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에서 사먹은 망고 쥬스가 상했는지 설사기운이 돈다. 인도와 네팔의 국경까지 버스로 오는 동안 불편해 창밖의 경치를 제대로 감상도 못했는데 국경 가까이 흐드러지게 핀 하얀 갈대는 눈부셨다. 국경 마을인 락솔에서 하룻밤 자는 동안에도 내내 설쳤다.
다음날 새벽 릭샤를 타고 얼마간 달리자 구멍가게처럼 생긴 초라한 출국사무소가 눈에 들어왔다. 간단한 출국 절차를 밟고 조금 더 가니 강이 흐르고 다리가 놓여 있다. 다리의 중간 부분이 국경이라고 릭샤꾼이 말한다. 동경의 나라인 네팔에 접어들어서인지 쳐진 몸에 기운이 돌기 시작한다. 거리는 인도의 그것과 큰 차이는 없었으나 북적이지 않고 편안감이 있었다.
버스로 갈아타 몇 시간을 달려 포카라에 도착했다.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푼 다음 근처의 태와 호수를 산책한다. 멀리 흰 빛의 안나푸르나가 빛나고 호수면에도 비춰 마치 한폭의 데칼코마니 같다. 환상적이었다. 차 안에서 놓쳐버린 아름다움들이 이곳에 다 있었다.
게스트하우스 식당에서 관광객들과 함께 하는 저녁 식사도 즐거움이었다. 중국인, 이스라엘 청년, 일본 여자와 어울려 이 얘기 저 얘기 흘러갔는데 특히 이스라엘 청년의 이야기가 찡했다.
“이스라엘 대학생들은 불쌍해요. 대학시절에 군대를 가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 전쟁이잖아요. 죽이고 죽을 정도의 체험을 겪는 거지요. 그 후유증으로 제대 후 멀리 떠나는 경우가 많아요. 네팔로도 많이 오지요. 저도 그런 경우구요.”
그러다가 히피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이곳 포카라가 한때 히피들의 천국이었기에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몇 십 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대개 죽고 없지요.”
이스라엘 청년이 또 말했다. 그의 눈빛엔 히피에 대한 강한 동경과 함께 그 불행마저도 자기 것으로 껴안고 싶어하는 축축한 우수의 빛이 담겨 있었다.
아쉬운 술자리를 뒤로 하고 취침, 새벽 네 시에 일어나 트레킹에 나선다. 밤 늦도록 퍼마신 술에 잠까지 부족해 어질어질한채 가이드와 함께 택시에 올랐다. 졸다깨다 보니 산중턱쯤의 어두움 속에 내려준다. 이곳부터는 도보 행진이다. 천천히 비탈진 산길을 오른다. 사랑곳 가까이 다달았을 때 검프레한 어둠 속에 주변 풍경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짜이 한잔을 마시며 조금 시간이 흐르자 앞산 위로 불그스레한 색깔이 감돈다. 우리는 사랑곳까지 단숨에 걸어올랐다. 동쪽 하늘의 붉은 기운이 더욱 진해지며 어둠이 거치면서 안나푸르나의 장대한 모습이 드러나고 있었다. 어느 산의 정상 위로 붉은 해가 솟아오르고 있었고 그 빛을 받아 안나푸르나의 설봉이 조금씩 눈부시게 빛나기 시작했다.
과연 안나푸르나였다. 태와 호수의 데칼코마니 영상이 하나로 접히면서 황홀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태양이 솟아오름에 따라 그 빛을 받는 설면이 점점 넓어지며 하얀 빛을 반사하는 풍경은 실로 압권이었다. 그 둘레의 겹겹의 산들과 평원 모두가 빛의 높이와 세기가 달라짐에 따라 색깔이 시시각각 다르게 변이되고 있었다. 눈 앞의 초목들은 그린빛으로 또렷했으며 멀리 떨어진 산들은 옅은 안개에 가려 연분홍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감탄하는 사이 해는 어느덧 높게 떠 주변 풍경은 초록색으로 빛나기 시작했으며 저 아래 보이는 태와 호수는 산 그림자를 잔잔하게 비춰내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노우달라까지는 걸어서 세시간 걸려요.”
