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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주의 수선전도] 상소 하나가 뒤흔든 수도이전 논란

기사입력 : 2020년07월30일 15:59

최종수정 : 2020년07월30일 17:27

교하 천도 꿈꿨던 광해군...극렬 반대에 수도이전 무산
서경 수도이전 놓고 내전까지 벌인 '묘청의 난'
수도이전은 '국민적 합의'...쉽게 말할 사안 아냐

[편집자] 수선전도(首善全圖)는 조선의 수도 한양을 목판본으로 인쇄한 지도입니다.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북쪽 도봉산부터 남쪽 한강에 이르기까지 당시 서울의 주요 도로와 동네, 궁궐 등 460여개의 지명을 세밀하게 묘사했습니다. 수선전도에 있는 지명들은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오승주의 수선전도'는 이 지도에 나온 동네의 발자취를 따라 지명과 동네에 담긴 역사성과 지리적 의미, 옛사람들의 삶과 숨결 등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오늘 숨가쁜 삶을 사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볼 계획입니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광해군 4년(1612년) 음력 8월6일. '한 장의 상소'가 나라를 뒤흔든다. 상소를 올린 사람은 선왕인 선조 때부터 왕릉을 정하는 등 왕실의 풍수지리를 도맡았던 지관(地官) 이의신(李懿信)이었다.

이의신의 상소로 임진왜란 이후 어수선하던 정국은 격랑에 휩싸인다. 상소 내용은 다름 아닌 '천도(遷道)', 수도이전이다.

◆광해군, 교하천도의 꿈 

이의신의 상소 내용은 '한양의 지세가 다했으니 교하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교하는 지금의 파주 일대다. 조선시대에는 현재 파주시내와 운정 신도시(옛 교하읍), 탄현면 일대를 아우르는 지역으로 추정된다. 임진강과 한강이 맞닿고 서해가 인접한 넓직한 장소로 현재는 북한과 맞닿은 초접경지다.

이의신의 상소는 조선왕조실록 등 역사서에 전문이 나와 있지는 않다. 하지만 상소 이후 광해군은 신하들에게 "의논해보라"고 내려보낸다. 이후 예조판서 이정귀가 광해군에게 '수도이전 불가'를 강하게 주장하는 조선왕조실록 기록에서 이의신의 상소내용을 엿볼 수 있다.

술관 이의신이 상소하여, 도성의 왕기(旺氣·왕성하게 될 징조)가 이미 쇠하였으므로 도성을 교하현(交河縣)에 세워 순행(巡幸·왕의 이동)을 대비해야 한다고 말하니, 왕이 예조에 내려 의논토록 하였다. 예조 판서 이정귀가 회계하기를 "지금 의신은 임진년의 병란과 역변이 계속하여 일어나는 것과 조정의 관리들이 분당하는 것과 사방의 산들이 벌거벗은 것이 국도의 탓이라고 합니다. 풍수의 설을 받들어 믿을 만하고 가능치도 않은 일들이 낱낱이 맞는다 하더라도 도성을 옮기는 일은 막중 막대한 일이니, 비록 곽박이 건의하고 이순풍이 계책을 세웠다 하더라도 오히려 경솔히 의논하지 못할 것인데 더구나 의신의 방술에 대한 수준을 아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1764년 이명유가 소지하던 교하군읍지(交河郡邑誌) <자료=한국학자료포털> 2020.07.30 fair77@newspim.com

이의신은 상소에서 '임진왜란이 발생했고, 조정의 대신들이 당파로 나눠 서로 싸우는 등 이유가 한양의 지기(地氣·땅의 기운)가 다해 그런 것이니 풍수지리를 참고하면 수도를 파주 교하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해군은 '교하천도'에 대해 부정적이지 않았다. 애초부터 교하천도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었다면 왕기를 흩트리고 백성을 현혹케 한다는 이유로 '역적'으로 몰아 단박에 이의신을 처단했을 것이다.

'이의신의 상소내용을 논의하라'고 내려보낸 자체가 광해군도 수도이전에 대한 의지가 상당했다는 점을 나타내는 대목이다.

예조판서가 대표로 나섰지만, 신하들의 교하천도에 대한 반감은 상상이상이었다. 이정귀의 답변에는 가시가 돋혔다. 고려시대 수도이전 논란으로 내전으로 발전한 '묘청의 난'을 들먹이며 '자칫하면 반란으로 왕위에서 물러날 수도 있다'는 경고까지 한다.

