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글 장주연 기자·사진 이형석 기자] 올봄 마주한 그는 걱정이 많았다. 얼굴엔 그늘이 있었고, 종종 우울한 분위기마저 감돌았다. “이젠 내려놓고 싶다”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꽤나 마음이 아팠던 기억도 있다. 호된 성장통을 겪는 듯했다. 다행히 그 시간이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계절이 두 번 바뀐 후 다시 만난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밝고 유쾌했고 자주 환하게 웃었다. 신작 ‘걷기왕’ 덕분이라고 했다. 한창 힘든 시기를 보낼 때 우연처럼 만난 이 영화는 그를 따뜻하게 안아줬고, 괜찮다고 다독여줬다.
배우 심은경(22)이 영화 ‘걷기왕’을 선보인다. 20일 개봉하는 ‘걷기왕’은 선천적 멀미 증후군을 가진 여고생 만복이 자신의 삶에 울린 경보를 통해 고군분투하는 성장기를 담았다. 심은경은 무조건 빨리, 그리고 열심히 하라고 강요하는 세상,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는 타이틀롤 만복을 열연했다.
“시나리오가 들어왔을 때 제 고민에 대해 정리해 나가던 시기였어요. 그러다 이 영화를 만난 거죠. 영화 속 메시지에 너무 공감했고 만복은 저를 보는 듯했어요. 물론 완성된 영화를 보니 만복이 더 이해되고 위로받은 기분이죠. 내가 고민했던 순간, 슬럼프 속에서 지낸 시간이 스쳐 가서 뭉클하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한 번 감독님께 감사드렸어요. 이 작품에 제게 들어온 거 자체가 행운이라고. 힘들었던 시기를 지나면서 만난 작품이었고, 덕분에 한 뼘 더 성장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됐으니까요.”
만복에게서 자신을 본 게 사실 심은경뿐만은 아닐 거다. 만복은 멀미 증후군을 겪고 있지만, 우리네 평범한 청춘의 모습을 하고 있다. 꿈이 없어 불안하고, 자신만 뒤처진 것 같아 우울한 청춘. 그래서 심은경 역시 만복을 가장 평범하게 그리려 노력했다.
“메이크업도 거의 안했고 여드름도 일부러 보이게 뒀죠. 마치 지금 어느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처럼 보이게요. 연기할 때도 뭘 만들기보다 제 경험을 토대로 감정을 녹여내려 했고요. 제 모습을 끄집어내 만복 스타일로 재해석한 거죠. 다만 멀미 증후군 설정상 구토 장면은 신경을 많이 썼어요. 과장되지 않되 실감나게 하려고요. 하지만 그 외에는 있는 그대로 꾸미지 않고 그때 상황, 감정에 충실했죠.”
캐릭터를 억지로 창조하려 들지 않으니 생각을 비울 수 있었고, 그러다 보니 좋은 아이디어와 연기가 많이 나왔다. 덕분에 애드리브도 곳곳에 많이 녹일 수 있었다. 심은경은 “거창한 건 아니다”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키미테를 붙인 후 옷을 제대로 입지 못해 휘청거리는 장면이나 선배 수지에게 느닷없이 반말을 하는 장면 등 웃음을 유발하는 주요 장면들이 모두 그의 애드리브다.
“툭툭 튀어나온 연기였죠. 마음이 편해서 가능했어요. 이건 감독님과 배우들의 도움이 컸죠. 다들 즐기시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제가 그동안 연기를 즐기지 못했다 깨달았죠. 잘하는 것에만 치중했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연기의 본질을 잃어갔던 거예요. 그러다 이번 촬영에서 처음 연기했을 때 감정을 느꼈어요. 초심을 잃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오랜 기간 연기하다 보니 어떤 일거리처럼 생각했나 봐요. 많이 반성했고, 덕분에 좀 즐기면서 촬영할 수 있었죠.”
심은경은 그러고도 여러 번 좋은 작품과 좋은 배우를 만나 더없이 행복했다는 말을 반복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숙제는 이번에 배운 대로 계속 자신을 내려놓는 연습을 하는 것, 그리고 연기를 즐기던 초심을 상기시키는 거다.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는다는 거 자체가 쉬운 건 아니라고 봐요. 하지만 힘든 와중에도 내려놓아야 하죠. 예전엔 나를 내려놓는 게 자신에게 지는 거고 굴복하는 것 같았어요. 근데 오히려 나답게 살아갈 수 있는 거구나, 남들보다 여유롭게 생활할 수 있는 거구나 이번에 깨달았죠. 그런 생각이 바탕이 되니 연기할 때도 마음이 편해졌고요. 무엇보다 내가 좋아서 즐기면서 해야지 진가가 발휘된다는 걸 알았죠.”
‘걷기왕’을 통해 배운 이 ‘내려놓음’이 다음 촬영(심은경은 ‘걷기왕’이 끝난 후 곧바로 ‘특별시민’ 촬영에 들어갔다)에도 영향을 줬느냐고 물었다. 심은경은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답했다. 장르가 상반되는 작품인지라 둘을 놓고 비교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고 덧붙였다.
“고민의 지점이 완전히 달라졌죠. 두 작품은 톤이 180도 다른 영화에요. ‘특별시민’은 비로소 성인 연기에 도전한 영화고요. 저보다 나잇대도 살짝 높은 직업군을 가진 여성을 연기했거든요. 아무튼 ‘특별시민’은 사회적 리얼리즘을 베이스로 두고 있어서 과장하는 연기는 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예전처럼 ‘어떻게 하면 잘해볼 수 있을까?’ 고민하지 않고 ‘내가 이 입장이면 어땠을까?’ 생각하게 됐죠. 계산하기보다 그 캐릭터에 대입해서 그 마음에 깊게 파고드는 거죠.”
몸도 마음, 그리고 연기도 한층 성숙해진 심은경은 ‘특별시민’ 외에도 다양한 곳에서 만날 수 있다. 우선 지난해 찍어둔 ‘궁합’과 ‘조작된 도시’가 줄줄이 개봉을 기다리고 있고, 최근 연상호 감독의 신작 ‘염력’ 출연도 확정지었다.
“올 한해 여러 편의 영화가 개봉했고 촬영했어요. 그래서 주변에서도 바쁘지 않냐고 물어보는데 생각 외로 여유로웠어요. 8월 말부터 9월 중순까지는 여행도 다녀왔고요. 틈틈이 쉬는 시간이 생기더라고요. 오히려 집에만 있는 시간이 꽤 있어서 심심한 때도 있었죠(웃음). 그리고 요즘엔 일상에서도 최대한 여유를 많이 찾으려고 해요. 예전처럼 한 일에만 전념하지 않으려고요. 심적인 여유가 있어야 힘이 생겨서 일도 열심히 하니까요. 쉬엄쉬엄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요. ‘걷기왕’처럼요(웃음).”
[뉴스핌 Newspim] 글 장주연 기자 (jjy333jjy@newspim.com)·사진 이형석 기자(leehs@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