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글 장주연 기자·사진 김학선 기자] 개봉 2주차에도 열기가 식을 줄 모른다. 역대 12월 첫 주 개봉작 중 최고 오프닝 스코어 달성, 2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며 거침없는 흥행 질주를 펼치고 있는 영화 ‘판도라’가 개봉 12일째 300만 관객을 돌파했다.
개봉 후 바쁜 일정을 쪼개 마주한 배우 정진영(52)은 관객들의 꾸준한 관심에 감사를 표했다. 물론 한편으로는 괜한 공포심을 안겨줄까 걱정도 되지만, 그는 이 영화가 우리 사회에 보다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대개 첫 주 지나고 관객 평이 입소문을 타면서 그다음 힘이 정해지죠. 추이를 보니까 우리 영화도 그 힘이 생긴 듯합니다. 스코어도 개봉 주보다 그다음 주가 훨씬 좋았고요. 워낙 시국이 엄중해서 영화 이야기를 할 상황도 아니었고 영화 자체 인지도도 높은 편이 아니었는데 입소문 덕을 보고 있네요. 물론 이게 또 관객이 많이 든다고 좋아할 일은 아니지만요. 울산 쪽에서 스코어가 높다더라고요. 이 영화로 원전 지역은 더 불안해하는 거죠. 그래도 시작점은 필요하니까요. 차근차근 불을 피워서 밥을 먹어야 하지 않겠어요. 아무것도 없는데 밥 먹자고 하면 안되죠(웃음).”
정진영이 ‘판도라’에 출연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정진영은 “오래 걸려도 건강하게 사회적 합의가 시작될 수 있어야 하고 그 시작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물론 당시에는 시국이 지금과 같지 않았기에 걱정은 됐다. 과연 이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에 대한 우려였다. 하지만 그건 제작진의 몫이라 여겼다. 그래서 고민 없이 출연 의사를 전했다.
“원전을 다루는 이야기를 우리나라에서 할 수 있는가, 한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시나리오를 보고 후끈 달았죠. 책도 아주 재밌게 읽었고요. 하겠다는 결정은 금방 내렸어요. 다만 진짜 만들어질 수 있을까 우려는 했죠. 오래 걸릴 줄 알았거든요. 근데 시나리오 받고 8개월 후에 촬영 들어갔죠. ‘왕의 남자’는 1년을 기다렸으니(웃음) 빠르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촬영 들어간 후에는 고민할 게 없었죠.”
정진영은 ‘판도라’에서 재난 현장을 지키는 전(前) 발전소 소장 평섭을 연기했다. 역할이 역할인 만큼 촬영 틈틈이 원전 공부에도 힘썼다. 특히 전라남도 보성에서 촬영할 당시에는 직접 울진원자력발전소를 견학하기도 했다. 다만 짚고 넘어가야 할 건, 그가 원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게 ‘판도라’ 때문은 아니라는 거다.
“제가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지 않습니까. 그때가 환경 운동이 시작될 때라 원전은 진보적 의지 중 하나였죠. 물론 깊이 알지는 못했어요. 지금 우리 아들이 고3 수험생인데 초등학교 때 꿈이 핵물리학자였죠. 학문 자체가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공부를 좀 했죠. 근데 막연하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구체적으로 있더라고요. 당시 한수원(한국수력원자력)에서 아들과 홍보물을 찍자고 연락이 오기도 했는데 거절했어요. 하면 안될 논리가 생긴 거죠.”
이러한 이유 때문일까. 일각에서는 정진영을 ‘원전 반대론자’라고 단정 지었다. 하지만 정진영은 “반대 입장을 갖고 있을 뿐 반대론자는 아니다”라고 확실히 선을 그었다.
“전문가 차원에서 반대론자라고 할 수는 없어요. 그 정도로 이론을 공부하지도 않았고요. 그냥 반대 입장을 갖고 있다는 정도죠. 우리나라에서 원전 정책은 재고할 여지 없이 계속 밀고 나왔어요. 근데 공부하다 보니 그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됐죠. 우리 영화 역시 그런 부분을 담고 있는 거예요. 반(反)원전 운동을 불러일으키려는 게 아니고요. 한수원 고발 영화는 더더욱 아니죠. 한수원 측에서 이걸 보라고 한다고 하니까요. 그저 원전 실태에 대한 문제 제기를 분명히 하는 거예요.”