충분히 만끽할 즈음에 가이드의 말이 들려 왔다. 우리가 또다시 걷는 길 역시 멋진 시골길로 주변 경관이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붉고 하얀 코스모스들이 화사하게 피어있고 인도인들이 꽃목걸이로 만들어 신상에 바치는 주황색의 꽃들도 들판에 가득했다. 벼는 잘 익어 황금빛으로 찰랑거렸고 푸르게 쭉쭉 뻗은 대숲과 옥수수 밭, 바나나, 듬성듬성 놓여있는 시골집들이 선경인 듯 했다.
노우달라에 도착해 패딕까지 버스를 타고 내려와 점심을 먹고 잠시 쉬었다.
“여기서부터 담푸스까지는 가파른 산행길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산길 초입부터 경사가 심한 돌층계가 우리를 맞는다. 숨이 가쁘고 다리가 후둘후둘 떨렸다. 하지만 그 길 역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었다.
담푸스 마을에 가까이 오자 날씨가 급변해 조금씩 가는 빗발을 뿌리더니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한 얼마 후에는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늘은 온통 구름에 덮히고 들판에 푸르게 자란 파꽃들이 싱그럽게 비를 맞는다. 앞집 대문 가에 심겨진 코스모스도 줄기 위로 굵은 빗방울을 굴려 떨어뜨리며 연분홍 꽃들을 흔들고 있다. 굵직한 대나무 기둥 위에 호롱불이 걸린 이곳 게스트하우스의 스레트에서도 굵직한 빗물이 떨어져 황토흙에 박힌다.
어렸을 때 고향집의 황토빛 흙마당과 장미꽃 화단에 떨어지던 장쾌한 여름 장마도 무의식 중에 연상되었다. 이 마을은 잊혀져 가는 기억과 풍물을 말끔하게 되새겨 주고 있었다. 사람들의 선한 미소가 그렇고 코스모스와 돌담도 그렇다. 저 앞에 보이는 안나푸르나는 짙은 구름에 가려 능선이 파스텔을 뭉갠듯 번져 보이고 그곳에도 비가 내리는 것 같다.
비 내리는 네팔의 산간마을은 한적하고 평화롭기만 하다. 멀리 떨어진 집에서 아이들 노는 소리가 들리고 닭 우는 소리도 들린다. 바람이 간간히 불어 먼데 보이는 바나나 잎이며 옥수수 잎을 흔든다. 공기 또한 맑고 깨끗하기 그지없다.
저녁이 되니 춥다. 저녁 식사로 가이드와 함께 네팔식 탈리와 맥주를 먹는다. 오후 일곱시인데도 어둡다. 멀리서 개짖는 소리가 들린다. 오래 전 고향을 떠나, 이곳 산지에서 낯선 여행객인 나와 술을 마시는 가이드의 얼굴엔 외로움이 느껴진다.
“에베레스트 부근 해발 7000미터 고지의 춥고 험한 남체부자라는 마을에서 태어나 여덟 살까지 살았지요. 아홉 살부터 혼자 객지를 떠돌며 식당 등에서 잡일과 요리를 배우고 열너댓살부터 히말라야 산악의 헬퍼로 일했죠. 그후 현재 게스트하우스의 주인을 만나 그 밑에서 일하고 있죠.”
그의 인생엔 많은 여운이 배어 있다. 이제 이십대 초반인데도 삶의 경력이 놀랄만큼 풍부하다. 그의 이야기들이 담푸스 밤의 추위와 빗소리에 섞여 잔잔히 젖어온다.
다음날의 새벽은 촉촉히 젖어 있었다. 햇빛이 돋자 안나푸르나의 설면이 새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전신주 꼭대기에 새들이 노래하고 풀마당엔 닭들이 오종종거린다. 연분홍 코스모스는 어젯 밤의 비에 깨끗히 몸을 씻고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비에 젖어 초록으로 빛나는 파꽃. 아침잠에서 깨어 신께 기도를 드리고, 조그만 꽃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네팔리 소녀.
풍경과 여운만으로도 충일한 시간. 평생을 살아도 그리움으로 간직될 그 안에 잠시나마 있는 것만으로 감사함을 느낀다. 꽃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소녀가 안나푸르나의 신성한 빛으로 해맑게 웃어준다.
이명훈 (소설 ′작약도′ 저자)