다시 이정귀의 발언이다. "소장이 들어오면서부터 사람들이 마음을 안정하지 못하고 서로 뜬소문에 동요되어 더러는 '성상께서 이 말을 믿는다' 하고, 더러는 '새 궁궐에 나가지 않는 것은 이 말 때문이다' 하여, 원근이 모두 놀래고 현혹되어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이단이 국가에 해독을 끼치는 일이 예로부터 그러했으니, 고려 말엽에는 요승(妖僧) 묘청(妙淸)이 음양의 설로 임금을 현혹하기를 '송경(松京·개경)은 왕업이 이미 쇠퇴하였고 서경(西京·평양)에 왕기가 있으므로 도읍을 옮겨야 한다.'고 하여 드디어 새 궁궐을 서경 임원역에 지었으나 끝내는 유참 등의 변란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예전의 고사도 이와 같은데, 어찌 경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광해군은 불쾌했다. 그래도 수도이전에 대한 의지는 꺾지 않는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광해군이 수도이전지로 삼은 교하지역의 옛지도. 관해군인 임진왜란 이후 수도이전을 통해 조선의 제2건국을 꿈꿨다. 지도는 1872년 만들어진 작자미상의 조선후기 지방지도. <자료=서울대규장각한국학연구소>2020.07.30 fair77@newspim.com

왕이 다시 하명한다. "예로부터 새로 도성을 세운 제왕이 많았으니 본디 세웠던 도성을 아주 버린다는 뜻은 아니다. 터무니없고 근거도 없는 말로서 이 말을 믿는다고 임금을 지척하니 너무 놀랍다. 앞으로는 이러한 말을 경솔하게 내지 말도록 하라. 소장의 끝에 있는 회계의 일은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상의하여 의계토록 하라." (광해군일기 정초본 59권, 광해 4년 11월15일 을사 2번째 기사)

한바탕 난리가 난 지 두 달이 지난 광해군 5년(1613년) 음력 1월 3일. 광해군은 수도 이전을 본격 추진한다. 임진왜란 이후 의정부를 대신하여 국정 전반을 총괄한 실질적인 최고의 관청인 비변사에 비밀하교를 내린다. 하교는 '수도이전을 할 교하지역 산세를 탐색하고 그려오라'는 것이다.

광해군일기 정초본 62권 신유 3번째 기사다. 왕이 비밀로 비변사에 전교한 내용이다.

"자고로 제왕들은 반드시 성읍을 따로 건설하여 예기치 않은 일을 대비하였으니, 도읍 옮기는 것을 이르는 것이 아니다. 교하는 강화를 앞에 마주하고 있고 형세가 심히 기이하다. 독성산성의 예에 따라 성을 쌓고 궁을 짓고는 때때로 순행하고 싶다. 대신과 해조 당상은 헌관·언관·지관과 같이 날을 택해 가서 살피고 형세를 그려 오라."

왕의 비밀지시가 내려오자 조정은 쑥대밭이 된다. 신하들은 당파를 초월해 모처럼 '한마음'으로 벌떼처럼 들고 일어난다. 논쟁은 2년 넘게 이어진다. 광해군은 "주나라는 만세가 우러러 본받는 나라인데 호경과 낙양이 있었고, 지금 명나라에도 남경과 북경이 있다. 의신이 국가를 위하여 큰 계획을 진달한 것은 이궁(離宮)을 창건하자는 데 불과할 따름이다"(광해군일기 정초본 79권, 광해 6년(1614년) 6월 14일)라면서 반발을 일단 피해가려 하지만, 신하들의 끈질긴 반대로 끝내 교하천도는 무산된다.

예조판서 이정귀를 비롯한 신하들의 '왕위를 내놓을 수도 있다'는 경고가 예언으로 돌아온 것일까. 천도론을 꺼낸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왕의 자리에서 쫒겨났다.

◆'동전'으로 점을 쳐 정해진 수도 한양

따지고 보면 조선왕조가 세워진 이후 수도로 낙점된 한양도 우여곡절을 겪었다. 한양과 무악(현재 연세대학교 일대), 충남 계룡산 인근의 3곳을 수도 후보지로 정한 조선왕조는 처음에는 계룡산 일대를 수도로 정하고 궁궐 건설까지 착수한다.

