기는 조금 버벅여도 넘어갈 수 있는데 저희 작품은 전혀 그렇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발연기라는 말 들어도 괜찮으니 대사 전달만 잘 하자는 목표가 있었죠."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의 문화선전국장까지 맡았지만 남편 한민호(이해영)이 타락한 권력과 손을 잡은 것을 알게 된 후, 정수진은 변하지 시작한다. 그리고 정치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여자 정치인을 연기하며 쾌감을 느꼈다고.
[서울=뉴스핌] 이지은 기자 = 배우 김희애 [사진=넷플릭스] 2024.07.05 alice09@newspim.com |
"정수진이 경제부총리잖아요. 그러다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가면서 높은 위치에 올라가고요. 이렇게 여성 캐릭터가 높은 위치까지 올라간 게 흔치 않은 것 같아요. 권력욕으로 남자와 똑같이 맞서는 부분에 있어서 쾌감과 대리만족도 느꼈죠(웃음). 최대한 박동호에게 안 지려고 했고, 정수진이 매력적으로 보이길 바랐어요. 그러다 남편이 죽고 나서 정말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관차가 된 것 같더라고요. 본인을 모두 놓아버리고 괴물이 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보시는 분들에게도 어릴 적 순수한 정수진이 사라지고 괴물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여드리고자 했고요. 이 모든 인물과 내용이 픽션이지만 시청자들의 몰입이 깨지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연기하려고 했죠."
정치권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다보니 작품 속 인물들은 대한민국 정치계 여러 인물을 섞은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박동호도, 정수진 역시 실존 인물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서울=뉴스핌] 이지은 기자 = 배우 김희애 [사진=넷플릭스] 2024.07.05 alice09@newspim.com |
"'돌풍'이 정치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정치물이란 느낌은 별로 안 들었어요. 단순히 인간의 밑바닥까지 들춰내는 작품이고, 정치는 그런 부분을 보여주기 위한 재료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현실도 너무나도 다이내믹하게 돌아가다 보니까 겹치는 상황이 있어서 보시는 분들도 많은 상상을 하시는 것 같아요. 많은 분들이 이야기를 나눠주시고, 상상해주시는 게 배우로서는 보람되고 좋아요(웃음)."
1983년 영화 '스무해 첫째날'로 데뷔해 벌써 42년차 배우가 됐다. 그간 영화 '쎄시봉', '윤희에게', 드라마 '부모님 전상서', '밀회', '부부의 세계' 등으로 다채로운 캐릭터를 선보이며 대한민국 대표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이제는 상대배우에게 좋은 배우가 되고 싶어요. 예전에는 시청자들에게 좋은 배우가 되길 바랐고, 다음으로는 감독과 스태프들에게 좋은 배우로 보이길 바랐어요. 그런데 이제는 제 앞에 배우와 감정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그게 좋은 선순환을 만들어 내는 것 같아요. 상대 배우와 좋은 시너지가 생겨야 그게 모니터로 보이고, 그걸 스크린으로 만드는 거잖아요. 그리고 시청자들은 그걸 보고 감동을 받고요. 그렇게 되려면 일단 마음을 곱게 써야겠죠? 하하. 상대 배우에게 좋은 배우가 되면 제 연기가 좋아지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는 상대 배우에게 좋은 상대역이 되고 싶어요."
alice09@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