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비 개혁·개방 맞춰 "스탈린때 강제이주는 불법" 명예회복 요구
소련 최고위, 1989년 11월 50년만에 고려인 복권조치 등 공식 발표
스탈린 차별 첫 희생 고려인...'일본 첩자' 구실 17만여명 강제 추방
[서울=뉴스핌] 김흥식 객원논설위원 =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과 민주화 조치에 따라 강제이주의 불명예를 안고 살아온 고려인에게도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고려인 묘비에는 대부분 고인의 사진이 부착돼 있다. 이 묘비에는 전라남도 제주도라고 씌여있어 일제시대 행정구역 표기를 알 수 있다.[사진=뉴스핌DB] |
◆고려인, 고르비 개혁·개방 맞춰 "스탈린때 강제이주는 불법" 명예회복 요구
기존의 억압적인 소수민족정책이 완화되던 1988년 우즈베키스탄에 거주하는 일단의 지도급 고려인들이 소련 공산당 정치국 앞으로 청원서를 보냈다.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자행된 강제이주 조치의 불법성을 주장하며 완전한 명예회복을 정식으로 요구한 것이다.
고르바초프 이전에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이들은 중앙아시아의 허허벌판에 내팽겨쳐진 고려인들이 거주이전 제한, 공직 취업 거부, 군 복무 거부 등 현저하게 부당한 차별대우를 받았으며 고유의 전통문화도 모두 파괴됐다고 지적했다.
차별대우는 스탈린 사후에도 별로 개선되지 않았다고 했다. 또한 강제이주 과정에서 지식인과 독립운동 관여자가 대부분인 지도층 인사 5000여 명이 무도하게 처형되었으며 그 구체적인 사실들을 낱낱이 고발했다.
청원서는 고려인들이 참을 수 없는 역경 속에서도 근면과 성실을 바탕으로 인민경제 각 부문에서 헌신적으로 활동했으며 3백명 이상이 최고훈장인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음을 강조했다. 고르바초프가 공개 연설에서 언급한 “과거사에 대한 무시는 언제나 큰 도덕적 손실을 낳는다. 오늘도 그렇고 내일도 그렇다”고 한 지적이 고려인들을 고무했다고 청원서는 덧붙였다.
KAL기 격추사건 10주기(93.09.01)를 맞아 추모행사 취재 차 사할린에 간 김에 '사할린 희생사망동포 위령탑'을 찾았다. 일제시기 사할린으로 강제징용된 동포들 상당수가 현지에서 희생됐다고 한다.[사진=뉴스핌DB] |
◆소련 연방 최고위, 1989년 11월 50년만에 고려인 복권조치 등 공표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청원을 심사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정문을 공표했다.
“역사적, 법률적 정의 회복은 현재 막대한 정치적 의의를 갖고 있다. 죄 없이 탄압된 사람들의 명예를 완전히 회복해주며 그들에 대한 추억을 영구히 해 줄 것을 사회각계와 친척, 친구들에게 기대하는 바이다”
이어 89년 11월 소비에트 연방 최고회의 상임위원장 명의로 고려인에 대한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일반 국민과 동등한 대우 등이 포함된 명예회복과 복권 조치를 공표했다. 이로써 50여년 만에 공식적으로 고려인들의 명예가 회복됐다.
이에 앞서 불평등 대우를 부분적으로 개선하는 조치는 있었다. 강제추방된 고려인들이 공민증조차 받지 못하다가 45년 7월 소련 내무장관 명령으로 ‘특수이주민’이라는 명칭 하에 약간의 처우 개선을 해주는 정도의 등급으로 처리됐다. 47년에는 중앙아시아에서만 거주한다는 조건의 제한된 공민증을 받았다. 그러다가 흐루시초프에 의해 정식 공민증을 받게 된다.