'계룡산에 새 도읍을 정하였는데, 기내(畿內)의 주현(州縣)·부곡(部曲)·향소(鄕所)가 모두 81이었다.(태조실록 3권, 태조 2년(1393년) 3월 24일)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조선 태조와 태종 때 수도이전이 논의될 때마다 거론된 후보지 무악(빨간 표시). 현재 연세대학교 부근이다. <자료=수선전도>2020.07.30 fair77@newspim.com

하지만 신하 하륜이 반대하면서 한양으로 급반전한다. 태조 2년(1393년) 12월 11일 기사다.

"도읍은 마땅히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될 것이온데, 계룡산은 지대가 남쪽에 치우쳐서 동면·서면·북면과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또 신이 일찍이 신의 아버지를 장사하면서 풍수 관계의 여러 서적을 대강 열람했사온데, 지금 듣건대 계룡산의 땅은, 산은 건방(乾方·서북방향)에서 오고 물은 손방(巽方·남동쪽)에서 흘러간다 하오니, 이것은 송나라 호순신이 이른 바, '물이 장생을 파하여 쇠패가 곧 닥치는 땅'이므로 도읍을 건설하는 데는 적당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 도읍을 정한 계룡산 땅이 크게 보면 한반도 중심부가 아니라 남쪽에 치우쳐 있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물길이 좋지 않아 도읍지로 부적합하다는 주장이다.

태조는 그 말을 듣고 다시 도읍지를 물색해 조정 대신들의 갑론을박 끝에 현재 한양도성으로 정하고 수도를 정하게 된다.

그런데 한양은 천도(1394년) 이후 5년만에 다시 수도의 지위를 내주게 된다. 2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 이후 명분과 눈치상 곧바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 태종 대신 잠시 왕위에 오른 정종이 개경으로 환도해 버린다.

임금이 종친과 좌정승 조준 등 여러 재상들을 모두 불러 서운관에서 올린 글을 보이고, 또 피방해야 될지의 가부를 물으니, 모두 피방하여야 된다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어느 방위로 피방하여야 할지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경기 안의 주현에는 대소신료와 숙위하는 군사가 의탁할 곳이 없고, 송도는 궁궐과 여러 신하의 제택이 모두 완전합니다."(정종실록 1권, 정종 1년(1399년) 2월 26일)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다시 한양천도가 추진된다. 피바람 끝에 왕위에 앉은 태종으로서는 정몽주를 죽였던 일 등을 기억하는 개경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을 터에다, 고려왕조의 향수가 남아 있는 개경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무엇보다 쿠데타로 왕위에 오른 태종으로서는 아버지 태조의 신뢰를 받는 일이 급선무였다. 태조가 공들여 세운 새왕조의 수도 한양으로 돌아가면서 아버지의 뜻을 받든다는 명분도 있고, 개경사람들의 곱지 않은 눈길을 피할 기회로 삼는데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인천=뉴스핌] 정일구 기자 = 인천 강화군 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 황해북도 개풍군 마을 너머로 개성 송악산이 보이고 있다. 2020.06.19 mironj19@newspim.com

개경으로 환도한 지 2년만인 태종 1년(1401년) 음력 7월23일. 태종이 말한다. "내가 한양으로 돌아가겠으니, 서운관으로 하여금 떠날 날을 점치어 알리라."

새 왕조가 열렸다 해도 대소신료들의 주무대는 개경이었다. 어렵사리 집과 재산이 있는 개경으로 돌아왔지만, 다시 2년만에 당시로서는 신도시인 한양으로 왕이 돌아가겠다고 하니 속된 표현으로 '환장할 노릇'이었을 것이다.

만만찮은 반발이 이어졌다. 좌사간 윤사수 등을 순군옥에 가두었다가 용서했다. 4년이 흐른 태종 5년(1405년)에는 의정부에서 '흉년'을 이유로 한양 환도를 반대한다. 태종은 10월에는 반드시 한양으로 돌아갈 것을 천명하고, 우여곡절 끝에 다시 한양은 조선의 수도가 된다.

당시 신하들의 반발이 극심하자 태종은 한양으로 재천도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동전점'까지 동원한다. 왕들의 조상 신주를 모신 종묘에 가서 동전으로 점을 쳐서 '한양에 다시 갈지 말지'를 결정한 것이다. 동전으로 점을 쳐서 조상들에게 물어보니 '한양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뜻이 나왔기 때문에 재천도는 불가피하다는 주장이다.

