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선 두 척으로 회사 설립...창립 50년 매출 7조원대 대기업 '우뚝'
종합식품회사 도약 꿈꾸는 '청년 김재철'...그의 도전은 현재진행형
[서울=뉴스핌] 박효주 기자 = “항해 중에 사고를 당한다 해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꼭 태워주십시오.”
청년은 절박했다. 1958년 대학 졸업을 한 달 앞둔 그는 간신히 실습항해사 자격으로 국내 최초 원양어선을 탔고, 숱한 위기를 이겨내며 연 매출 7조원대 대기업을 일궈냈다. 바로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의 얘기다.
김재철 회장은 재계 1세대 중 한 명으로 원양어선 말단 선원부터 시작해 현재의 동원그룹을 일군 신화의 주인공이다. 슬하에 2남을 두고 있으며 장남인 김남구(56) 한국투자금융지주 부회장이 금융업을, 차남인 김남정(46) 동원그룹 부회장이 산업을 각각 맡고 있다.
김 회장의 엄격한 자식 교육은 재계에서 유명하다. 그는 평소 “부모가 자식에게 주고 싶지 않지만 꼭 줘야 하는 것이 고생”이라고 말한다. 이 같은 교육철학을 바탕으로 김남구 부회장이 대학 4학년이던 1989년, 북태평양 명태잡이 원양어선에 그를 태워 선원 생활을 경험하게 했다.
김남구 부회장은 생사를 넘나드는 원양어선에서 매일 18시간 넘는 중노동을 경험하며 “죽는 것 말고는 육상에서는 겁날 게 없겠구나”라며 담대함을 키웠고, 그런 경험이 지금의 한국투자금융그룹을 키워내는 데 밑거름이 됐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차남인 김남정 동원그룹 부회장 역시 대학 졸업 후 참치 제조공장에서 참치캔 포장, 창고 야적 등 생산업무부터 시작했다. 이후에도 바쁘기로 소문난 청량리 시장 일대를 담당하는 영업사원을 거치며 회사의 가장 작은 일부터 다양한 경험을 하게 했다.
1969년 8월 동원의 최초 어선인 '제31동원호' 출어식에 참석한 김재철회장.[사진=동원그룹] |
◆어선 두 척으로 ‘동원산업’ 창업...“바다만이 살길”
김 회장은 1969년 현물차관을 통해 도입한 어선 두 척으로 ‘동원산업’을 창업했다. 올해로 창업 50주년을 맞은 동원그룹은 종합식품가공업, 금융업, 종합포장재, 물류 등 다양한 분야에 도전해 명실상부한 대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김 회장이 나고 자란 전남 강진군 군동면은 전형적인 시골마을이었다. 마을 대다수가 농사를 짓고 있었고, 학생들 역시 농대를 나와 가업을 이어받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가난한 농가의 7남 4녀 중 장남이었던 김 회장은 강진농고를 졸업할 무렵 우수한 성적으로 서울대 농대 장학생으로 선발됐지만,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립수산대학(현 부경대) 어로과에 입학했다. 좁은 국토와 자원이 없는 국가에서 바다를 개척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대학을 졸업하고 배를 탄 지 3년 만인 1960년 말 김 회장은 26세 젊은 나이에 지남2호의 선장이 됐다. 그는 선장이 된 후에도 기술 개발과 어장 조건 연구에 몰두했다. 이는 그가 항상 가장 많은 어획고를 달성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김 회장은 당시 20대 어린 선장이었음에도 ‘캡틴 제이 씨 킴(Captain J. C. Kim)’이란 이름으로 외국 수산업계에서 유명했다.
사모아 최고의 선장으로 이름을 날리던 김 회장은 1969년 35세의 나이에 그동안 모은 1000만원을 자본금으로 동원산업을 창업했다.
◆ 위기 속 승부수...과감한 투자가 불러온 성공
김 회장이 탄탄대로만 걸어온 것은 아니다. 1973년 10월 제1차 석유파동으로 배럴당 2달러에 불과했던 유가가 1974년에는 11달러, 1975년에는 12달러로 치솟았다. 석유파동으로 한국 경제는 경기 침체, 물가 상승, 국제수지 악화라는 삼중고에 시달렸다. 한국 경제의 악화는 급성장해 가던 한국 원양업계를 강타했다. 설상가상으로 세계 각국은 2백해리 경제수역을 선포하기 시작했고, 도산하는 업체가 속출했다.
