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배우 차지연, 김재범이 5일 오후 서울 강남구 신사동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열린 뮤지컬 '서편제' 프레스콜에서 열연을 펼치고 있다. /김학선 기자 yooksa@ |
[뉴스핌=양진영 기자] 뮤지컬 '서편제'가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한으로 승화시키는, 한국인들의 정서를 제대로 자극한다. 우리 모두는 극단적인 송화의 운명 속에서 발버둥치는 스스로를 보고 느끼고 눈물을 터뜨린다.
김문정 음악 수퍼바이저, 윤일상 작곡가 등 내로라하는 제작진들과 이자람, 차지연, 이정열, 서범석, 강필석, 박영수, 김범석 등 최고의 배우들로 이미 명성이 자자한 '서편제'. 실제로 만나본 무대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쏟아내며 객석의 진을 다 빼놓았다. 단순한 감동이나 공감을 넘어, 우리의 삶을 살아내며 쌓인 해묵은 감정들이 이유없이 터져나오는 눈물에 섞여 구석구석 씻겨 내려가는 듯 했다.
◆ '서편제' 송화와 동호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차지연의 '소리'
세월의 풍파를 겪으며 늙어버린 채로 동호(강필석)와 송화(차지연)가 다시 만난다. 이 장면은 마지막에도 반복되며 객석의 이해를 돕고 여운에 깊이를 더한다. 눈이 멀어버린 송화 앞에서 북을 치는 동호. 마치 소리를 놀이로 즐기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하다. 매 회 객석을 눈물바다로 만드는 '서편제'의 힘은 아역부터 성인 송화와 동호, 늙어서 다시 만난 둘의 긴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어머니를 잃은 동호에게 '살다보면, 살아진단다'고 노래하는 어린 송화 역의 아역과 차지연의 호흡은 극 초반일 뿐인데도 관객들의 울컥한 감정을 건드린다. 노래 가사 자체에도 현실에 지친 모두에게 와닿는 넓은 의미의 위로가 담겨 있다. 아역과 차지연의 담백한 목소리로 시작된 노래는 클라이막스에서 시원하게 터뜨리는 고음과 감정으로 마음을 뻥 뚫어주는 듯 하다.
차지연의 열연은 매순간 관객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든다. 특히 유봉이 송화의 눈을 멀게 하고, 찢어질 듯 울부짖는 순간에는 그 절망감이 객석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는 모두에게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감정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고, 송화의 기구한 운명과 현실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극 후반에는 송화가 무대에서 걷기만 해도 객석에선 눈물이 멎지 않을 지경이었다.
5일 오후 서울 강남구 신사동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열린 뮤지컬 '서편제' 프레스콜에서 출연배우들이 열연하고 있다. /김학선 기자 yooksa@ |
강필석이 연기한 동호는 '서편제'에서 가장 많은 변화를 겪는 인물이다. 어머니의 죽음과 절망, 누이인 송화를 아끼고 사랑하는 감정, 유봉과 갈등을 겪어내면서도 힘 있게 중심을 잡으며 무리 없이 동호 역을 연기해냈다. 뮤지컬 '서편제'에서 이렇게나 많은 서양음악(?)이 나올거라 기대한 관객은 많지 않을 듯 하나 송화와 동호의 대비되는 인생을 보여주기엔 효과적이었다. 갑작스레 유봉의 죽음을 맞는 신은 한참을 보고 있어도 무슨 장면인지 알 수 없었지만, '서편제'는 판소리극이 아닌 판소리를 소재로 하는 뮤지컬로서 배치와 구성이 잘 이루어진 편이었다.
◆ 형언할 수 없는 감정과 이유없이 터지는 눈물, '서편제'와 유봉의 교훈
극 초반 어린 동호와 동호 어머니의 사연과 넘버부터 객석은 눈물바다가 된다. 자유를 갈망했지만 자식 때문에 묶여버린 어머니의 운명. '서편제'에서 스스로 강력한 의지를 갖고 실천하는 사람은 송화와 동호 어머니가 아니라 송화 아버지 유봉(서범석)과 동호다. 양 측의 대비되는 운명이 어쩌면 여전히 씁쓸한 현실을 곱씹게 한다.
'서편제'의 원작자 故이창준은 별 거부감 없이 현실을 담아냈으나 현재의 관객들은 서편제를 보며 알 수 없는 거부감을 느낀다. 유봉은 불멸의 의지를 가졌고, 송화를 통해 소리의 완성이라는 꿈을 이루려 하지만 그 과정은 한없이 일방적이고 이기적이다. 송화, 동호의 의견과 진심, 고통은 중요하지 않다. 극 중 유봉은 상대의 마음이 어떠할지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인물로 보인다. 자식에게 맹목적으로 원하는 것을 강요하는 전형적인 한국적 어른의 이미지가 오버랩된다.
뮤지컬 배우 이정열이 5일 오후 서울 강남구 신사동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열린 뮤지컬 '서편제' 프레스콜에서 열연을 펼치고 있다. /김학선 기자 yooksa@ |
심지어 유봉은 소리에 집중하지 못하는 송화의 두 눈을 일부러 멀게 한 비정한 아버지다. 서열 권력을 가진 이의 맹목적인 가치 추구가 주변인을 얼마나 고통으로 몰아넣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개인의 행복보다 더 큰 어떤 가치가 있다 한들, 누군가를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희생시킬 명분은 어디에도 없다. 소리의 완성을 이루었다 해도, 결국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모든 것을 잃은 송화의 삶이 과연 행복했을까. 송화가 부르짖는 '살다보면, 살아진단다'는 메시지는 교훈일 수 없다. 그저 체념하고 포기한 채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낸 대가로 소리를 얻은 것 뿐이다.
두 눈이 멀고, 의탁할 곳도 없이 정처없이 떠돌며 소리의 완성을 이룬 송화. 명창의 자리에 올랐으나,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마지막에 온 몸을 다해 토해내는 심청가에서 절로 느껴지는 한스러움에 관객들은 속수무책으로 눈물이 터진다. 누구도 송화만큼은 아니지만 때로는 끔찍한 운명을 끌어안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유봉과 달리 우리는 송화에게 공감할 수 있고, 조금 더 나아진 현실을 꿈꿀 수 있다는 것이 '서편제'의 교훈이 아닐까. 오는 11월 5일까지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공연된다.
[뉴스핌 Newspim] 양진영 기자 (jyyang@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