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부터 2월 10일까지 서울 강남 청화랑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화가 임만혁(54)의 스무번째 개인전이 서울 강남 청화랑에서 열리고 있다. 2월10일까지다.
임만혁의 그림을 보노라면 모든 아티스트에게 개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결국 모든 예술행위란 타인과 구별되는 그 무엇의 작품으로 타인의 시선과 감정을 '장악'함으로써 공감대를 형성하며, 종국에는 인정받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타인과의 '다르게 하기'가 자신의 관념에만 사로잡혀 있으면 배척당할 것이요, 너무 일반적이라면 평범하다 하여 또 거들떠보지 않게 되는 것이니, 그 균형대 위를 아슬아슬하게 걸어가는 행위가 모든 예술가의 숙명일 터다.
임만혁을 다른 화가와 구별짓게 만드는 가장 큰 요소는 바로 목탄(木炭)이다. 목탄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용하는 소묘 재료다. 가볍고 편리하며 용이하게 지울 수도 있어서 구도의 밑그림이나 습작 및 스케치에 매우 적합하다. 그런데 누구나 사용하는 그 목탄이 임만혁만의 개성의 가장 큰 요소다. 마치 '콜롬부스의 달걀'같은 깨우침을 얻느냐가 평판을 가름하는 것이나, 그 또한 오랜 기간의 고민과 갈등, 천착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작품 '말과가족21-3(67X175cm 한지 위에 목탄 채색)과 작가 임만혁. 2022.01.20 digibobos@newspim.com |
잘 알려져있다시피 임만혁은 원해 서양화를 전공했다. 그러다가 다시 동양화를 시작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바로 인물화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어려서부터 사람과 소, 개, 말 등 흔히 볼 수 있는 주변의 가축을 그리길 좋아했다. 미대에 진학하고 나서 사람 얼굴을 생생하게 표현한 인물화(초상화가 아니다)를 그리고 싶었는데, 유화로는 그게 힘들었다. 유화로는 인물의 정신세계를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런데 동양화는 옛날부터 그런 작업을 해오고 있었다. 단순한 선, 코믹한 얼굴에도 그 사람의 심상(心象)이 배어나온다. 마침 중앙대 한국화과에 김선두 교수님을 비롯해 인물화의 대가들이 몇분 계셨다. 그래서 대학원을 들어갔다."
동양화를 다시 배운 것이 임만혁 껍질벗기(탈피)의 첫번째였다면, 두번째가 바로 목탄 사용이었다.
"한국화에서 목탄 사용은 일종의 금기사항이다. 그런데 나는 남들보다 한국화를 늦게 배운 터라 그 세월의 간극을 쫓아가려니 매우 막막했다. 그래서 목탄을 한번 사용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 실험이 오늘날의 나를 만들었다."
미술평론가 오광수는 그의 이러한 작품세계를 두고 "임만혁은 전통이나 외래 사조에 주눅 들지 않은 자유로운 사유로 인해 더욱 우리의 관심을 끌게 한다. 전 세대의 작가들이 전통이나 외래 사조에 짓눌려 제대로 자신의 조형세계를 펴 보이지 못한 점을 감안하면 그의 동 서양화를 아우르는 조형의 진폭은 이 시대의 하나의 모델이 되기에 충분하다."라고 평가했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작품 '호랑이21-1' 41X33cm, 목탄 위에 채색. 2022.01.20 digibobos@newspim.com |
임만혁은 한국화의 전통대로 한지에 아교칠을 한 다음 목탄 스케치를 하고, 그 위에 채색을 덧칠해간다. 여기에 목탄 작업이 덧붙여지는데 자세한 노하우는 그만의 비밀이라서 공개할 수 없다고 한다.
