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뉴스핌] 이영란 편집위원 = 경상남도 창원하면 우리에게 더없이 소중하고, 위대한 조각가 우성 김종영(1915~1982)이 떠오른다. 창원에서 태어나 자란 뒤 일본 유학을 거쳐 서울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김종영은 한국 추상조각의 새 시대를 활짝 열어젖힌 작가다. 그가 동양과 서양의 미학을 꿰뚫으며 조각가로서 설파한 '불각(인위적으로 깎지 않는다)의 미'란 개념은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김종영은 대상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을 뛰어넘어 사물의 본성이 스스로 드러나도록, 그 생명력이 온전히 구현되도록 힘쓰며 보석처럼 빛나는 걸작들을 남겼다.
김종영의 뒤를 이어 '대칭의 미감'을 파워풀하면서도 독창적으로 구현한 문신(1923~1995)이 창원 출신이다. 좌우가 아름답게 대칭을 이루는 문신의 조각은 한국 뿐 아니라 프랑스 등 유럽에서도 호평을 받은바 있다.
뿐만 아니라 창원 진해 마산 일대에서는 박종배 박석원 김영원 등 한국 현대조각을 이끄는 주요 작가들이 다수 배출됐다. 또 오늘날에도 많은 후배 조각가들이 이 같은 전통을 잇기 위해 작업에 혼신을 다하고 있다. 무릇 창원은 한국을 대표하는 조각의 도시이다. 이에 창원시는 조각 거장들의 예술혼을 계승하기 위해 지난 2010년 '문신국제조각심포지엄'을 개최했고, 2012년부터 조각을 특화한 '창원조각비엔날레'를 2년 마다 열어왔다. 올해로 5회째에 접어든 '2020창원조각비엔날레'가 창원시 성산아트홀과 용지공원 일대에서 지난 9월17일 개막됐다.
[창원=뉴스핌] 이영란 기자= 시몬 데커 <버블 껌 인 창원>2020. 레진. 지름 168cm. 동그란 핑크빛 풍선껌 형상을 사람 키 보다 크게 제작해 창원시 용지공원에 설치했다. 관람객에게 초현실적인 낯선 만남을 선사하는 위트 넘치는 조각. [사진= 창원조각비엔날레] art29@newspim.com |
금년으로 10주년 맞아 창원조각비엔날레는 자기성찰적 주제인 '비조각-가볍거나 유연하거나'를 채택했다. 조각 내부의 담론을 파고들며 본질로 걸어들어간 셈이다. 다른 대규모 비엔날레들이 정치사회적 담론인 경계, 평화, 분단, 민족주의 등을 다루고 있는 것과 달리, 미학 내부의 담론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차별점을 이루고 있다.
올해 창원조각비엔날레를 기획하고 진행을 총괄한 김성호 총감독은 "조각 내부의 담론을 집중적으로 다루기 위해 자기부정적 개념인 비(非)조각'을 메인 주제로 채택했다. 비조각은 '조각이 아닌 무엇'을 뜻하지만 자연 에너지 예술 등을 품는 '다양한 조각'을 지칭한다. 여기에 '가볍거나, 유연하거나'를 서브 주제로 선정해 딱딱하고 무겁고, 불변하는 조각이 아니라 부드럽고 가벼우며 변화하는 조각을 탐색해보고자 했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현대조각의 통시적 변화과정과 현재의 상황, 앞으로의 과제와 미래를 점검하는 비엔날레를 목표로 했다고 덧붙였다.
그래서일까. 용지공원의 본전시1(야외전시)과 성산아트홀의 본전시2(실내전시), 2개의 특별전으로 이뤄진 2020창원조각비엔날레는 조각의 고정관념을 뒤흔드는 파격적이면서도 새로운 발상의 조각, 조각인 듯 조각 아닌 작품들을 다수 목도할 수 있다. 아, 이런 것도 조각 작품, 조각 오브제가 될 수 있구나 하고 다시금 조각의 여러 결을 곱씹어보게 하는 작품들이 많았다. 조각과 설치작업의 경계에 놓인 작업들, 결과가 아닌 과정에 방점을 찍은 작품들이 다수를 이뤄 조각 개념의 역설과 확장을 생각해보게 했다. 아울러 빛과 물, 흙과 바람까지도 조각의 매체로 얼마든지 수렴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금년도 창원조각비엔날레는 역대 어느 비엔날레보다 많은 34개국의 작가들이 참여했다. 34개국에서 86팀 94명의 작가들이 참가해 세계 곳곳에서 시도되는 현대조각의 기기묘묘함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아프리카대륙의 5개국 작가들이 최초로 참여해 이채로왔다. 해외 커미셔너 기용, 지역 큐레이터와의 협력시스템 등도 올 비엔날레의 새로운 시도였다. 아울러 한국작가 52명 중 창원 지역에서 활동하는 작가 7명이 포함돼 어느 때 보다 비중이 높았다.
