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흔히 보이는 것들로 뫼비우스적, 그 이상의 상상 여행을 하려 한다. 주변의 사물들엔 저마다 독특한 내력이 숨어 있고 어떻게 빚느냐에 따라 보석이 되기도 하고 나침판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출발한 여행의 과정에 어떤 빛깔의 풍경이 나타날지, 그 끝이 어디까지 다다를지 필자 자신도 설레인다. 인문학의 시대라고 하는데 인문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 메타적 성찰 역시 필요한 시점이다. 사물과 풍경, 시대와 인문을 두루 관통하면서 색다르면서도 유익한 여행을 떠나려 한다.
마음에 오래 맺힌 풍경은 어느 순간 또다른 풍경으로 인해 새롭게 채색되기도 한다. 무의식과 시간은 이처럼 절묘하게 삶에 무늬들을 그려 나간다.
최근에 중국의 요령성 일대를 답사한 적이 있다. 북탑과 봉황산 등으로 유명한 조양의 어느 거리를 걷다가 내 눈을 사로잡은 풍경이다.
붓이라 할 수 있는 긴 도구에 물을 묻혀 누군가 보도블록에 글을 쓰고 있었다. 손에 들린 책을 보며 쓰는 것이 산문인지 시인지는 모르지만 내게는 저 자체가 시로 보였다. 아니 시마저 넘어서는 느낌이었다.
물이 마르는 쪽에선 쓰여진 글자가 지워져가고 있었다. 멋지게 휘갈겨진 글자가 시나브로 마르며 사라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런 것을 알면서도 그는 긴 붓을 놀리며 글을 써나갔다.
음악적이라는 느낌이 강해지고 있었다. 허공에 밀도 깊은 소리를 순간적으로 선사하고는 이내 사라지는 음악과 저 풍경은 본질적으로 닮아 있었다. 물론 소리는 나지 않는다. 소리 없는 음악이라고나 할까.
내 안에 오래 맺힌 풍경 중 하나는 아일랜드 출신의 화가인 프란시스 베이컨의 말이다. 그는 독특한 그림으로도 유명하지만 이런 말을 남겼는데 나는 그 광채에 오래도록 빠져 있었다. ‘나는 고함을 그리고 싶다.’ 베이컨이 한 말이다.
고함은 그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질러지거나 들릴 수 있는 성격의 것이다. 그러기에 고함을 그리고 싶다는 말은 그릴 수 없는 것을 그리고 싶다가 된다. 달리 말하면 불가능의 가능을 꿈꾼다가 된다.
언뜻 보면 말장난으로도 보이겠지만 그 내막을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베이컨의 고국인 아일랜드는 영국의 지배, 대기근으로 인한 식량난 등의 역사적인 비극을 품고 있다. 베이컨이 활동하던 시대는 유럽을 휩쓴 세계대전 등의 재앙 속에 아일랜드 특유의 비극이 더욱 심화된다. 그러한 정황도 베이컨의 저 말 속에 배어 있을 것이다.
베이컨의 그림들은 해괴하기 이를데 없다. 사람들의 얼굴을 마치 푸주간의 고기 이상으로 일그러뜨리고 짓이겨 놓는다. 뭉크의 ‘절규’가 연상되기도 하는데 그보다 훨씬 잔혹하고 그로테스크하다. 베이컨 자신의 말처럼 고함을 그린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철학자 들뢰즈는 베이컨의 그림들을 해석하며 자신의 철학을 확장시킨다. ‘기관 없는 신체’라는 괴상한 개념이 등장된다. 간, 콩팥, 위장 등으로 분화되기 이전의 살덩어리를 떠올리면 이해에 가까워질 것이다. 명명되고 분리되고 논리화되기 이전의 즉물 상태를 드러낸다고 봐도 될 것이다. 간, 콩팥, 위장 등으로 규정된 상태가 아니라 그 무엇으로도 될 수 있는 잠재성으로 보면 될 것이다. 시대의 비극과 어우러진채 그에 대항해 무모한 예술로서 불가능의 가능을 모색하는 베이컨의 예술은 그처럼 논리나 합리 이전의 세계를 고독하고 집요하게 추구한다고 해도 될 것이다.
