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브린디시 항을 떠난 배는 다음날 아침 그리이스의 파트라스 항에 도착했다. 그리이스. 유럽 문명의 시발점이라고 일컬어지는 곳. 아주 오래 된 고장에 닿는 기분이었다.
어제 브린디시에서 자그마한 실수가 있었다. 유럽 여행 책자에서 그동안 다닌 곳들을 잘라 버리고 그리이스 편만 남겨 놓았다. 배낭을 되도록 가볍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오늘 새벽 배 안에서 배낭을 뒤지자 그리이스 부분이 없는 것이었다. 오랜 여행에 지쳐 책을 잘라버릴 때 잠깐 졸음에 빠졌었나 그것 아니고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막막했던 기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움으로 변하고 있었다. 책자 따위의 도움 없이 그냥 들이닥치는 그대로 그리이스를 느낄 수 있지 않은가. 파트라스 항이 멀찌감치 보이는 배에서 그런 생각이 바닷물처럼 찰랑거렸다. 그리이스 여행은 꼭 그래야만 진수를 알 것 같은 합리화도 금방 되었다.
파트라스 항에서 오래 있진 않았다. 낯선 기분으로 얼마간 서성이다가 기차를 탔다.
기차는 여덟 시에 떠나네. 그리이스 하면 아그네스 발차가 부른 그 처연한 애상의 노래가 생각나는데 막상 아테네 행 기차에 오르자 전혀 달랐다. 기차는 서행을 하면서 이따금 클락숀 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버스나 승용차에서 나는 클락숀 소리가 기차에도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더군다나 정차하는 역도 많아서 동화적이라는 느낌이 절로 들었다. 서양 문명의 시초가 되는 땅에 거룩함이나 진지함과는 영 다른 이미지가 판을 치자 색다름이 배가되고 있었다.
생뚱맞은 분위기 속에 달리는 가차의 왼편으로는 그리이스 본토가, 오른편으론 펠로폰네소스 반도가 펼쳐진다. 양쪽 모두 독특한 문화적 색깔을 띠고 흘러와 그리이스 문명을 이룬 쌍생아일진데 그 모두를 기차 안에서 즐겁게 두리번거릴 수 있다는 것은 행복임에 틀림없다. 아테네에 도착해 숙소를 정하고 아크로폴리스 언덕으로 향했다.
흰 빛의 미끌미끌한 언덕을 오르자 파란 하늘 아래 하얀 건축물이 한 눈에 들어온다. 파르테논 신전이다. 아름다웠다. 이 개월 남짓 유럽의 구석구석을 떠돌아다니며 은연중에 추적해온 유럽 문명의 한 원형이 저 하얀 구조물에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흥분이 일었다. 신전은 파손이 심했음에도 완벽미가 있었고 거대 문명의 모델로서 손색이 없을만큼 근엄하고 품위 있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석주도 만져보고 멀리서 바라보기도 했다.
“원래는 옛 파르테논 신전이 있었지요. 그런데 페르시아와의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고 말지요. 그래서 새로 지은 게 저것이예요. 아테네를 모시는 신전으로 BC 5 세기 당시에 아테네 신은 그리이스에서 중요한 신이었어요. 저 파르테논 신전은 역사상의 유적들이 그렇듯이 그리이스의 흥망성쇠에 따라 운명이 달라지지요. 그리이스가 마케도니아에 의해 정복되어 그 후 로마에 편입되고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기독교적 중세 문명이 되자 기원 후 6 세기엔 저 파르테논 신전이 카톨릭 성당으로 쓰입니다. 그 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그리이스를 식민지로 삼을 때는 모스크로 쓰이지요. 17 세기엔 탄약의 폭발로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되고 19 세기에 들어선 영국인이 신전의 조각상들을 빼내어 영국으로 보내기도 합니다.”
어떤 관광팀을 인솔하는 가이드의 말을 듣고 있자니 2500년 간 그리이스를 훑어간 역사적 바람의 손길이 저 부서진채 견디고 있는 신전의 하나하나에 아로새겨 있어 진한 감흥이 일어났다.
신전과 대화라도 나누듯 충분한 시간을 보낸 후 아클로폴리스 언덕 중간쯤 내려오자 또다른 관광팀의 가이드가 말하는 소리에 귀가 기울어졌다.
“저 아래에 아고라 광장이 있지요.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활동하고 민주주의의 싹이 튼 곳이지요.”