본전시 중 용지공원 일원에는 '비조각으로부터'라는 제목 아래 14점의 조각이 야외에 설치됐다. 포정사 앞에 놓인 룩셈부르크 작가 시몬 데커의 핑크빛 조각 '버블 껌 인 창원'은 어린 시절 누구나 불어봤을 풍선껌을 거대한 형태로 재현한 작품이다. 먼발치에서 보면 곧 터질 것같은 연약한 풍선껌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합성수지(레진)로 사람 키보다 크게 만든 단단한 구형 조각이다. 재기발랄한 작업을 선보인 작가는 고정적인 것, 완성된 것이 아닌 가변적인 것, 역설적인 것을 추구하며 '때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보지 그래?'라고 속삭이고 있다. 유머와 위트가 있고, 유기적이며 신축성을 느끼게 하는 데커의 조각은 미래 조각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돋보였다.
한국과 일본의 젊은 작가 오상훈, 스기하라 유타가 협력해 제작한 '라이트하우스'는 어둠이 내린 용지공원에서 또렷이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높이 4.8m의 알루미늄 소재의 이 파빌리온은 내부에 장착된 빛과 파빌리온의 구조적 형태가 관람객으로 하여금 시시각각 달라지는 공감각적 체험을 하게 만든다. 빛과 바람, 소리와 풀냄새까지도 조각이란 매스와 어우러지며 색다른 경험을 유도하는 공간으로 변모한다.
성산아트홀 1,2층에서 열리는 본전시2는 프롤로그 섹션으로 시작된다. 백남준이 93대의 TV브라운관을 3단으로 쌓아올려 만든 '창원의 봄'은 영상 음악 미술이 어우러지며 비조각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모나코 출신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는 미셸 블레이지의 '부케 파이널3'는 프롤로그 섹션에서 가장 시선을 사로잡는 작품이다. 커다란 쓰레기통 위로 비누거품 같은 거품줄기가 솟구치며 거품산을 이룬다. 물질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며 불가측성을 실험해온 작가는 이 '거품 부케'를 통해 2020창원조각비엔날레가 추구하는 반어법적인 비조각을 똑부러지게 웅변하고 있다.
본전시2 중 스텝 4에 포함된 카리나 스미글라-보빈스키(폴란드)의 공간 설치작품 'ADA'는 코로나19 시대를 거울처럼 비춘다. 'ADA'는 헬륨가스가 가득 찬 비닐 구(球)가 직사각형의 너른 공간을 둥둥 떠다니는 작품이다. 비닐 구에는 검은 목탄이 촉수처럼 촘촘히 꽂혀 있는데 움직일 때마다 사방에 검은 점과 선의 흔적을 퍼뜨린다. 설치 당시에는 눈(雪)처럼 새하얗던 사각의 공간은 시간이 흐를수록 검은 공간이 되어간다. 마치 순식간에 무한대로 증식하며 암울한 구름을 드리우는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은유하는 듯해 섬뜩하다. 어디로 번질지 모르는 바이러스처럼 이 목탄 구 또한 예측불가능한 존재다. 미술작품이 때론 의표를 찌른다는 점을 보여주는 뜻밖의 작업이다.
[서울=뉴스핌] 이영란 기자= 미셸 블레이지, ‹부케 파이널3›, 2020. 플라스틱박스, 거품, 6×6×5.05m 커다란 플라스틱통에서 흰 거품이 계속 생성되며 마치 부케꽃처럼 다가온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예측불가능한 생성과 소멸을 선보이는 비정형의 부드러운 조각이다. [사진=창원조각비엔날레] art29@newspim.com |
출품작 중에는 창원이라는 지역에 기반한 작업, 창원의 스토리와 역사성을 담은 작품이 여럿 눈에 띄었다. 본전시 중 '프롤로그 에필로그' 파트에 포함된 쿠바 출신 작가 글렌다 리온의 '잃어버린 시간II'가 그 예다. 작가는 창원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사랑받는 용지공원에서 흙을 파내 비엔날레가 열리는 성산아트홀 실내에 삼각뿔처럼 쌓아놓았다. 그리곤 흙더미 위에 모래시계를 올려놓아 흙이라는 물질에 담긴 시간의 의미를 반추하게 했다. 흙을 파내느라 생긴 용지공원의 구덩이는 구덩이대로, 실내의 흙 설치작품은 또 그대로 전시토록 했는데 실내외에서 동시에 펼쳐지는 작업은 흙이 간직한 창원의 역사와 시간, 삶의 궤적을 조용히 함축한다. 비조각의 매력을 보여주는 작품이란 점에서 눈길을 끈다.
서울서 작업하는 작가 연기백의 '가리봉 133'도 창원의 스토리가 담겨 관심을 모은다. 작가는 이번 비엔날레 참여를 앞두고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창원의 적산가옥과 1970~80년대 주택을 돌아봤다. 그리곤 관계자의 허락을 받아 낡은 도배지를 뜯어냈다. 주택이 사회적 틀을 의미한다면, 벽지는 거주했던 이들의 '삶의 막'이라고 여기는 작가는 거주자의 체취가 담긴 벽지를 뜯어와 전시장에 장막처럼 늘어뜨림으로써 창원에 살았던 이름 모를 이들의 시간과 숨결을 전해주고 있다. 개인공간을 묵묵히 지켜왔던 벽지는 작가의 선택에 의해 전시장으로 옮겨져 예술품으로 변모해 흐르는 시간과 개인의 내밀했던 스토리를 바람결을 타고 살며시 읊조린다.