여기에서도 보이듯 서양 철학의 개념은 해괴한 언어의 조합으로도 나아간다. 필자가 이름지었듯 스토리 빌딩의 한 예로 삼아도 될 것이다. 가이드가 없고 공허하기에 그럴 수밖에 없을 거라고 단정하면 무리가 생기겠지만 그렇게 추정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런 복잡하게 꼬인 말에 공연히 주눅들 필요가 없다. 그런 말의 이면을 헤아리며 찬사를 보낼 것은 보내고 그 너머 필자처럼 잉여의 감정이 생긴다면 자신의 것으로 삼든 자신의 철학으로 나아가면 된다.
부연을 조금 한다면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 개념은 또다른 철학자에 의해 ‘신체 없는 기관’으로 뒤집혀 다른 논리의 옷을 입는다.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 개념을 뒤집어 공격함으로써 들뢰즈가 미처 인지하지 못한 또다른 세계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렇게 주장된 자신의 개념을 우위에 놓고자 하는 권력 의지일 수도 있다.
이런 개념들에 대한 복잡한 논의를 하려는 취지의 글은 아니다. 그런 것은 일단 전문적인 철학자들의 몫일 것이다. 필자는 다만 지금껏 흘러온 수필에서 보듯 동서양 즉 세상에 흐르는 맥락들 속에 그런 개념들을 놓고 이해와 동시에 그것들 너머의 잉여를 봄으로써 비판의 가능성을 보자는 것이다. 그런 시각으로 본다면 개념이 어떠하든 맥락적 이해 속에 탄성과 더불어 측은지심마저 생길 수 있다.
서양 철학이 이처럼 전통적으로 쓰이지 않던 해괴한 말의 조합으로 막 나가는 것은 기존의 이성, 합리 등등의 개념들로 세상이 더 이상 설명되지 않는다는 절망의 표현일 수도 있다. 앞의 수필에서 우주의 본질이 맹점이라고 할 수도 있다는 말처럼 세상의 본질 역시 파악 불가능하다. 게다가 현대 문명은 더욱 기이하게 진행된다. 이처럼 변모된 세계에 대해 그에 맞는 개념이 창출될 수밖에 없는 바 상식으로 보면 생뚱맞은 개념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나는 고함을 그리고 싶다’는 베이컨의 말은 들뢰즈의 저서 ‘감각의 논리’에서 읽힌지 십 여년이 지났어도 내 안에 깊은 울림으로 남아 있다. 불가능의 가능은 예술의 본질 중의 하나임을 의심치 않는다. 유목민적인 사유를 하며 철학을 너머 예술, 과학 등으로 종횡무진 탈주를 통해 20 세기 후반을 풍요롭게 한 들뢰즈 역시 내 안에 자리잡고 있다. 인공지능이니 사물인터넷 등등의 전혀 색다른 세계가 밀물처럼 밀려오는 지금 지난 세월을 풍미했던 들뢰즈 등등의 탁월한 철학자들의 세계도 이젠 신선미가 줄어드는데다가 최적의 처방을 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물론 베이컨이나 들뢰즈는 한 시대를 풍미했고 그들의 영향은 지금 이 시대까지도 지대하다. 앞으로도 그런 면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왠지 모를 강박의 내음. 기존의 미술이나 철학을 해체하며 전혀 다른 세계를 빚어나가면서도 그림이든 개념이든 짓이겨 놓을 수밖에 없는데서 나왔을. 그런 것들이 조양 거리의 바닥에 긴 붓에 물을 찍어 그려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봄비에 닦여나가는 기분이었다.
저 거리의 예술가는 보통 사람일뿐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조양엔 이런 풍경이 꽤나 보였다.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로서 바닥에 음악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베이컨이나 들뢰즈의 미술 내지 사유에 대한 비판의 글까진 되지 못할 것이다. 다만 그 곁에 가만히 놓아두어도 괜찮을 듯하다. 물이 붓에 배여 바닥에 물의 시를 쓰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풍경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존재하는 듯 하다가 사라져 공(空)이 되어 버리는 것. 베이컨이 고함을 그리고 싶었다면 이름 모를 평범한 예술가는 바닥에 허공을 그리고 있었다.
이명훈(소설 ‘작약도’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