태종이 한양으로 재천도하기 1년전인 태종 4년(1404년) 음력 10월 6일. 임금이 종묘 문밖에 나가 여러 사람에게 포고했다.

"이제 종묘에 들어가 송도(개경)와 신도(한양), 무악(현재 연세대 부근) 고(告)하고, 그 길흉을 점쳐 길한 데 따라 도읍을 정하겠다. 도읍을 정한 뒤에는 비록 재변이 있더라도 이의가 있을 수 없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조선 태종은 한양으로 다시 수도를 옮길 때 동전으로 점을 쳐 수도이전의 명분을 만들었다. 사진은 고려 성종 때 주조된 한국 최초의 동전화폐 건원중보(乾元重寶) <자료=한국은행 화폐박물관> 2020.07.30 fair77@newspim.com

점치는 물건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었지만 척전(擲錢)으로 하기로 한다. 척전은 한꺼번에 동전 셋을 던져 1개가 뒷면이 나오고 2개가 앞면이 나오면 단(單)이라 해 작대기 하나 모양으로 표시한다. 2개가 뒷면이 나오고 1개가 앞면이 나오면 탁(拆)이라고 작대기 두개를 나란히 놓은 모양으로 놓는다. 3개가 모두 뒷면이 나오면 중(重)이라 하여 O로 나타낸다.

3개가 모두 앞면이 나오면 순(純)으로 X로 표시한다. 세번 던져 하나의 괘(卦)를 만들어 길흉을 판단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개경을 도읍으로 정할 때도 사용했다는 이유 등도 고려됐다.

태종은 신하를 거느리고 종묘에 예배한 뒤 완산군 이천우·좌정승 조준·대사헌 김희선·지신사 박석명·사간 조휴를 거느리고 묘당에 들어가 꿇어앉아 이천우에게 명하여 척전을 던지게 했다. 한양은 2길 1흉이 나왔다. 개경과 무악은 모두 2흉 1길이었다.

동전점을 친 결과 '한양으로 다시 돌아가는 게 맞다'는 조상의 뜻이 나온 셈이다. 드디어 태종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다. 다만 정도전이 설계한 경복궁을 꺼려 창덕궁을 지어 이궁으로 삼았다.

◆수도이전 놓고 내전(內戰)까지

한국사에서는 수도이전을 놓고 내전(內戰)까지 벌어진 경우도 있다. 고려 인종 시대 '묘청의 난'은 서경(평양) 천도를 둘러싸고 국론이 둘로 갈라져 전쟁까지 불사한 사건이다.

고려사 열전 권제40 반역(叛逆) 부분에는 묘청에 대한 인물평이 서술돼 있다. 묘청은 서경의 승려로 정지상 등과 풍수지리설을 기반으로 서경천도운동을 벌였다. 당시 임금인 고려 인종이 묘청의 말을 듣고 서경에 궁궐까지 짓고 실제로 이동까지 한다.

그러나 고려사에는 '각종 이변과 재해'가 잇따르자 불안감을 느낀 왕이 수도이전을 본격적으로 하지 않자 인종 13년(1135년)에 묘청이 분사시랑 조광·병부상서 유참, 사재소경 조창언·안중영 등과 함께 서경을 근거지로 삼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돼 있다.

반란은 1년간 이어졌지만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 등에게 진압된다. 고려사에는 김부식 군대가 진격하자 서경 사람들이 묘청의 머리를 베어 바쳤다고 저술돼 있다.

일제강점기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는 조선사연구처에서 '묘청의 난'을 '조선역사 일천년래 일대사건'으로 명명했다. 신채호는 묘청이라는 인물 자체에 대해 높은 평가를 하지는 않았지만, '묘청의 난'에 대해서는 신라시대부터 이어져 온 고유의 낭가사상과 신흥 이데올로기로 떠오른 당시 유교사상이 맞붙은 사건으로 정의했다.

역사학자들의 견해는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어 잠시 접어두더라도, '묘청의 난' 자체를 놓고 본다면 수도이전은 단순히 지도상 위치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내전까지 불사할 정도의 복잡다단한 사안임은 분명하다.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의 모습. /김학선 기자 yooksa@

◆헌재 행정수도 위헌판결 핵심은 '국민적 합의'

최근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논란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2004년 헌법재판소는 '신행정수도의건설을위한특별조치법'에 대해 위헌판결(2004헌마554)을 내렸다.

