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장주연 기자] 단아하고 맑은 선생님. 국민적 사랑을 받았던 드라마 ‘로망스’(2002)를 시작으로 자그마치 15년 동안 그에게는 이 이미지가 짙게 깔려 있었다. 배우 생활에 있어서 마이너스가 되는 부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만큼 배우로서 답답함과 갈증 역시 커져갔다. ‘여교사’ 시나리오를 받은 후 신기하면서도 고마웠던 이유도 그래서였다. 대다수 감독이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떠올릴 거라는 걸 누구보다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었기에.
배우 김하늘(39)이 그간 본 적 없는 파격적인 모습으로 극장가를 찾았다. 지난 4일 개봉한 ‘여교사’를 통해서다. 김태용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여교사’는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벼랑 끝에 몰린 한 여자가 마지막 자존감을 짓밟히면서 파괴되는 처절한 과정을 그린 작품. 극중 김하늘은 타이틀롤 효주를 연기했다.
“시나리오를 받고 일단 감독님과의 미팅을 빨리 잡았죠. 출연한다기보다 정리가 필요했어요. 감독님께 묻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죠. 왜 대체 내게 이 시나리오를 줬는지, 왜 이 캐릭터에 나를 생각했는지 너무 궁금했거든요. 감독님이 그러셨죠. 평소 저에 대한 관심이 있었고 ‘힐링캠프’ 같은 사적인 인터뷰에서 남들이 느끼지 못한 김하늘을 봤다고요. 거기 효주의 느낌이 있었는데 그걸 끄집어내고 싶었대요.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고요? ‘힐링캠프’를 찾아봤죠. ‘내가 대체 거기서 무슨 말을 했는데 이러는 거야?’라면서요(웃음).”
이제 와 말이지만, 사실 김하늘은 그때 김태용 감독의 대답이 너무나 고마웠다. 새로운 내 모습을 찾아내 줘서 기분이 좋았고, 그걸 발견해준 감독과의 작업이라면 더없이 흥미로울 시간이 될 거라 확신했다. 물론 그 아래에는 새로움에 도전하는 배우로서 설렘도 있었다.
“물론 걱정은 됐죠. 이 감정을 내가 다 감당할 수 있을까 싶었거든요. 근데 만약 이걸 내가 잘해낸다면 배우로서 희열감이 엄청날 듯했어요. 실제로 연기하다 보니 진짜 설렜고요. 저한테서 발견하지 못한 게 모니터로 표현되는 게 신났죠. 사실 언론시사회 때도 영화를 보고 놀랐어요. 분명 모니터했는데 오랜만에 보니 목소리 떨림, 숨소리, 눈동자 움직임 등이 너무 낯설더라고요. ‘아, 내가 저런 연기를 했어? 정말 몰입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다만 설렘 뒤에는 고충도 있었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느꼈던 그 모멸감을 촬영하면서 또 한 번 견디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배우로서 희열과 스태프들의 응원으로도 채울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했다. 특히 언제나 사랑받기만 한 ‘로맨틱 코미디(로코)’의 아이콘인 그로서는 지금껏 겪어 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쉽진 않았어요. 지금까지 사랑받는 캐릭터를 많이 했잖아요. 물론 공포, 스릴러 장르도 했지만, 그건 이런 모멸감이 아니죠(웃음).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자존감이 떨어지고 자존심도 상했어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효주가 매 순간 이해됐어요. 물론 효주가 조금 날카로운 부분도 있죠. 근데 그거조차도 이해되더라고요. 사실 효주는 열등감이 커요. 겉으로는 자존감 하나로 있는 거로 보이지만, 사실 뒤틀어져 있고 꼬여있죠. 모든 사람이 그 환경에 놓였을 때 효주처럼 극단적으로 반응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래서 제게 효주는 가장 아픈 손가락, 제일 안타까운 친구죠.”
그렇다면 효주를 이해하는 데 있어 경험에서 비롯된 공감도 있었을까. 김하늘도 효주처럼 열등감에 무너지고 질투심에 휩싸였던 적이 존재했을지 궁금했다. 당연히 시점은 어렸을 때가 아닌 성인이 된 후, 그리고 연예계 생활이 시작된 후로 설정했다.
“안 느껴본 사람이 있을까요?(웃음). 어렸을 때도 커서도 항상 질투심과 열등감은 있죠. 이 일을 시작한 후에도 마찬가지예요. ‘저 작품 욕심나는데 왜 나한테는 안 들어왔지?’라는 생각도 따지고 보면 열등감이죠. 질투심도 그래요. ‘저 배우가 입은 드레스 예쁜데 어디 걸까?’ ‘저 립스틱 색깔은 어떤 거지?’ 등도 질투심이죠. 다만 어릴 때와 달리 성숙했고 이성이 발달했으니까 저를 컨트롤 하는 방법을 알아요. 그래서 긍정적으로 생각하죠. ‘내가 아직 못 보여준 모습이 있구나’ ‘내가 더 열심히 해야겠다’ 하고요. 절 트레이닝 시키는 거죠. 그렇게 해야 제가 더 빛날 수 있다는 걸 알아요. 그렇게 부족한 걸 돌아보면서 단단해지는 거죠.”
효주를 비롯해 전작인 드라마 ‘공항 가는 길’에 수아까지. 김하늘에게 관심을 둔 이라면 그의 연기 장르가 최근 급변했다는 걸 알 수 있다. 행복의 기준이야 각기 다르니 불행한 캐릭터를 연기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김하늘이 근래 살아간 인물들은 삶에 지쳐있고 어딘가 결핍돼있었다.
“관심가는 게 달라졌죠. 사실 최근에도 로코가 들어왔는데 관심이 안 가더라고요. 제가 지금까지 로코로 사랑을 진짜 많이 받았어요. 흥행도 잘됐고요. 근데 20년 가까이 하다 보니 캐릭터나 연기적으로 폭을 넓히고 싶은 욕심이 생겨요. 물론 로코도 각자 다른 색깔이 있죠. 하지만 아무래도 같은 부분이 많잖아요. 흥행과 조금 멀어져도 연기를 오래 하려면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봐요. 비록 흥행에 실패했다는 평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저의 연기에 관심 있는 분들은 박수를 쳐주실 거란 믿음이 있죠. 차기작도 그렇지 않을까 싶고요.”
혹, 삶이 너무 행복해서 반대의 작품, 캐릭터를 찾는 건 아니냐는 농담 섞인 질문에 김하늘은 “그럴지도 모른다”며 환하게 웃었다. 현재 자신의 삶을 ‘로코’라고 단정 짓는 그는 요즘 알콩달콩 신혼 재미에 푹 빠져있다.
“제 삶은 로맨틱 코미디죠(웃음). (남편과도) 잘 지내고 있어요. 연기하는 데 도움도 되죠. 이번 ‘여교사’ 시나리오가 들어왔을 때도 연애 중이었거든요. 제가 워낙 이야기하는 걸 좋아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내용을 쫙 이야기해줬는데 재밌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일반인이니까 아마 감정 이입이 정확하게 되지는 않았을 거예요. 다만 제가 혼자 너무 신나서 말하니까(웃음) 재밌을 것 같다, 신선하다는 반응을 보였죠. 근데 원래 제 성향 자체가 로맨틱 코미디에요. 많이 밝고 또 많이 웃으면서 생활해요. 특히 지금의 제 삶은 더 그렇죠.”
[뉴스핌 Newspim] 장주연 기자 (jjy333jjy@newspim.com) <사진=필라멘트 픽쳐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