반가운 이름들이라 귀가 즐거운데 “저쪽에 보이는 곳이 필리파포스 언덕이예요. 소크라테스가 갇혀 있던 감옥이 저 중간쯤에 있어요.”하는 말에 솔깃했다.
소크라테스가 없었다면 저 파르테논 신전도 역사상의 허다한 유적 중의 하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리이스가 서구 문명의 초석이 된 것은 그 정치 제도라기보다는 사상의 덕이다. 그리이스의 철학이 헬레니즘과 로마를 통해 중세에 이어지고 근대에 새롭게 확장됨으로서 현대의 유럽 문명은 그것에 빚진 바가 아주 크다. 소크라테스 이전에도 철학들이 있었지만 자연철학이라고 해서 인간 이외의 것에 관심이 컸다. 그런 것을 인간의 문제로 돌린 것이 소크라테스이며 그런 인간주의 철학은 그의 제자 플라톤을 통해 서양철학사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 서양철학사에선 상식인 그런 생각이 새삼 들면서 나는 저쪽 언덕에 있다는 소크라테스의 감옥 쪽으로 눈길이 멎어 있었다.
신전과 감옥. 저 감옥에서 죽으면서까지도 인간에 대한 사랑과 덕으로서의 철학을 펼치지 않았다면 저 신전 또한 지금과 같은 추앙의 빛을 받지는 못하리라는 생각이 다시금 들자 저 파르테논 신전을 휩쓴 2500 년간의 다채로운 역사적 바람의 손길들과 그것들을 견뎌낸 내공 보다는 소크라테스가 갇힌 저 감옥 하나가 더 의미 있어 보였다. 저 감옥이야말로 신전을 신전답게 만들어주는 아우라 같았다. 그런 감정 속에 언젠가 읽은 플라톤이 쓴 <크리톤>이라는 책의 마지막 문장마저 스멀거리고 있었다. 소크라테스가 단지 철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소송을 당해 감옥에 갇혔는데 죽음 직전에 친구인 크리톤과 나눈 대화이다.
‘친애하는 크리톤. 나는 내 귓속에서 속삭이는 이러한 목소리를 듣는 것 같네. 마치 신비가들의 귀에 들리는 피리소리처럼...이 목소리는 내 귓속에서 윙윙거리면서 다른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하네. 그리고 나는 자네가 다른 말을 아무리 하더라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네. 할 말이 있으면 해보게.’
‘소크라테스. 나는 할 말이 없네.’
‘크리톤. 그렇다면 신의 뜻에 맡겨두고 신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기로 하세.’
살 길을 제시하고 설득하러 온 친구를 철학적 자세로 오히려 설득을 시킨 소크라테스의 말. 그의 귓속에서 윙윙거리며 다른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한 피리소리. 그런 말을 했다는 곳이 바로 저쪽에 있다니 감개무량할 따름이었다. 2500년의 시차를 뛰어넘어 그 의연한 대화가 지금도 저 곳에서 나지막히 흐르는 것 같았다.
소크라테스가 활동하던 시기는 그리이스의 황금기에서 쇠퇴기로 접어드는 시기였다. 오리엔트로부터 빛을 받아 에게 문명권을 통과한 다음 도리아의 침략으로 인해 암흑기에 들어선 그리이스는 그 후 폴리스 형태로 발전하면서 민주주의의 초기 형태와 사상의 놀라운 꽃을 피운다. 그와 동시에 오리엔트의 새로운 맹주로 떠오른 페르시아와의 대결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는 했지만 피해도 막심해 파르테논 신전마저 파괴되어 다시 짓게 이른다. 황금기를 맞지만 짧았으며 아테네와 스파르타와의 전쟁마저 일어나 아테네가 스파르타에게 패한 이후 그리이스 전체가 쇠퇴해져 간다.
아크로폴리스 언덕을 내려와 현대적인 건물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면서도 2500 년 전의 그 역동성이 가슴을 진하게 뒤흔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이스는 파괴된 신전을 다시 지었지만 그것이 그리이스를 부흥시키지는 못한다. 그리이스를 유럽 문명의 초석이라는 거룩한 위치에 놓은 것은 신전의 부활이 아니라 인간에 기초한 철학이다. 나는 저 위 아크로폴리스에 우뚝 서 있는 파르테논 신전을 바라보다가 저 너머 필리파포스 언덕에 있다는 소크라테스의 무덤 쪽으로 절절한 마음의 눈길이 기울고 있었다.
이명훈 (소설 ′작약도′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