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 공기업에 회사채 발행 자제 권고
공공채로 적자 돌려막기 한 공기업 망연자실
사태 커지자 발 뺀 기재부…"현황 점검 수준"
전문가 "공공채 대출 전환시 은행 재무부실↑"
[세종=뉴스핌] 정성훈 기자 = 정부가 공기업 회사채 발행 제한이라는 '무리수'를 두면서 공기업들은 망연자실하고 있다. 그동안 대규모 적자를 공공채 발행으로 버텨왔는데, 더 이상 적자 돌려막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수십조원의 공공채를 은행대출로 돌리라는 정부 권고에 은행들 역시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그동안 공기업들은 정부 보증을 믿고 채권을 마구 발행해 왔는데, 사실상 보증의무를 은행에 넘긴 셈이다.
이에 따라 은행들의 재무부실 우려도 커지고 있다. 은행대출의 경우 통상적으로 담보를 요구하지만, 공기업이 보유한 담보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공기업들의 적자가 누적되면서 경영악화가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무리한 대출이 곧 은행들의 연쇄 파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터져 나온다.
◆ 정부, 공공채 발행 제한 권고…공기업 '망연자실'
3일 금융당국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지난달 23일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에서 발표한 '50조원+α 유동성 지원 조치'의 후속조치로 범정부차원의 협의를 통해 공공기관의 채권발행 분산을 추진 중이다.
앞서 금융위는 지난달 28일 금융감독원, 산업은행·기업은행·중소기업은행 등 정책금융기관, 금융협회, 금융회사 등 범금융권이 참여하는 회의를 열고 "회사채 시장의 수급요인을 개선하기 위하여 기재부 등을 중심으로 범정부 차원에서 관계기관과의 협의를 통해 공공기관의 채권발행 분산을 추진 중"이라며 "산은·기은 등 정책금융기관의 채권발행도 최소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진=금융위원회] |
아울러 금융위는 "관계부처와 함께 주요 기관투자자 등을 대상으로 최근의 금융시장 상황을 감안해 중장기적 관점에서 기반한 투자결정과 함께 과도한 채권매도, 매수축소 등을 자제해 줄 것에 대한 협조를 요청했다"고 덧붙였다.
금융위의 이날 발표로 채권 발행으로 적자 돌려막기를 해오던 공기업들은 망연자실한 분위기다. 그동안 부실한 경영상황에서도 정부 보증을 믿고 채권을 발행해왔는데, 레고랜드 사태 등으로 자금경색이 심화되자 정부가 공기업들과 거리두기에 나섰다는 것이다.
한 공기업 관계자는 "매년 쌓이는 적자를 메우기 위해 채권발행이 가장 손쉽고 간편한 방법으로 인식돼 왔다"면서 "고금리 상황에서 정부가 아무런 혜택없이 은행에 돈을 빌리라고 압력을 넣으면 경영 악화를 더욱 부추길 수밖에 없다"고 우려를 표했다. 이 관계자는 또 "전 세계적으로 금융불안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해외 채권 발행도 쉬운 일이 아니다"며 "결국 공기업들을 옥죄기 위한 정부 조치가 본격화된 셈"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특히 올해 누적 적자가 40조원에 이를 것으로 알려진 한국전력은 금융당국의 이번 조치로 사면초가에 빠졌다. 전기료 인상 가능성을 열어두고 대규모 적자를 채권 발행으로 버텨왔는데, 당장 먹고살길이 막막한 상황이다. 금융권 및 채권 전문가 등에 따르면 최대 공기업인 한국전력이 국내 공공채 시장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전은 올해 들어서만 23조5000억원 수준의 한전채를 발행했다.
황순주 KDI 시장정책연구부 연구위원은 "누적 적자가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전은 일단 돈을 빌려야 살수 있는 상황인데, 정부는 현재 채권 시장의 유동성이 너무 부족하니 은행 대출 또는 해외 채권으로 돌리라고 하는 것"이라며 "하지만 고금리 상황인데다 대출을 위해서는 은행에 담보를 줘야하는데 공기업들의 담보가 얼마나 인정받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사태가 일파만파 커지자 책임 당국인 기재부는 한 발 물러난 상황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일부 언론에서 정부가 공공채 발행을 제한하기 위해 공문을 보낸것 처럼 오해하는 측면이 있다"면서 "기관에 혹시 발행 예정 채권을 대출로 전환한다던가 하는 방식으로 물량 자체를 조금 줄일 수 있는 여지는 없나 파악하는 정도"라고 설명했다.
◆ 금융불안 은행까지 확대 가능성…"정부 예산 지원 불가피"
더 큰 문제는 공공채 물량이 은행으로 옮겨갈 경우다. 수십조원 규모의 공공채 물량을 은행 대출로 전환할 경우 은행도 재무부실이 심화될 수 있다.
황 연구위원은 "수십조원에 이르는 공공채를 대출로 한꺼번에 전환할 경우 안그래도 금융경색이 심화된 상황에서 은행이 금리를 한꺼번에 높일 수 밖에 없고, 공기업들의 자금줄은 또 다시 막히게 된다"면서 "만약 은행들이 정부 입김에 대출을 확대한다고 해도 금융불안 요인이 자본시장에서 은행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그는 또 "공공채의 경우 공적 자산이기 때문에 은행들이 골치 아픈 면도 있고, 현재 채권 대기 발행액이 수십조원에 이를텐데 이 물량을 은행 대출로 다 소화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이어 "자본시장보다 은행이 상대적으로 건전하기 때문에 위험 분산이라는 측면이 있어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사실은 미봉책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가운데)이 23일 서울 중구 은행연합회에서 열린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를 마친 후 기자들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기획재정부] 2022.10.23 jsh@newspim.com |
이에 전문가들은 공기업 부실을 막기 위해서라도 정부 예산 지원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한전의 경우 우크라이나 사태 등 대외요인에 따라 전력도매가격(SMP)이 뛰고 있는 상황에서 요금 인상이 불가피했는데, 정부가 이를 제지하면서 적자가 쌓이고 있다는 것이다.
황 연구위원은 "한전이 요금을 올리지 않으면 그걸로 인해 발생하는 손실을 국민들의 세금 등으로 부담하거나 해야 하는데, 현재는 채권 발행으로 돌려막기 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궁극적으로는 기재부가 예산 지원을 통한 자본 확충을 해줘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경제학과 교수 역시 "공공기관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최소한 공기업들의 숨통은 틔어줘야 하는데, 이것도 하지마라 저것도 하지마라 하면서 궁지에 몰아넣고 있다"면서 "공기업 부실은 곧 국민들의 세금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어 정부가 나서 책임있는 자세를 보여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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