원가 중 유류비가 40% 이상을 차지하던 원양어업은 석유파동과 연안어장 규제로 인해 채산성이 극도로 악화됐다. 여기에 김 회장은 회사를 시작할 때 어선을 분할상환 방식으로 구입해 운영하고 있었기에 이를 상환하면서 이익도 내야 했다.
김 회장은 비상경영을 선포하고 효율을 최우선으로 하는 경영 방침을 수립했다. 우선 해외기지 중심으로 진행했던 참치 판매를 독항 어업을 통한 일본 판매 중심으로 전환했다. 어획한 참치를 섭씨 영하 50도 이하로 급속 냉동해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는 독항 어선을 출항시켜 어가(魚價)가 높은 일본에 직접 판매하며 부가가치를 높였다. 양질의 참치를 잡기 위해 인도양 해역에서 대서양으로 새로운 어장을 개척하기도 했다.
김 회장은 위기 상황 속에서 과감히 승부수를 던졌다. 1975년 2월 4500톤급 트롤 공모선 ‘동산호’를 건조한 것이다. 동산호는 선내에 공장시설을 갖춘, 당시로서는 세계적 수준의 대형 어선이었다. 건조비만 1250만달러로, 당시 동원산업의 전 재산보다 큰 금액이었다.
이후 1979년 이란의 원유 수출 중단으로 2차 석유파동이 일어났다. 1978년 배럴당 12달러였던 유가가 1981년 12월 34달러까지 뛰어올랐다. 1차 석유파동 때와 마찬가지로 폐업하거나 적자 운영에 시달리는 업체가 속출했다.
김 회장은 다시 몰아친 2차 석유파동을 극복하고 재도약할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국내 최초로 헬리콥터 탑재식 참치 선망어법 개발 계획을 수립했다. 선망어법은 미국에서도 1943년 이래 개발에 공을 들여 왔으나 실패를 거듭하던 상황이었다.
수많은 도전 끝에 파푸아뉴기니 근해에서 1회 투망에 250톤(당시 22만달러) 정도의 어획을 올리는 쾌거를 이뤘다. 이를 통해 선망 사업의 성공에 확신을 갖게 된 김 회장은 선망선을 급속도로 늘려갔고, 동원산업은 참치 어획에 있어 세계적 회사로 성장해 나갔다.
원양업만으로 부족함을 느낀 김 회장은 1982년 원양어업에서 식품가공업으로의 확장을 위해 중대한 결정을 한다. 이전까지 원어(原魚) 형태로 해외에 수출해 오던 참치를 통조림으로 가공해 국내 시장에 선보인 것이다. 1차 산업인 원양어업에서 2차 가공산업으로의 진출을 꾀하던 김 회장은 선진국의 식생활 패턴을 분석하고 제품 개발에 몰두한 끝에 참치캔을 출시하기로 결정했다.
김 회장은 참치캔으로 안정된 시장을 확보한 뒤 수산물 제조판매 부문을 확대하기로 했다. 가공식품의 다양화를 위해 제조공장을 준공하고 꽁치통조림, 조미김, 어육연제품 등을 생산하며 원양어업에서 식품가공업으로의 순조로운 확장을 이뤄 갔다.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사진=동원그룹] |
◆ 원양어업 회사의 금융업 진출...재계를 놀라게 하다
국내 원양업계에서 탄탄한 기반을 다진 김 회장은 축적된 자금과 경영 능력을 바탕으로 2차, 3차 산업 진출을 모색했다. 이때 김 회장이 주목한 분야가 금융업이다.