그가 ‘판도라’로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다. 바로 이 영화가 사회적 합의의 시발점이 되는 것. 앞서 언급한 출연 계기와도 일치한다.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 위한 국회의원 연구모임의 ‘판도라’ 시사회에도 참석한 그는 “이렇게 논의가 되면 좋은 사회적 합의가 이뤄질 거 같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적 힘이 있다”며 뿌듯한 마음을 드러냈다.
“우리가 희망을 느낀 건 영화적 엔딩 때문이 아닙니다. 원전 문제의 사회적 합의를 도출할 수 있는 논의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는 거죠. 찬반은 있을 수 있어요. 중요한 건 이번 기회에 같이 수면 위로 올려놓고 이야기해 보자는 거죠. 실제 납품 비리가 있었던 나라고 안전하다고 두고 볼 시기도 아니지 않습니까. 어쨌거나 이건 온 국민이 관심을 갖고 들여다봐야 할 문제임이 틀림없어요. 가능성이 크건 적건 간에 한 번 일어나면 돌이킬 수 없는 재앙임이 분명합니다. 비록 지금 우리 사회에는 해결해야 할 더 급한 일이 있지만, 원전에 대해서도 검토해보고 함께 생각해봤으면 해요.”
우리 사회에 해결해야 할 더 급한 일, 이건 대한민국 전체를 혼란에 빠뜨린 최순실 게이트를 의미한다. 그간 공식, 비공식 석상에서 정치적 소신 발언을 서슴없이 해왔던 정진영에게 부담은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김제동, 이승환 같은 분들이 대단한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저는 뜨문뜨문 이야기하는 정도인 걸요. 이럴 때나 물어보면 이야기하는 정도죠. 대단하게 하는 일도 없고 엄청난 영향을 가진 사람도 아니고요.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제 이름도 없어요. 물론 이승환 씨도 없고요(웃음). 근데 전 배우라도 국민 중 한 명이니까 의사 표현을 하는 건 당연하다고 봐요. 물론 개개인의 소신보다는 작품 때문에 말을 할 수 없는 상황도 오지만요. 근데 사실 요즘엔 누가 이야기했다고 국민이 거기에 좌지우지되지 않아요. 온 국민이 스스로 알고 깨우치고 분석까지 하는 시국이죠. 온 국민이 나름의 입장을 갖고 사태를 대해요.”
바른말을 하는 성향은 그간 연기 생활에도 꽤나 큰 영향을 미쳤다. 실제 그의 필모그래피에는 종종 사회 고발성 작품과 진중하고 무거운 캐릭터가 많았다. 물론 여기에는 앞서 꽤 오랜 시간 SBS 시사프로그램 ‘그것이 알고싶다’를 진행한 영향도 있다.
“‘그것이 알고싶다’ 끝난 지가 벌써 10년이 됐어요. 젊은 친구들은 한 것도 모를 겁니다(웃음). 제가 그걸 4년 정도 하고 관둔 게 그런 이미지가 각인돼서죠. 그래서 이후에 캐릭터도 다른 걸 많이 갔고요. 이준익 감독하고 허당 캐릭터도 하고 양아치 역할도 했죠. 근데 그런 캐릭터를 연기하는 게 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요. 배우는 자기가 역을 만들어서 하는 게 아니라 내게 들어온 롤 중에서 내가 동의하는 인물의 삶을 따라가는 거죠. 물론 옛날에는 그런 이미지로만 인식된다는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어요. 그래서 ‘그것이 알고싶다’도 그만둔 거고요. 근데 요즘엔 그런 생각을 안해요. 어떻게 보일까란 생각 자체를 안하는 거죠.”
이제는 많이 내려놓고 작품에 임한다는 그의 차기작은 영화 ‘대장 김창수’다. 김구 선생의 20대, 즉 청년 김구의 일생을 다룬 영화로 정진영은 고진사 역을 맡아 촬영에 한창이다.
“급하게 살지 않는데 공교롭게 이번엔 시기가 맞물려서 정신이 없네요. 드라마 끝나고 여유롭게 있다가 스케줄이 몰렸죠. tvN ‘동네의 사생활’도 런칭하고 바빴죠. 근데 이제 다시 여유로워 질 듯해요. ‘판도라’ 경우엔 무대인사만 남았고, ‘동네의 사생활’도 정착 단계죠. 이건 토크쇼인데 심도 깊은 논의는 아니지만 각자의 생각을 들어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에요. 두 달 정도 지나면 이것 역시 자리가 잡히지 않을까 합니다(웃음).”
[뉴스핌 Newspim] 글 장주연 기자 (jjy333jjy@newspim.com)·사진 김학선 기자 (yooksa@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