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 속 편린들...스탈린때 창설돼 소련·공산권 지도자 질병 치료
몽골 지도부 교체-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 지병도 파악
소련 해체 후 폐쇄...북 '김일성장수연구소' 유사업무 수행하는 듯
[서울=뉴스핌] 김흥식 객원논설위원 = 소련이라는 거대한 제국을 지탱하는 비밀기관들이 많았다. 그 가운데 ‘제4총국’이라는 아주 특별한 기관이 존재했다. 소련해체 이후 실체가 드러난 제4총국의 비밀활동에 대해 알려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모아졌다.
지하 벙커 입구에서 러시아 군복을 입어보는 관광객.[사진=로이터 뉴스핌] |
◆제4총국, 스탈린 시대 창설...소련·공산권 고위지도자 건강관리·질병치료 전담
스탈린 시절에 창설된 제4총국은 소련의 고위 지도자와 공산권 지도자들의 건강관리와 질병치료를 전담하는 일이 핵심 임무였다. 병적으로 의심이 많은 스탈린은 특히 자신의 건강정보가 외부에 누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신임이 두터운 비밀경찰 총수 베리야에게 제4총국의 총국장 직무를 겸임토록 했다.
이때부터 소련의 지도자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매우 유용한 KGB(국가보안위원회)와 함께 제4총국의 관리감독에 만전을 기했다. 특히 두 기관의 수장을 임명하기 위한 인선에 고심을 거듭했다. 제4총국 업무의 중요성이 더해지면서 최고 권력자인 당 서기장의 명령만 받고 서기장에게만 보고하는 독자적 비밀기구가 되었다.
공산권과 제3세계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위해 총국의 적극적 역할이 요구되기 시작했다. 아랍, 아프리카, 아시아, 중남미 등 비공산권의 친소 지도자들의 질병에 대해서도 비밀리에 공짜 치료를 해주는 일이 빈번해진 것이다.
제4총국에 보관돼 있는 주요 지도자들의 건강관련 정보는 최고의 국가기밀로 취급되었는데 이는 권력투쟁 과정에서 은밀하고도 결정적인 수단으로 작용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제4총국을 직접 만든 스탈린이 심장발작으로 쓰러지자 베리야는 제4총국장의 직책을 십분 활용해 응급조치를 고의적으로 지연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에 대한 숙청을 눈치챈 베리야가 선수를 친 것이다. 제4총국장만이 스탈린의 신체에 접근할 권한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정치국원들은 쓰러진 스탈린에 대해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스탈린의 사망으로 권력정상 문턱에까지 다가간 베리야는 동료들의 적극적인 견제로 결국 숙청되었다.
지난 1986년 10월 12일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만나 악수하는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사진=로이터 뉴스핌] |
◆브레즈네프 임명 차조프 23년간 총국장 지내...소련해체 이후 총국활동 공개
흐루시초프를 밀어내고 서기장에 오른 브레즈네프는 KGB의장에는 안드로포프를 바로 임명할 수 있었으나 제4총국장은 7개월이 되도록 임명할 수 없었다. 이 자리에 자기네 사람을 앉히려고 최대 정적인 정치국원 셸레핀과 치열한 암투를 벌였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심근경색을 앓아온 브레즈네프로서는 반대파 사람을 꺼려할 수밖에 없었다. 브레즈네프의 승리로 심장병 전문의로 유명한 37세의 차조프 박사가 총국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후 소련해체 때까지 23년간이나 자리를 지켰다.
철저히 베일에 가려진 제4총국은 소련해체와 더불어 세상에 모습을 나타냈고 그리고는 옐친 대통령에 의해 곧바로 폐쇄되는 운명을 맞았다. 그럼에도 제4총국의 활동에 대해서 러시아 언론보도와 차조프 박사의 회고록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의 흥미를 끌었는데 일부 내용을 소개한다.
1984년 8월 몽골인민혁명당(공산당) 정치국은 27년간이나 몽골을 통치해온 체덴발 서기장이 고질적 병환으로 인한 업무능력 부적격자로 판정돼 더 이상 국가와 당을 영도할 수 없게 됐다고 선언했다. 80년대 초부터 체덴발의 병환으로 후계자 지명을 둘러싸고 격렬한 권력투쟁이 전개된 터여서 정치국 결정의 배경에 관심이 쏠렸다.
무력충돌이나 정치적 후폭풍 없이 지도부가 교체된 데는 제4총국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차조프 총국장이 몽골 공산당 정치국회의에 참석해 체덴발의 병세가 회복불능이어서 업무를 정상적으로 보지 못한다고 구체적 의학적 근거를 들어 설명했다. 몽골 정치국원 대부분은 차조프의 보고에 동의했다. 체덴발의 사임을 반대하던 몽골 군부와 보안기관들도 더 이상 반발할 수 없었다.