1981년 2월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AMP 과정을 이수하던 김 회장은 하버드대학의 우수한 학생들이 제조회사가 아닌 증권회사에 더 많이 진출하는 것에 주목했다. 자본주의의 본고장인 미국에서 증권회사가 인기가 있다면 한국도 앞으로 증권업이 유망 산업이 되리라는 확신을 갖고 국내에 돌아와 증권업계에 관심을 갖게 됐다. 확신은 곧장 실행으로 이어졌다. 1982년 70억원 규모의 한신증권(한국투자증권)을 성공적으로 인수하며 재계에 놀라움을 안겼다.
김 회장은 한신증권 인수를 통해 사업 전망이 밝은 금융업에 진출하며 사업다각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후 잇따라 한신기술개발금융(1986), 한신경제연구소(1986), 한신투자자문(1988)을 설립하며 결과적으로 2차 산업과 3차 산업 진출에 소요되는 자금 조달의 토대를 마련하게 됐다.
한신증권은 1996년 4월 동원증권으로 상호를 바꾸고 자기자본수익률 업계 1위의 강자로 자리 잡았으며, 1997년에 이어 1998년도 증권감독원 경영평가에서 ‘최우수 증권사’로 선정되는 쾌거를 이뤘다. 또한 이익공유(profit sharing) 성격의 원양어업 성과보상제도를 적용해 우리나라 증권업 최초로 인센티브제를 성공적으로 시행하기도 했다.
◆ 청년 시절 참치를 납품했던 미국 ‘스타키스트’를 품에 안다
1999년부터 2006년까지 7년간 무역협회장 임기를 명예롭게 마친 김 회장은 2006년 다시 동원그룹의 키를 잡았다. 그리고 2008년 세계 최대 참치 브랜드인 ‘스타키스트’와 3억6300만달러에 달하는 대형 인수 계약을 체결하며 또 한 번 재계를 놀라게 했다.
스타키스트는 김 회장이 젊은 선장으로 사모아 어장을 누비던 시절, 어획한 참치를 납품하던 회사 중 가장 큰 고객이었다. 1963년 스타키스트는 사모아 섬에 참치캔 공장을 준공하고 미국 내 참치캔 시장 조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당시 사모아 참치캔 공장에 최초로 참치 원어를 납품한 이가 바로 김 회장이다.
남태평양을 누비며 참치를 잡아 납품하던 20대 선장이 미국의 거대 회사를 50여 년 후 인수하게 된 것이다. 적자에 허덕이던 스타키스트는 동원그룹에 인수된 후 경영이 안정되면서 매해 성장을 거듭해 가고 있다.
원그룹 창립 50주년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는 김재철 회장.[사진=동원그룹] |
◆ 청년 김재철 회장... 그의 도전은 지금도 진행 중
김재철 회장은 16일 회장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 1969년 동원산업을 창업하고 회사를 이끌어 온지 50년 만이다.
회장에서 물러난 후 김 회장은 그룹 경영과 관련해 필요한 경우에만 그간 쌓아온 경륜을 살려 조언을 할 것으로 보인다. 또 재계 원로로서 한국 사회를 위해 기여하는 방안도 고민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김 회장은 “그간 하지 못했던 일, 사회에 기여하고 봉사하는 일도 해나갈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회장은 청년이다. 과감하게 도전하는 도전정신이나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열성적인 자세는 말단 선원으로서 배를 탔던 20십대 때 그대로다. 그의 도전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 약력
1935년 전남 강진 출생 / 1958년 부산수산대(현 부경대) 어로학과 졸업 / 1969년 동원산업 창립 / 1979년 동원육영재단 설립 / 1981년 미국 하버드대학 최고경영자 과정 / 1982년 참치캔 출시 / 1982년 한신증권(현 한국투자금융지주) 인수 / 1989년~ 동원그룹 회장 / 1999~2006년 한국무역협회 회장(23, 24, 25대) / 2006~2007년 여수세계박람회 유치위원장 / 2008년 미국 스타키스트 인수
△저서
지도를 거꾸로 보면 한국인의 미래가 보인다(2000, 김영사)
남태평양에서(1989~1996 초등학교 4학년 국어교과서 수록)
바다의 보고(1996~2001 중학교 2학년 국어교과서 수록)
거센 파도를 헤치고(1975~1988 실업계고등학교 2학년 국어교과서 수록)
hj0308@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