당시 헌법재판소 판결문을 읽어봤다. 세간에서는 '관습헌법'이라는 단어만 뇌리에 남았다 하지만 다시 찬찬히 들여다 본 판결문의 포인트는 '국민적 합의'다.

문자로 형식화한 헌법에 모든 것을 담을 수 없기 때문에 '수도=서울'이라는 관습적 명제를 인용해 서울은 관습헌법적으로 수도이며, 관습헌법도 성문헌법처럼 헌법과 다름없으니 수도를 이전하려면 헌법적 절차를 거치는 게 핵심이다.

헌법을 개정하려면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의 합의와 전체 국민을 대상으로 한 국민투표를 통한 국민의견을 물어야 한다. 즉, 일부 정당과 집권세력의 이해관계에 따라 수도이전을 논의하지 말고 '국민적 합의'를 도출해 헌법에 명시하라는 이야기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4·15 총선에서 압승하면서 180석에 가까운 의석을 차지했다. 하지만 헌법개정에 필요한 전체의석(300석)의 3분의2(200석)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야당과 소통이 필수적이다.

수도이전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옛사람들도 곤욕을 치렀다. 한국사에서는 수도이전 이슈로 내전까지 발발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재산권 등이 걸려 있어 첨예하고 극단적인 논란으로 치닫기 십상이다.

헌법재판소 판결이 최선은 아니지만 16년전 판결문에 드러난 '국민적 합의'라는 문구가 허투루 들리지만은 않는 시점이다.