이로써 27년간 통치한 체덴발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당시 브레즈네프 서기장은 중국 견제를 위해 친소적인 체덴발의 교체를 반대했으나 최연소 정치국원으로 두각을 보이던 고르바초프가 업무를 보지 못하는 병약한 지도자를 그대로 놔둘 수 없다며 제4총국의 개입을 통한 해결을 주장했던 것이다.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모습. [사진=로이터 뉴스핌] |
◆몽골 지도부 교체 개입-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 서기장 지병 파악
1968년 8월 체코슬로바키아 수도 프라하에서 자유민주화운동이 거세게 몰아쳤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새 지도자가 된 알렉산드르 두브체크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모토아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접목을 시도했다.
각종 민주화조치가 뒤따르자 국민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이는 브레즈네프의 지도력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자 시험이었다. 소련 지도부는 무력개입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두브체크 등 체코 측 지도부를 모스크바로 불러들여 비밀협상에 들어갔다.
어느 화창한 일요일 가족들과 영화를 감상하던 차조프 박사는 크렘린의 긴급호출을 받고 가보니 휴게실에서 쭉 뻗어 누워있는 브레즈네프를 목격했다. 코시긴 수장은 체코 지도부와 담판을 하던 브레즈네프 서기장이 갑자기 혀가 꼬이기 시작하더니 테이블 위로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고 했다.
검진결과 “브레즈네프 동지는 불쾌한 일이나 해결 못할 일이 발생하면 불면상태에 빠지고 분통을 터뜨리는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정량 이상의 수면제를 과다 복용해 일어난 것 같다”고 결론지었다. 3시간이 지나서 브레즈네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방을 나가 회담을 계속했다.
서기장이 협상장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진 사실은 극비에 부쳐졌고 체코측도 이를 양해했다. 이어 사회주의 형제국에 무력개입할 수 있다는 이른바 ‘브레즈네프 독트린’이 발표되고 프라하의 봄은 소련군 탱크에 짓밟혔다. 브레즈네프는 제4총국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1971년에는 건강을 되찾았다.
브레즈네프 사망 후 1982년 11월 당 서기장이 된 유리 안드로포프는 고질적인 신장질환으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돼 집권 9개월 만에 공식석상에 나오지도 못하게 되었다. 결국 1984년 2월 사망했다. 집권기간은 고작 15개월이었다. 뒤이은 콘스탄틴 체르넨코도 집권 훨씬 전부터 ‘걸어다니는 미라’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건강이 엉망이었다. 그 역시 집권 13개월만인 1985년 3월 사망했다.
제4총국의 의사들은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가 지병으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의학적 진실을 진작에 알고 있었으나 그들의 덧없는 권력욕을 막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짧은 치세는 소련체제의 취약성을 그대로 노정시켰다. 체르넨코의 뒤를 이어 젊고 패기만만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건강이 넘쳐보이는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새 서기장이 되면서 노령의 간부들이 대거 현직에서 물러났다. 이로써 제4총국의 업무가 크게 줄게 되었다.
[룩소르 로이터=뉴스핌] 최원진 기자= 이집트 룩소르 서쪽 둑, 파라오 아멘호텝(Amenhotop) 3세를 위해 건설된 장제전(葬祭殿)을 지키는 '멤논의 거상'. 두 개 의 석상은 장제전 유적에 유일하게 남은 두 개의 석상으로, 아멘호텝을 묘사한 것이다. 2018.11.25. |
◆이집트 나세르-알제리 부메디엔-중앙아프리카 보카사 등 외국 지도자도 진료
제4총국이 비밀리에 진행한 외국 지도자에 대한 진료는 복잡한 국제정세와 관련해 소련의 지도력을 과시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소련이 가장 신경을 썼던 지도자는 중동의 맹주로 유명한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이었다. 1968년 7월 브레즈네프는 차조프 총국장에게 심각한 동맥경화로 고통을 겪는 나세르의 병세가 심상치 않다며 특명을 내렸다.
“중동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항해 아랍인을 단결시킬 수 있는 인물은 나세르 외엔 없소. 소련의 국익을 위해 나세르의 건강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시오” 브레즈네프는 특히 나세르의 치료와 관련한 일체의 정보는 극비로 보안유지하고 오직 서기장에게만 보고하라고 당부했다. 나세르는 모스크바에서 몇 번의 수술과 광천요법으로 건강을 회복해 돌아갔다. 그러나 1970년 요르단과 팔레스타인간 분쟁이 재연되면서 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중 심근경색으로 급사했다.