창원과 통합된 진해시에서 낳고 자란 조경재는 어린 시절 살았던 여좌동 집을 재구성해 비엔날레 전시장에 설치했다. 자신이 태어나 초등학생 시절까지 거주했던 고향집을 비슷한 재질의 목재로 제작해 관람객으로 하여금 그 공간을 돌아보도록 한 것. '여좌본부'란 타이틀의 작품은 검붉은 계단과 작은 방들이 공간 속 개인사를 상상하게 만든다.
이밖에 권순학, 안카 레스니악, 류정민, 신예진, 김연, 김채린, 권용주, 리홍보 등 국내외 작가들의 다채롭고 신선한 작업들이 본전시2를 장식하고 있다. 단지 흠이라면 10주년을 맞아 너무 많은 작품을 비좁은 전시장에 꽉 들어차도록 설치했다는 점. 출품작간 여백이 부족해 감상을 일부 방해해 아쉬웠다. '역대 최대'를 향해 의욕을 보인 것이 오히려 비엔날레의 완성도를 2%쯤 떨어뜨리고 말았다.
한편 올해 창원조각비엔날레는 버려진 공간을 재생해 꾸민 특별전이 흥미로왔다. 성산아트홀 지하의 유휴공간인 옛 웨딩홀(성산아트홀 뷔페)을 전시장으로 리모델링해 두개의 특별전을 꾸민 것. 결혼식장과 주방, 홀로 이뤄진 옛 뷔페 식당은 최소한의 벽면 파티션과 안전 보강을 통해 낡은 것 그대로의 흔적을 지닌 채 현대미술을 품어 묘한 아우라를 뿜어낸다. '이승택 한국의 비조각'과 13팀의 젊은 미디어 아티스트가 참여한 '아시아 청년 미디어조각'이란 특별전이 이 공간에서 개막됐다. 특히 우리나라 실험조각의 개척자였던 이승택 작가의 회고전은 인상적이었다. 이승택은 1980년 자신의 조각을 '비조각'이라 천명하며 새끼줄 어망 헝겊 머리털 돌멩이 부표 같은 비조각적인 오브제들로 개념적 조각과 설치적 조각을 끈질기게 선보였다. 그의 대표작 등 60여점이 내걸려 한국 실험조각의 변천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면서 이번 비엔날레의 이론적, 실증적 디딤돌 역할까지 튼실히 하고 있었다.
[창원=뉴스핌] 이영란 기자= 최정화 <딸기II>2019, 패브릭, 송풍기. 높이 5m. 펌프 작동으로 공기가 주입되고 빠지는 키네틱 조각. 작가는 '과일 여행 프로젝트'라는 타이틀로 수박 복숭아 오렌지 석류 조각을 비엔날레 기간 중 매주 교체하며 총 9점의 작품을 선보였다. 경남도립미술관과의 협업 전시. [사진=창원조각비엔날레] art29@newspim.com |
이승택 특별전을 큐레이팅한 김숙경 수석 큐레이터는 "이승택의 작업은 수십년이 지난 오늘에 다시 봐도 혁신적이다. '매어진 돌' '나무 종이' '꺼꾸로, 비미술' 등 일련의 작업은 한국의 현대 실험조각의 발화점이 된 작품으로, 대단히 의미심장하고 정곡을 찌른다"고 했다.
2020창원조각비엔날레는 개막초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온라인 전시를 통해 어렵사리 개막했다. VR 영상으로 출품작들을 일일이 촬영한 뒤 홍보대사(배우 진선규)의 해설을 곁들인 이 영상은 오프라인 전시가 한달여 불허되자 2만4천건의 누적조회수를 기록하며 반향을 일으켰다. 10월 5일부터는 실내 공간도 일부 관람이 허용되고, 커뮤니티프로그램, 테마별 전시투어, 키즈프로그램 등의 이벤트가 시행되자 주당 1만 여명의 관람객이 찾을 정도로 반응이 확산됐다.
특히 각자의 걱정거리를 교환하는 '걱정 교환소'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키즈 뮤지엄'은 창원시민들로부터 호응이 매우 뜨거웠다. 올해 창원조각비엔날레의 폐막은 11월 1일. 마지막 주말에는 관람객이 더욱 많이 몰릴 것으로 예상된다.
김성호 총감독은 "이번 2020창원조각비엔날레는 조각의 확장과 향후 과제 등을 성찰하면서 우리의 사고를 유연하게 함과 동시에 새로운 발상의 전환을 독려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며 "온라인 전시와 오프라인 전시를 병행하느라 두배 이상의 공력이 들었는데 향후 비엔날레는 온-오프라인 전시 병행이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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