1955년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농장을 방문한 흐루시초프는 고려인의 성실함과 탁월한 영농솜씨에 감동받고 이듬해 공민권을 전면 회복시켰다. 이로써 고려인에게 부당하게 취해졌던 거주이전제한, 공직 취임거부 등이 해제돼 일반 러시아인과 동등한 권리를 보장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강제이주에 대한 정부의 공식사과와 명예회복조치는 없었기 때문에 여전히 미흡했다.
어쨌든 흐루시초프의 공민권 회복조치로 고려인들은 농사짓기에 여건이 좋은 남부러시아, 흑해연안, 북카프카즈 등지로 집단이주하기에 이른다. 북카프카즈 일대에만 4만~5만명의 고려인이 살게 된 것도 공민권 회복에 따라 이뤄진 결과였다.
해피무브 글로벌 청년봉사단 21기가 우즈베키스탄 아흐마드 야싸비 마을에 있는 고려인 마을회관에서 주민들과 마을 발전 제안에 대한 의견을나누고 있다. [사진=현대엔지니어링] |
◆스탈린 소수민족 차별 첫 희생 고려인...'일본 첩자' 구실 17만여명 강제추방
강제이주 관련 비밀문건들은 크렘린 문서 보관소, 톰스크 극동공화국 문서보관소를 비롯해 하바로프스크, 블라디보스토크, 우즈베키스탄의 타쉬켄트, 카자흐스탄의 알마아타 등에 보관돼 있었다. 소련이 해체된 직후인 1992년에야 비밀해제되었다. 이후 고려인단체에 의해 백서 형식으로 정리돼 공개됨으로써 강제이주 실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비밀 해제된 고려인 관련 문건에 따르면 강제이주 대상 고려인 수가 17만2500명이었다.(또 다른 문건에는 총 3만6422가구에 17만1078명으로 구체적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당시 스탈린 치하의 소련은 일본첩자 침입방지를 구실로 고려인 모두를 강제추방한 것으로 문건은 밝히고 있다.
강제이주 2년이 지난 1939년도의 고려인 인구조사 결과 9만4000명 정도로 집계됐다고 한다. 이송 과정과 이주 후의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강제이주 당시 인구의 절반 이상이 줄어든 것이어서 그 참혹상을 짐작할 만하다.
강제이주는 1937년 8월부터 늦가을까지 가축운반용 화물열차를 동원해 진행됐는데 목적지까지 40일 정도 걸렸다. 연해주 고려인은 스탈린에 의해 소수민족단위로 자행된 강제이주정책의 첫 번째 희생자였다. 뒤이어 볼가유역에서 자치공화국으로 살던 독일계, 크림의 타타르인, 카프카즈의 체체인 등 소수민족들도 독소전쟁 발발을 전후해 시베리아 오지 등으로 강제 추방되는 비극을 겪었다.
문 대통령 내외, 카자흐 동포들과 건배[서울=뉴스핌]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21일 오후(현지시간) 카자흐스탄 알마티 릭소스 호텔에서 열린 동포오찬 간담회에 참석해 오가이 세르게이 카자흐스탄고려인협회 회장 등과 건배하고 있다.[사진=청와대] 2019.4.22 |
▲김흥식 뉴스핌 객원논설위원
한국외대 러시아어과를 졸업하고 1977년 동양통신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디뎠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로 해직되는 아픔을 겪고 쌍용그룹에 몸담고 있다가 1988년 연합뉴스 기자로 복귀했다. 1991년 한국의 첫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파견돼 맹활약했다. 이후 연합뉴스 북한부장, 남북관계 부장, 문화부장, 논설위원실 간사, 경영기획실장을 거쳐 편집담당 상무이사를 지냈다. 퇴임후 연합뉴스 부설 동북아센터 상임이사, 중소기업진흥공단 비상임이사, 도로교통공단 비상임이사, 방송통신심의위원회 특별위원 등을 지낸뒤 현재 뉴스핌 객원논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khs@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