외국 지도자 가운데 사전협의도 없이 소련의 진료를 받겠다며 모스크바로 무작정 입국한 경우도 있었다. 알제리의 독재자 부메디엔 대통령은 1978년 9월 열병 치료를 해야겠다며 갑자기 모스크바행 비행을 지시했다. 알제리 대통령실에서 모스크바에 보낸 긴급전문에 의하면 부메디엔의 지시로 모스크바행을 결정했다며 영공통과와 진료를 위한 협조를 부탁했다는 것이다.
현지 소련대사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제4총국 의사들이 전력을 기울여 치료에 나선 결과 초기의 우려는 가셨다. 그러나 뇌출혈과 폐경색으로 인한 사망 가능성은 없어지지 않았다. 코시긴 수상은 부메디엔이 아무리 친소적이라도 외국 지도자가 모스크바에서 치료받다가 사망한다면 복잡한 국제문제로 번질 우려가 있다며 소련 의료진을 동행해 귀국토록 했다.
귀국한 부메디엔이 얼마 후 뇌출혈로 쓰러지자 소련, 미국, 영국, 프랑스, 쿠바 등이 치료를 둘러싸고 치열한 물밑경쟁을 벌였다. 얼마 후 부메디엔은 뇌출혈로 사망했다.
중앙아프리카의 독재자이며 황제라고 자칭한 보카사도 제4총국의 의료혜택을 받았다. 평소 파충류를 즐겨먹고 인육까지 먹는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엽기적인 인물로 알려진 보카사는 심각한 위장병으로 고생하다 모스크바를 찾았다.
소련 외무부가 아프리카 외교를 강화하는 차원에서 제4총국의 치료를 주선한 것이다. 모스크바 제4총국 병원에서 치료받는 중에도 몰래 들여온 파충류를 먹다가 의사들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 치료를 받고 돌아간 보카사는 여전히 엽기적인 행각을 벌이다 얼마 후 프랑스군 지원을 받은 무혈쿠데타에 의해 축출되었다.
[평양=뉴스핌] 사진공동취재단=남북통일농구경기 참가차 평양을 방문한 정부 측 관계자들과 농구 선수단, 기자단이 3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사진은 금수산태양궁전을 지나는 모습. 2018.07.03 |
◆소련 해체 후 제4총국 폐쇄...북한 '김일성장수연구소' 유사업무 수행하는 듯
대내외적으로 다양하게 비밀활동을 벌인 제4총국은 소련이 해체되면서 그 운명을 다했다. 기구의 방대한 규모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23년간 총국장을 지낸 차조프는 제4총국의 퇴출에 대해 이렇게 아쉬움을 표현했다.
“제4총국과 같은 시스템은 과거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 러시아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 조직은 사람의 생명을 연장시키고 수많은 환자에게 활력을 되찾아주는 등 의료계에서 경탄할만한 혁신적인 기능을 수행했다. 이런 일을 한 총국을 파괴할 필요는 없었다.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합리적으로 개혁해야 했다”
덧붙이자면, 북한에도 제4총국과 유사한 비밀의료기관이 있다고 한다. 이른바 ‘김일성장수연구소’가 그것이다. 연구소에 근무했던 탈북자들에 따르면 정식 명칭은 중앙당 재정경리부 산하의 기초의학연구소와 호위사령부 소속의 청암산연구소, 73총국 산하의 만청산연구소 등인데 이들을 통틀어 ‘김일성장수연구소’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건강장수를 위해 의료, 섭생, 건강유지 등에 관한 업무를 핵심임무로 한다. 북한에서 최고수준의 전문의료진과 연구원들이 이 일에 매달리고 있다는데 규모만도 2500여명이라고 한다. 소련의 제4총국을 모델로 해서 만든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
▲김흥식 뉴스핌 객원논설위원
한국외대 러시아어과를 졸업하고 1977년 동양통신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디뎠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로 해직되는 아픔을 겪고 쌍용그룹에 몸담고 있다가 1988년 연합뉴스 기자로 복귀했다. 1991년 한국의 첫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파견돼 맹활약했다. 이후 연합뉴스 북한부장, 남북관계 부장, 문화부장, 논설위원실 간사, 경영기획실장을 거쳐 편집담당 상무이사를 지냈다. 퇴임후 연합뉴스 부설 동북아센터 상임이사, 중소기업진흥공단 비상임이사, 도로교통공단 비상임이사, 방송통신심의위원회 특별위원 등을 지낸뒤 현재 뉴스핌 객원논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khs@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