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없는 옛 서민화가들의 자유로운 미감과 상상력,
시대를 관통하며 오늘의 조형언어와 맥 닿아
[서울=뉴스핌] 이영란 편집위원 = 이번에는 '민화 문자도'다. 현대미술을 다루는 화랑이면서도 우리의 귀한 문화유산인 '민화'를 알리는데도 힘써온 현대화랑(회장 박명자)이 문자도 전시를 마련했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의 현대화랑은 '문자도, 현대를 만나다'라는 기획전을 오는 10월 31일까지 개최한다. 지난 2018년 '민화, 현대를 만나다'라는 타이틀로 조선의 아름다운 '화조도'를 재조명해 삼청로에 긴 줄이 서게 했던 현대화랑은 그 후속으로 문자도를 재조명한다. '문자도, 현대를 만나다'에서는 조선시대의 격조 높은 문자도 11점과 민화문자도를 오늘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현대미술가 박방영, 손동현, 신제현 3인의 작품 13점이 나란히 내걸렸다.
[서울=뉴스핌] 이영란 기자= '문자도' 19세기, 8폭 병풍, 종이에 채색, 각 62×32.5cm. [사진=현대화랑] 2021.9.29 art29@newspim.com |
고대에는 문자와 그림이 한 뿌리였다. 거북뼈에 새긴 갑골문이나 돌에 새긴 글자는 모두 주변의 대상을 그림처럼 형상화한 것들이었다. 역사시대를 거치며 문자와 그림은 나눠졌지만, 문화와 그림의 합일을 보여주는 문자도는 오늘까지도 그 맥이 도도히 이어지고 있다. 특히 그중에서도 조선의 민화 문자도는 글자와 그림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지며, 선조들의 일상 속으로 깊이 스며들어 의미가 더 깊다.
조선 후기와 구한말의 문자도에는 선조들의 염원과 희로애락이 오롯이 담겨 있다. 이번 기획전 중 빼어난 조형미를 보여주는 19세기 후반의 '효제충신예의염치' 문자도는 지금껏 공개된 다양한 형태의 유교문자도 중에서도 매우 빼어난 작품이다. 유교의 덕목을 여덟 글자로 압축한 이 8폭 병풍은 오늘의 미감으로 볼 때도 더없이 독창적이고 세련됐다. 그 까닭은 문자의 자획을 상형으로 꾸미던 전형적인 양식을 탈피해, 한 폭의 추상화처럼 단순화시켰기 때문이다.
이 문자도의 각 문자에는 모란, 연꽃, 국화, 매화, 해당화 등 전통 꽃그림의 대표 상징들이 유려하게 새겨져 있다. 이로써 '효제충신예의염치'라는 유교윤리가 아름답게 구성됐다. 이런 근사하고 세련된 문자도 병풍이 내 공간에 놓여있다면 엄격한 유교윤리도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을 듯싶다. 비록 작가의 이름은 알 수 없으나 당대 최고의 솜씨를 지녔을 법한 천재화가는 개개의 글자를 표현하는데 있어 자신감 넘치는 파격을 시도했다. 도자기를 연상시키는 매끄러운 '유엽전'과 날렵한 건축물같은 '상방대전'의 전서를 조합해 시대를 뛰어넘는 회화적 미감으로 구현해냈다.
[서울=뉴스핌] 이영란 기자='제주문자도', 20세기 전반, 8폭 병풍, 종이에 채색, 각 88.5×48cm. [사진=현대화랑] 2021.9.29 art29@newspim.com |
유교윤리인 '효제충신예의염치'를 기본으로 한 문자도는 18세기에 성행하며 각계각층으로 파고 들었다. 본래 유교 덕목을 널리 알리기 위한 교화 목적으로 제작됐지만, 이후 각 지역의 문화와 결합돼 지역별로 고유한 특징을 지니게 됐다. 19세기 후반에는 장식화 경향이 더해지며 조선시대 생활미술을 상징하는 장르로 자리잡았다.
민화는 대부분 작자미상으로 전해지는데 이번 전시에는 작가가 정확히 명시된 작품도 나와 눈길을 끈다. '갑오춘서(1894년)'라는 제작시기와 '조선 의주에 사는 장인선'이라는 제작자가 명기된 '백수백복도'가 그 것이다. 다복과 장수를 기원하며 복(福)자와 수(壽)자를 100번을 번걸아가며 써넣은 이 작품은 단아한 격조가 압권이다. 조선시대 민화임에도 마치 21세기형 화조화 패턴의 타이포그래피를 연상시키는 19세기 '문자도'도 풍부한 회화성과 똑 부러지는 미감이 시선을 붙든다.
2층 전시실에서는 기본적인 효제문자도를 바탕으로 제주도의 자연과 토속적인 문화가 어우러진 '제주문자도'가 관객을 맞고 있다. '바다+섬+하늘'을 연상시키는 3단 구성으로 이뤄진 제주문자도는 상단과 하단에 제주도의 자연환경이 담긴 건물및 기물이, 중앙에는 새나 물고기 형상을 띤 문자가 배치된 것이 특징이다. 제주도만의 막힘 없는 심성을 보여주며, 타 지역과의 차별화를 구축했음을 확인케 한다.
[서울=뉴스핌] 이영란 기자=조선민화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는 '문자도, 현대를 만나다'의 전시전경. [사진=현대화랑] 2021.9.29 art29@newspim.com |
전시를 기획한 박명자 회장은 "지난 50년간 근현대 미술을 다뤄오면서 가장 한국적인 그림은 어떤 것일까 늘 생각했는데 19세기부터 20세기초까지 성행한 우리 민화가 그 원천이라는 답을 얻었다. 이 시기에 우리 선조들은 풍부한 상상력과 세련된 미감의 민화를 실로 다양하게 그려냈다. 언젠가는 국립근대미술관이 건립될 것인데 그 안에 '조선민화관'을 만들어 우리 근대미술사 반석 위에 올려놓는다면, 우리 미술을 해외에 알리는데 더욱 분야가 넓어질 것이다. 민화는 세계 유수한 미술과 견줘도 경쟁력이 충분하다"고 밝혔다.
이번 전시에는 조선시대 문자도와 함께 이를 오늘의 시각으로 변용한 현대미술가들의 작품도 곁들여졌다. 인간 삶의 이야기를 일필휘지의 필법과 상형그림으로 역동적으로 그려내는 박방영, 문자도라는 전통적인 소재에 현대적인 그라피티를 가미해 독특한 세계를 보여주는 손동현, 이번 전시의 대표작인 '화조문자도'를 퍼포먼스와 영상으로 오마주한 신제현의 작업이 전시된다.
미술평론가 안현정 박사는 "민화는 우리 근대미술의 페이지를 가치있게 만든다. 그 가운데 문자도는 전형적인 스토리텔링을 구사한 것(prototype)에서부터 대상을 생략하거나 과장한 것에 이르기까지 상상력의 시작과 끝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표현이 풍부하다. 동시에 신비하고 독특한 '개성미'도 제시한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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