fair77@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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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영, 대법서 징역 7년8개월 확정 [서울=뉴스핌] 홍석희 기자 = 쌍방울 그룹에서 수억원대 뇌물을 받고, 800만 달러를 북한에 송금한 혐의로 기소된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가 징역 7년 8개월을 확정 받았다. 대법원 2부(주심 박영재 대법관)는 5일 오전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 전 부지사에게 징역 7년 8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쌍방울 그룹에서 수억원대 뇌물을 받고, 800만 달러를 북한에 송금한 혐의로 기소된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가 징역 7년 8개월을 확정 받았다. 사진은 이 전 지사가 지난해 10월 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열린 박상용 수원지검 부부장검사에 대한 탄핵소추 사건 조사 관련 청문회에서 정청래 법사위원장 질의에 답변하는 모습. [사진=뉴스핌 DB] 이 전 부지사는 이재명 대통령이 경기지사이던 2019년, 쌍방울로 하여금 도지사 방북 비용 300만 달러와 북한 스마트팜 사업 비용 500만 달러 등 총 800만 달러를 북한 측에 보내도록 한 혐의로 기소됐다. 경기도 평화부지사, 경기도 산하기관인 킨텍스 대표로 재직 중 쌍방울로부터 법인카드와 차량 등 3억3400여만 원의 정치자금을 제공받은 혐의도 받았다. 검찰은 이중 2억5900여만 원에 대해 뇌물 혐의를 적용했다. 1심은 이 전 부지사의 혐의 대부분을 유죄로 판단해 정치자금법 위반 징역 1년 6개월, 특가법상뇌물 및 외국환거래법 위반 등 징역 8년을 합해 총 징역 9년 6개월을 선고했다. 1심 재판부는 쌍방울이 경기도 스마트팜 사업비(500만 달러)와 당시 경기지사였던 이 대통령의 방북비용(300만 달러)을 대납하려 했다는 검찰 측 판단을 모두 받아들였다. 다만 검찰이 공소사실에 적시한 총 800만 달러 중 394만 달러만 해외로 밀반출된 불법 자금으로 인정했다. 2심은 1심 판결을 파기하고, 징역 7년 8개월 및 벌금 2억5000만원, 추징 3억2595만 원으로 감형했다. 구체적으로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징역 8개월을, 특가법상뇌물 및 외국환거래법 위반 등 혐의에 대해서는 징역 7년을 각각 주문했다. 1심 형량과 비교해 1년 10개월이 감형됐다. 2신 재판부는 1심과 마찬가지로 검찰이 기소한 대북송금 800만 달러 가운데 394만 달러만 북한 측에 밀반출됐다며 유죄로 판단했다. 특히 이 중 200만 달러는 김 전 회장이 이재명 당시 경기지사의 방북비용으로 대납한 것이라고 봤다. 다만 "뇌물죄, 정치자금법 위반죄 범행 후 공무원 또는 정치인으로서 부정한 행위까지 나아가지는 않은 점, 스마트팜은 인도적 지원 사업이었고 남북간 평화조성을 위한 남북교류협력사업의 추진이라는 정책적 목적도 있는 점, 김성태가 쌍방울그룹의 대북사업 추진 등 이익을 도모한 사정도 있고 피고인이 김성태에게 비용 대납을 강요한 사정은 없는 점 등을 유리한 양형으로 고려했다"고 감형 이유를 설명했다. 검찰과 이 전 부지사 측 모두 판결에 불복해 상고했으나 대법원은 양 측의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법원은 "원심의 유죄 부분 판단에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은 채 논리와 경험의 법칙을 위반해 자유심증주의 한계를 벗어나거나 검사의 사전면담 등이 이루어진 증인의 법정진술의 신빙성 판단, 유죄의 인정에 필요한 증명의 정도, 뇌물수수죄에서 직무관련성, 대가성, 뇌물귀속 주체와 고의, 정치자금 부정수수죄에서 정치자금과 고의 등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는 등으로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없다"고 판시했다. hong90@newspim.com 2025-06-05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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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 장관 김현종·조현 거론 [서울=뉴스핌] 지혜진 기자= 인수위원회 없이 출범하는 새 정부는 민생 회복과 함께 대미 관세 협상 등 외교·안보 문제도 시급하다. 미국 법원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주요국을 대상으로 부과한 상호관세 효력을 정지시켰지만 여전히 통상 환경의 불확실성이 가신 것은 아니다. 지난 4일 당선된 이재명 대통령은 "국익 중심의 실용 외교" 강조해왔다. 민주당 공약집을 보면 통상환경의 변화와 경제안보 중요성에 대응하기 위해 주요 20개국(G20)·주요 7개국(G7) 등의 적극 참여를 통해 글로벌 현안 적극 대응하고 2025 경주 APEC 성공적 개최를 위한 외교역량을 강화할 것을 약속했다. 신남방·신북방 정책을 계승 발전해 글로벌 사우스와 권역별 협력을 심화하고 핵심소재·연료광물의 공급망(GVC) 안정화를 위한 통상협력 강화도 약속했다. (왼쪽부터) 김현종 더불어민주당 선대위 외교안보특보, 위성락 민주당 의원, 조현 선대위 국익중심실용외교위 공동위원장, 안규백 의원. [사진=뉴스핌DB] 북핵 대응으로는 한국형 탄도미사일 성능과 한국형미사일방어체계(KAMD)를 고도화를 내세웠다. 핵무장이나 핵잠재력 확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북핵 대응의 기본 원칙은 한·미 확장억제 강화'라는 기존의 기조를 이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국방 분야에서는 국방 문민화를 비롯해 군 정보기관 개혁, 육·해·공군 참모총장 인사청문회 도입 등을 내세웠다. 이 대통령은 취임 첫날 국가안보실장에 위성락 민주당 의원을 임명했다. 주러시아 대사를 지낸 외교관 출신인 위 의원은 '이재명 후보 외교안보보좌관'으로 임명돼 활동했다. 이번 대선에서는 민주당 선대위 산하 '동북아평화협력위원회' 좌장을 맡았다. 외교부 장관 후보군으로는 조현 전 외교부 1차관과 김현종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이 언급된다. 조 전 차관은 선대위에서 국익중심실용외교위원회 상임공동위원장을 맡았다. 위 의원과 외무고시 13기 동기로 유엔대사, 외교부 다자외교조정관, 외교부 국제기구국장 등을 역임했다. 김 전 차장은 대선 기간에도 '이재명 후보 외교안보보좌관' 자격으로 백악관 고위 당국자들과 만나 한미동맹과 한미일 3국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이 후보의 입장을 전달하기도 했다. 국방부 장관 자리에는 군 출신이 아닌 5선의 안규백 민주당 의원이 유력하다. 이 대통령은 후보 때부터 군에 대한 '문민 통제'를 강조해 왔다. heyjin@newspim.com 2025-06-0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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