이렇게 인물에 대한 자세한 관찰, 그리고 목탄 작업의 두 가지 요소가 임만혁 그림의 개성이다. 건조하면서도 날카로운 흔적을 남기는 목탄은 현대인의 예민한 감수성을 표현하기 좋았다. 가느다란 팔다리, 퀭한 눈, 커다란 머리를 가진 임만혁 특유의 현대인의 모습이 한지에 그리는 목탄 작업으로 인해 탄생했다. 이 독특한 표현법은 단박에 미술계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자고 일어나니 유명해졌다'는 말은 임만혁에게도 통용된다. 그의 행운은 2002년 시카고 아트페어에서 시작됐다.
"2000년 동아일보에서 주최하는 동아미술상을 수상하고, 드디어 뭔가 되는가 싶었다. 그런데 그 이후 일년 동안 어느 곳에서도 연락이 없었다. 실망이 커서 7년 동안의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인 강릉으로 내려갔다. 그런 즈음 한 화랑(박여숙 화랑)에서 아트페어에 출품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의가 들어왔다. 상업화랑에서 연락이 올줄 꿈에도 몰랐는데, 아트페어 출품 제안까지 받으니 꿈만 같았다. 그렇게 작품을 출품하고 나서 전화를 받았는데, 아트페어에 내놓은 작품 10점이 모두 팔렸다고 했다. '솔드 아웃(sold out)'이란 말을 그 때 처음 들었다."
개인전도 한 번 열지 못한 무명화가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2002년 젊은 작가들이 선망하는 성곡미술관 주최 '내일의 작가' 공모에도 당선되고, 박여숙 화랑의 전속작가가 되어 5년 동안 월급을 받았다. "대학원 다닐 때 돈이 없어서 송탄의 미군부대 앞에서 비디오 테잎도 팔고,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했다. 그랬던 적도 있는데, 생계 걱정 없이 그림만 그리게 되니 너무 좋았다." 이후 네 번의 개인전도 열었고, 2008년에는 상하이 개인전도 열었다.
임만혁 그림의 가장 큰 주제는 가족이다. 동물들이 늘상 등장하지만, 동물들은 가족을 볻보이게 하는 부차적 오브제일 따름이다. 가족들은 양과 말, 닭의 등을 타고, 새의 날개 위에 올라 앉기도 한다. 그의 실제 가족은 이제 11살된 아들과 부인, 그렇게 세 명이지만 그림에서는 딸을 포함해 네 명이 주로 등장한다. 그림 속 가족의 모습은 처음에는 약간 어두웠으나, 그의 나이가 들면서 점차 밝아지고 있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말과가족22-1' 175X133cm. [사진=청화랑] 2022.01.20 digibobos@newspim.com |
"인물화를 어떻게 그릴까 고민할 때 사람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사람이란 생각을 많이 했고, 그래서 가족이 떠올랐다. 일상에 녹여낸 가족으로 인간 군상을 표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그림에서 가족들은 거의 한 방향을 바라본다. 그게 가족이 아닌가 싶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나와가족21-3' 87X132cm [사진=청화랑] 2022.01.20 digibobos@newspim.com |
마지막으로 사람의 얼굴과 인상을 어떻게 기억해내고 그림으로 옮기는지 물어보았다.
"여러서부터 사람들 얼굴을 관찰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왜 저런 표정을 지을까 상상하기도 했다. 일단 표정을 마음 속에 넣고 그걸 화면에 옮기는 작업을 반복 연습한다. 그래야 손이 인상을 기억한다. 상상으로의 변형도 그렇게 이루어진다. 한지에 그림을 그리려면 일필휘지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평소 드로잉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종이가 장악된다."
전업작가 20여 년에 스무 번 개인전을 여는 화가의 노하우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바다풍경19-3' 44X66cm [사진=청화랑] 2022.01.20 digibobos@newspim.com |
임만혁은 강릉에서 살고 거기서 작업한다. 취미는 낚시다. 그런데 그의 그림에 물고기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취미 때문일까? 그에게 다음에는 물고기와 함께 하는 가족의 그림을 보면 좋겠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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